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4 [타협] =========================
“이건 또 뭡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뒤에서 철컥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눈에 딱 봐도 수상한 상황이었다.
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녀 또한 나를 따라 한 발자국 내딛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되요.”
“글쎄요. 누가 봐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요?”
“그렇게 보였다면 사과드릴게요.”
고개를 숙여 사과하려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재빨리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뇨, 사과는 됐습니다. 그보다 어서 빨리 다섯 번째 시험을 치렀으면 좋겠는데요.”
이런 내 말에 서큐버스는 나를 살짝 흘기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왜 그렇게 서두르시는 건가요?”
“엘레노아가 보고 싶으니까요.”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실제로도 엘레노아가 보고 싶었다. 어서 빨리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 내가 아무리 가슴을 싫어한다고는 하지만, 미인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가슴은 단지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지금 내 속은 시꺼먼 욕정으로 들끓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엘레노아를 만나게 된다면 하루 종일……. 아니, 그 다음 날에도 하고, 또 하고, 정액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쥐어 짜낼 것이 틀림없었다.
보지에도, 엉덩이의 구멍에도, 코에도, 귀에도……. 아아, 나란 인간은 정말로 글러먹었다.
“…….”
속으로 이런 망상을 하고 있는데, 서큐버스가 서글픈 표정을 지어보이며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그 모습이 묘하게 서글퍼 보였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때문일까? 앞선 서큐버스들과는 다르게 내 눈 앞의 서큐버스가 무척이나 특별해보였다.
물론 이 모든 게, 나를 유혹하기 위한 설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그녀의 태도로 보건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곧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부럽네요.”
그녀는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있었다. 나와 엘레노아의 관계를 말이다.
“저는 바보 같이 속아 넘어가버렸는데…….”
“…….”
서큐버스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의 연인은 시험을 포기하고 도망쳐버린 모양이었다.
하긴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이런 공간에 떨어지게 된다면 덜컥 겁부터 먹게 될 것이다. 물론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얼마든지 시험에 응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사랑만으로 이 시험들을 헤쳐 나가기에는 서큐버스들의 육탄공세가 너무나도 지독했다.
나도 하마터면 유혹에 넘어갈 뻔했으니 말이다.
“정말로 질투가 나요.”
그 때, 서큐버스의 목소리가 돌변했다.
그녀는 그윽한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 투둑, 소리와 함께 옷가지들이 하나둘씩 떨어질 때마다 흰 옥과도 같이 깨끗한 피부가 자기 모습을 드러내었다. 더불어 잘록한 허리 위로 크고 풍만한 가슴이 푸릉푸릉 흔들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보란 듯이 뽐냈다.
“……진심으로 당신을 빼앗고 싶어졌어요.”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 말한 그녀는 두 팔을 쭈욱 뻗어, 내 목을 휘감았다. 그러자 마시멜로 덩어리처럼 부드러운 가슴이 내 가슴팍에 맞닿으며 보기 좋게 찌그러졌다. 더불어 날 끌어안고 있는 그녀의 몸은 생각 이상으로 육감적이었다.
그저 마르기만 한 다른 여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제가 당신만의 여왕이 되어드릴게요.”
농염함이 한껏 깃들어있는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였다.
20대 안팎의 어린 여성들은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어른의 속삭임이었다. 숨이 턱 하고 목 끝까지 차올랐다. 당장에라도 눈앞의 서큐버스를 자빠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내 가슴팍을 꾸욱꾸욱 눌러대며 정신을 차리도록 만들었다.
나는 쿵쿵 뒤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이리 말하며 서큐버스를 밀쳐내자, 그녀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잔뜩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째서 안 된다는 건가요?”
“이유가 필요합니까?”
“필요해요.”
딱 잘라 말한 그녀는 오른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철컥철컥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며 창문이며 서랍장이며, 잠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전부 다 잠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그녀를 설득하지 못 하면, 방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 하는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설명해드리지요.”
이리 말한 나는 서큐버스의 몸을 차분히 훑어보았다. 무언가 흠잡을만한 것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매는 너무나도 완벽했다.
어디 한 군데 흠잡을 수가 없었다.
