소설리스트

매니저 어플-515화 (515/599)

〈 515화 〉 [또 다른 이계]

* * *

“와, 이거……. 제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 것 같은데요?”

“알마 씨가 옆에서 도와주신 덕분이죠.”

“호호, 절 너무 띄워주시는 거 아니에요?”

빈말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알마가 내 등을 찰싹찰싹 때리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내 말은 어디까지나 진심이었다.

실제로 과연, 나 혼자서 이걸 만들었다면 이 정도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아니었다.

그 증거로 내가 사슴 고기 스튜를 다시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기가 무섭게.

[사슴 고기 스튜를 요리합니다.]

[예상 결과]

맛 : 6

향 : 4

예상 결과가 알림창으로 표시되었다. 당연히 점수는 더 낮았다. 아마도 이건 알마의 도움 없이 나 혼자서 사슴 고기 스튜를 만들었을 때의 결과일 것이다. 물론 이 정도도 충분히 훌륭한 편이긴 했다.

하지만 과연, 이걸로 용사가 만족해줄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겠지.’

딱 평범한 맛이었다. 어느 식당에 들어가서 시키더라도 흔하게 맛볼 수 있는 맛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그냥 평범하게 맛있을 뿐이었다.

‘일단 좀 더 연습을 해보자.’

어차피 6일이란 시간이 남은 상태였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이렇듯 마음을 다스린 나는 사슴 고기 스튜를 몇 번 더 끓여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 요리사 레벨이 오르지 않았다.

4레벨부턴 경험치 요구량이 훨씬 더 많아진 걸까? 아니면 뭔가 내가 놓친 게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일단 칼질이 많이 능숙해졌다. 화구를 사용하는 법도 익숙해졌고, 향신료를 다루는데 조금 더 신중했다. 덕분에 아주 조금이지만, 사슴 고기 스튜의 결과가 발전했다.

[사슴 고기 스튜]

맛 : 6점

향 : 5점

상품 가치 : 6점

평가 : 균일한 크기의 고기가 씹는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향 또한 크게 나쁘지 않지만, 비린내가 나는 게 약간 흡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고 먹을 수 있을 수준입니다. 사슴 고기 스튜에서 요리사의 집념이 느껴집니다.

‘사슴 고기 스튜는 이제 그만 만들자.’

이젠 다른 걸 도전할 차례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드는데, 재료를 손질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알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딱 봐도 내가 쓸 재료는 아니었다. 이에 주방에 나있는 작은 창문을 통해서 밖을 보니,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 해가 보였다.

어느덧 시간이 저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녁 장사를 해야 할 시간이구나.’

아쉽게도 요리 연습은 여기까지만 해야 할 듯싶었다.

나는 내가 쓴 주방 도구들을 깨끗이 정리하고는 한참 저녁 장사 준비를 하느라 바쁜 알마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시게요? 저녁은요? 서비스로 드릴게요.”

“나중에 맛보겠습니다. 지금은 너무 배불러서요.”

“하긴……. 아, 그럼 내일은 언제 오실 건가요?”

“아침이나 점심때 오지 않을까 싶네요.”

“네, 그럼 그때 봐요.”

알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식당 밖으로 나온 나는 근처의 적당해 보이는 여관에 들어가서 방을 잡았다. 방값은 하루에 은화 1개로 제법 비싸긴 했지만, 어차피 6일 후면 멸망할 세계였기 때문에 일주일치 숙박비를 한꺼번 계산했다.

덜컹.

“넓네.”

여관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서 들어간 방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었다.

나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은 뒤에 스마트폰을 꺼냈다.

“슬슬 누나가 깨어날 시간이겠지?”

마음 같아선 이곳에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조교의 방과는 다르게 이계는 조금씩 시간이 흘렀다. 이를 상기시킨 나는 매니저 어플을 실행시켜서 현실로 되돌아갔다.

[멸망한 세계에서 퇴장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요]

네를 눌러서 현실로 돌아가자, 처음 이계에 진입했을 때처럼 심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 이계 퀘스트를 할 때는 이 정도로 어지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이곳이 멸망한 세계이기 때문인 걸까? 그런 의문을 가지며 뿌옇게 흐린 시야가 또렷해지기를 기다리는데 돌연 몸에 무언가 걸쳐지는 게 느껴졌다.