키도 크고, 살피듬도 좋았다. 특히나 둥글게 모양이 잡혀있는 엉덩이는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두드려보고 싶었다.
분명 찰싹찰싹 하고 예쁜 소리가 터져 나올 것이다.
‘서큐버스는 서큐버스라는 건가…….’
그나마 가슴을 꼽아볼 수가 있었지만, 그건 엘레노아 역시도 해당이 되었다. 그렇기에 가슴의 크기를 두고서 무어라 지적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녀의 성격을 탓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탓하기만 할 순 없었다.
좀 더 이야기를 해볼 필요성이 있었다.
“당신은……. 아, 그러고 보니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요. 저는 김 유현입니다. 당신은요?”
“엘리사에요.”
“엘리사……. 좋은 이름이네요.”
“고마워요.”
이처럼 내가 이름을 칭찬해주자, 엘리사의 딱딱한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
역시 칭찬만큼 상대방의 기분을 풀어주기에 좋은 것도 없었다. 옛말이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만든다고 말이다. 하물며 엘리사, 그녀는 연인의 배신으로 꿈의 세계에 갇히게 된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이런 식의 칭찬을 언제 받아보았겠는가?
물론 이곳에 갇히기 전에는 자주 받았을 것이다. 그녀의 처녀를 노리는 수많은 남성으로부터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서큐버스들 밖에 없었다.
즉, 이런 식으로 칭찬을 해줄 일도, 칭찬을 받을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엘리사 씨의 연인이었던 남성의 이름은 뭐였습니까?”
“그건 왜 묻는 거죠? 전 제가 당신에게 거절당한 이유가 궁금한 건데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만약에 엘리사 씨가 제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는다면 저도 엘리사 씨의 질문에 대답해드리지 않을 겁니다.”
내가 이처럼 단호히 말하자, 엘리사의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어쩔 수 없단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론이에요.”
“론이라……. 그 론이란 남자는 시험을 포기했던 겁니까?”
“맞아요.”
“어째서요?”
이런 내 물음에 엘리사는 정말로 분한 듯이 말했다.
“그 자식은 정말 개자식이었어요! 원하는 건, 오직 제 몸 뿐이었고……. 그는 절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저 말로만 사랑한다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바보처럼 속았던 거죠.”
“과연 그럴까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이어진 내 질문에 엘리사는 그게 대체 무슨 뜻이냐는 듯이 나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어찌나 살벌하게 노려보던지, 살이 다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걸 하나도 내색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생각해보세요. 론이라는 남자는 당신의 몸을 노렸을 만큼 여자를 좋아했던 남자입니다. 그런 남자가 이런 시험을……. 눈이 저절로 돌아갈 만큼 아름다운 서큐버스들이 자기를 안아달라며 애원하는 시험을 포기한다고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자식은 시험이 뭔지도 들어보지 않고 도망쳤어요!”
“그럼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꿈의 세계에 도착하자마자 도망치다니요? 마치 처음부터 준비를 했던 것처럼요.”
“……!”
이런 내 말에 엘리사는 크게 충격을 먹은 듯이 두 눈을 부릅떴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에 론은 꿈의 세계 오기도 전부터 엘리사, 당신에게 싫증이 났던 것 같습니다.”
“거, 거짓말 치지 말아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럼 묻겠습니다. 꿈의 세계에 오기 전에 당신은 론과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나는 엘리사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저, 전…….”
그녀는 덜컥 말문이 막힌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침착하게 말소리를 뽑아내었다.
“……론이 일하는 대장간으로 향하고 있었어요.”
“그 전에는요?”
“그에게 줄 도시락을 만들고 있었어요.”
“도시락을 만들기 전에는요?”
“그가 일하는 대장간에 있었어요.”
“왜요?”
왜라는 내 질문에 엘리사는 몹시도 황당하단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지극히 당연하단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라니요? 그야 당연히 그가 좋으니까요. 론도 절 좋아하고……. 당연한 거 아닌가요?”
뭔가 냄새가 났다. 아무래도 여길 집중적으로 파야 될 듯이 싶었다.
나는 한 발자국, 엘리사 쪽으로 다가서며 추궁하듯 물었다.
“그럼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론이 다른 여성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당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못하게 말렸어요! 다른 여자가 론에게 반하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요.”
“그 여자가 대장간에 용무가 있어서 방문한 손님이라도요?”
“그 때는 제가 론을 대신해서 손님을 상대했어요. 어차피 손님이잖아요? 론도 제가 대신 상대해도 괜찮다고 해주었고요.”
“론이 싫어하진 않았습니까?”
“싫어할 리가 없잖아요. 그 사람은……. 론은 대장간 일을 하느라 항상 바쁜 걸요!”
엘리사는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소리쳐 말했다. 이에 나는 납득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군요. 그럼 쉬는 날에는요?”
“저와 함께 보냈어요.”
“늘 함께요?”
“네, 함께 했어요. 어딜 가더라도 항상 함께요. 너무 행복했어요. 그때는요.”
그리운 옛 추억을 들춰내듯이, 엘리사는 무척이나 애틋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녀가 론이라는 남자를 얼마나 많이 사랑했던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혹시 론이 혼자 있고 싶다고 한 적은 없습니까?”
“…….”
불현듯 엘리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세히 듣고 싶었다. 그랬기에 나는 좀 더 강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왜 대답이 없습니까?”
이처럼 내가 강하게 추궁하자, 엘리사는 어쩔 수 없단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아니, 도리어 내게 화내고 있었다.
“있어요. 하지만……. 혼자 있을 필요가 왜 있나요?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엘리사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비로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겉으로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래서 론이 시험을 포기하고 당신을 떠났던 겁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요?”
“엘리사, 당신은 분명 완벽한 여자입니다. 누가 봐도 혹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당신이란 여자는 믿음이란 게 전혀 없습니다. 그게 바로 론이 당신을 떠난 이유입니다.”
“믿음이 없다니요? 제가 론을 얼마나 믿었는데요!”
엘리사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내게 따졌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여기서 더욱 더 몰아붙여야만 되었다.
모든 건, 전부 다 네 탓이었다면서 말이다.
“그런 사람이 하루 종일 론이 일하는 대장간에 있었습니까?”
“그, 그건……. 론을 사랑하니까…….”
“그건 핑계지요. 당신은 론을 감시했던 겁니다! 정말로 사랑했다면, 론이 다른 여자와 대화를 하더라도 그가 다른 여자의 유혹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믿었겠지요.”
“하지만 남자들은 유혹에 약해서…….”
“그럼 저는요?”
“…….”
순간 엘리사는 할 말을 잃은 듯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에 나는 마치 쇄기를 박듯이 재차 물어보았다.
“제가 서큐버스들의 유혹에 넘어갔습니까? 당신의 유혹에 걸려들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란 여자는 말로만 사랑한다고 했을 뿐이지, 정작 믿음은 주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의심을 했던 거죠. 론은 분명 그것에 질려서 당신을 떠났던 것일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는 처음부터 제 몸만을 원해서……!”
“정말로 그럴까요? 그가 당신에게 처음 고백했을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저, 절…….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 말에서 거짓이 느껴졌었습니까? 그가 정말로 당신의 몸만을 원해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아…….”
엘리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신음성을 흘렸다. 자신이 무엇을 잘 못 한 것인지, 얼마나 터무니없는 잘 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깨달을 것이었다.
그녀는 털썩 주저앉으며 양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쌌다.
============================ 작품 후기 ============================
이걸로 영웅 등급의 균형이 이루어지겠군요.
영웅 등급의 거유는 운피레아, 엘레노아
영웅 등급의 빈유는 에나, 시류
은아준 님 : 그렇지 않습니다! 서큐버스 중엔 빈유란 없죠!
Gneji 님 : 엌ㅋㅋㅋ
무한의기사왕 님 : 여, 여깄습니다!
페어리블러시 님 : 재밌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jungil5858 님 : 헛, 인큐버스라닠ㅋㅋ 시꺼먼 남자를 등장시킬 순 없죠
니알라토텝 님 : 엌ㅋㅋ 웃겨서 ㅋㅋㅋ 음, 아무리 그래도 인큐버스는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