“응?”

손을 뻗어서 어깨를 만져보니, 딱딱한 갑옷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이건 내가 멸망한 세계에 입장하기 전에 입고 있었던 유령 기사의 중갑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중갑만 착용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장갑과 칠흑의 지팡이 모두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만든 건.

“시간이……. 안 지났다고?”

멸망한 세계에 진입했을 때와 같은 시간이 스마트폰에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건 비단 스마트폰뿐만이 아니었다. 벽에 걸려있는 시계의 시침과 분침도 그대로였다. 이를 확인한 나는 멸망한 세계도 조교의 방과 같은 구조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멸망한 세계란 건, 이미 한 번 멸망했던 세계라는 뜻이니까……. 조교의 방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게 아닐까?’

그래서 조교의 방처럼 시간이 멈춰있는 걸지도 몰랐다. 물론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사정이 있을지도 몰랐다. 은밀한 비밀이라던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방법이 전혀 없었다.

‘뭐, 그래도 나한텐 딱히 해가 되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내게 득이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칠흑의 지팡이와 보호의 반지, 유령 기사의 중갑과 장갑을 소환 해제한 뒤에 다시 멸망한 세계에 진입했다.

시간이 멈춘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구태여 현실에 들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멸망한 세계를 구원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요]

네를 눌러서 멸망한 세계에 다시 진입한 나는 속이 울렁거리는 걸 꾹 참으며 몸을 수그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몇 초가 지나자, 점차 속이 편안해졌다. 이를 느낀 나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펴봤다.

‘여관방이 맞네.’

혹시나 처음 시작했던 지점으로 돌아가 버렸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고자, 창문을 활짝 열어서 서늘한 밤공기를 맡았다.

“후, 이제 좀 살겠네. 상태창.”

[김 유현]

요리사 레벨 : 4

미식가 레벨 : 4

도축자 레벨 : 0

요리 연구가 레벨 : 2

여전히 처참한 능력치였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희소식이 있다면, 앞으로 오를 일만 남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내겐 시간이 많았다.

나는 돈만 챙긴 다음에 여관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미식가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나는 어두워진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노점상들을 둘러보았다.

‘포장마차 거리 같네.’

노점상에서 파는 건, 주로 군것질거리였다. 특히나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팔고 있는 건, 딸기잼 같은 걸 듬뿍 뿌린 빵 과자 같은 것이었다.

궁금한 마음에 하나 사서 먹어보니, 부드럽게 쫀득하게 씹히는 빵과 달콤하면서도 약간 신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아까 식당에서 사슴 꼬치구이를 먹었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이곳 사람들은 신맛을 유독 좋아하는 것 같았다.

‘상품 가치는……. 이게 5점이구나.’

[산딸기 잼을 뿌린 못난이 빵]

맛 : 5점

향 : 6점

상품 가치 : 5점

평가 : 빵집에서 굽다가 실패한 빵들을 모아서 만들었지만, 모양만 이상할 뿐이지 맛은 어디 한군데 흠잡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합니다. 산딸기도 한참 제철이어서 풍미가 좋습니다. 도시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간식입니다.

맛은 5점이었지만, 향은 6점으로 조금 더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냄새가 유독 더 좋은 편이었다. 특히나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톡 튀는 산딸기의 맛과 향이 입과 코를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산딸기 잼을 뿌린 못난이 빵을 먹었습니다.]

[미식의 관심이 높아집니다. 다른 세계의 요리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자신의 수준보다 훨씬 더 높은 요리를 먹음으로써 미식가로서의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산딸기 잼을 뿌린 못난이 빵의 레시피를 획득합니다.]

‘레시피가…….’

아쉽게도 미식사 레벨은 오르지 않았지만, 레시피는 획득했다. 이를 확인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시피를 사용해서 산딸기 잼을 뿌린 못난이 빵을 만드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알림창이 나타났다.

[예상 결과]

맛 : 4

향 : 5

어째서인지, 내가 들고 있는 음식보다 더 낮은 결과치가 나왔다. 숙련도 문제인 걸까? 어쩌면 의외로 산딸기 잼을 만드는 게, 어려운 걸지도 몰랐다. 나는 나중에 만들어보기로 마음을 먹고는 다른 노점상들도 구경했다.

[시큼한 소스를 곁들인 닭고기를 먹었습니다.]

[미식의 관심이 높아집니다. 다른 세계의 요리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자신의 수준보다 훨씬 더 높은 요리를 먹음으로써 미식가로서의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시큼한 소스를 곁들인 닭고기의 레시피를 획득합니다.]

[소금 꼬치구이를 먹었습니다.]

[미식의 관심이 높아집니다. 다른 세계의 요리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자신의 수준보다 훨씬 더 높은 요리를 먹음으로써 미식가로서의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미식가 레벨이 상승합니다.]

[소금 꼬치구이의 레시피를 획득합니다.]

거리의 여러 음식을 먹다 보니, 어느샌가 미식가 레벨이 상승했다. 확실히 먹기만 하는 건, 요리사 레벨을 올리는 것보다 훨씬 더 편하고 쉬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계를 구하기 위해선 미식가 레벨보단 요리사 레벨을 더 올려야만 했다.

‘요리사 레벨을 어떻게든 빨리 올려놔야지.’

그나마 게임을 하듯이 요리사 레벨을 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에 그것마저 없었다면 진작에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기즙을 뿌린 볶음밥을 먹었습니다.]

[미식의 관심이 높아집니다. 다른 세계의 요리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자신의 수준보다 훨씬 더 높은 요리를 먹음으로써 미식가로서의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고기즙을 뿌린 볶음밥의 레시피를 획득합니다.]

‘이거 의외로 맛있네.’

돌아다니다 보니 볶음밥 같은 게 보여서 사서 먹어봤더니, 의외로 그럴듯한 맛이 났다. 다만 진짜로 고기즙만 뿌린 듯, 고기는 한 덩이도 없었다. 게다가 쌀은 한국 쌀이 아닌 듯 점성이 약하고, 쌀알이 상당히 길었다. 태국 쌀이 보통 이렇게 생겼던데, 이쪽도 그런 품종인 것 같았다.

나는 뭔가 씹는 맛이 부족한 볶음밥을 먹으며, 레시피를 차분히 살펴봤다. 그러다가 고기즙이 아닌 진짜로 고기를 넣은 볶음밥을 상상해봤다. 그러자 눈앞에 [예상 결과, 맛이 상승합니다.]라는 알림창이 나타났다.

[고기즙을 뿌린 볶음밥을 고기 볶음밥으로 변형합니다.]

[현재 자신의 수준보다 높은 요리의 레시피를 변형시켜서 맛을 상승시켰습니다. 요리 연구가로서의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요리 연구가 레벨이 상승합니다.]

[고기 볶음밥 레시피를 획득합니다.]

‘아하.’

요리 연구가는 기존의 레시피를 개량하거나, 아예 새로운 레시피를 만듦으로써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내가 직접 요리를 만들 필요도 없었다.

‘이거, 미식가보다 레벨을 올리기 쉬울지도.’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어지자 노점들이 하나둘씩 장사를 접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나는 발걸음을 돌려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방의 침대에 앉은 채로 오늘 먹은 음식들의 레시피를 조금씩 개량해봤다.

[예상 결과, 맛이 하락합니다.]

“음……. 생각보다 어렵네.”

쉬울 거라고 생각한 작업은 의외로 난항을 겪었다. 레시피들의 대부분이 조금만 건드려도 맛이 하락하거나, 향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심지어 아예 [요리의 본질에서 벗어났습니다.]라며 시스템이 내게 경고하기까지 했다.

‘요리의 본질이라.’

내겐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전문으로 요리를 배운 요리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요리에 진심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나마 시스템이 보조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쉽게 요리를 익히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복잡한 건, 제쳐두자.’

휴, 하고 한숨을 내쉰 나는 계속 레시피를 개량하며 요리 연구가의 레벨을 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요리 연구가의 레벨이 4를 찍었을 무렵, 창밖을 내다보니 맞은편 건물들 사이로 해가 뜨고 있는 게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