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88 [타협] =========================
마리오네트를 내려다보고 있던 김 예지의 얼굴에 깜짝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소현 언니하고 지아 언니한테요?”
“싫으십니까?”
“네? 아니에요. 그냥…….”
내 물음에 예지는 말끝을 흐리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녀의 근심과 걱정이 여기까지 전해져오는 듯했다.
뭘 그리 고민하고 있는 걸까? 당장에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가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렸다.
“……지아 언니는 엄하니까요.”
“엄해요?”
“그냥 엄한 게 아니에요. 조금만 실수해도 엄청 혼내니까……. 물론 언니가 그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만, 그래도 가끔은 놀고 싶달까…….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농땡이 피우고 싶은 거요.”
예지는 헤헤, 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두서없이 횡설수설 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얼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예지의 나이가 18살이었던가.’
한참 놀고 싶을 나이에 유 지아처럼 엄격한 사람에게 붙잡혀서 운동을 하고 있자니, 마음이 썩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유 지아는 운동선수이기까지 했다.
그녀의 엄격함이 어느 정도일지는 눈 보듯 훤했다.
“그럼 신 혜진 씨에게 갈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신 혜진 씨도 부담스러운 건가요?”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냥 혜진이 언니는……. 뭐랄까? 좀 독특하다고 해야 될까?”
예지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는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 말대로 신 혜진은 다른 마물 사냥꾼들에 비해서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확실히 독특하긴 하죠.”
“그렇죠? 가끔씩 혜진이 언니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니까요? 특히나 저번에 지아 언니네 체육관에서 합숙을 했을 때, 잠깐 화장실에 가려고 방 밖으로 나왔는데 혜진이 언니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제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데요! 전 그 때,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대기까지 하면서 당시의 심정을 내게 전하는 예지의 행동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녀와 함께 저택 쪽으로 발걸음을 계속 옮기며 입을 열었다.
“하하, 놀랐겠네요.”
“귀신인 줄 알았다고요. 제가 그 때만 생각해도……. 으…….”
귀여웠다. 이런 게 바로 여고생이란 걸까? 뭔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이미지하고 잘 부합되었다.
킁킁, 냄새를 맡자 달콤하면서도 희미한 냄새가 내 코를 간질였다. 마음 같아선 크게 숨을 들이켜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사자를 바로 옆에 두고서 그런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가면을 고쳐 쓰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랜 뒤에 담담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유 지아 씨의 체육관에 다들 자주 모입니까?”
“전에는 다들 집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밖에 모이지 못 했는데, 요즘에는 거의 매일 모여요.”
“매일이요?”
“네! 현주 언니가 다들 멀리 떨어져 있으면 모이기 힘들 거라면서 지아 언니의 체육관 주변으로 집을 구해주었거든요.”
이건 또 의외의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현주가 마물 사냥꾼들에게 집을 마련해주었다니, 상당히 기특한 일이었다. 나중에 따로 불러내어서 상을 주어야 될 듯이 싶었다.
나는 속으로 이리 생각하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사를 했겠군요. 전학을 가게 된 학교는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가끔씩 전 학교의 친구들이 그립긴 하지만……. 채원이랑 같은 반이라서 그런 게 좀 덜하긴 해요.”
예지의 대답은 해맑기 그지없었다.
그 표정에선 불안이나 근심 따위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쩜 이리도 해맑은 여고생이란 말인가? 천연이라 해도 모자랄 것이다.
쾅…….
그 때, 저 멀리서 흡사 폭탄이라도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진동까지도 느껴지고 있었다.
예지도 그걸 느낀 모양인지, 재잘재잘 떠들고 있던 그녀의 조그마한 입이 꾹 다물어졌다.
콰앙. 쾅…….
또다시 폭음이 들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저리도 요란한 폭음이 들려온다는 말인가?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저택의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폭음의 진원지가 바로 저택이었다.
‘설마…….’
머릿속에 설마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걸 인간이 내고 있는 거라고? 물론 마법을 사용한다면 이 정도 폭음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택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 소현, 유 지아 그리고 에나뿐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세 사람 모두 마법을 전혀 사용할 줄 몰랐다.
“이거 저택 쪽에서 나는 것 같은데요?”
예지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누군가가 저택으로 쳐들어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게 가장 그럴 듯한 추측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예지의 어깨를 한번 토닥여주고는 그녀와 함께 저택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쾅. 퍼엉. 쾅. 쾅.
저택에 가까워질수록 폭음이 크고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렇게 저택에 가까워질 무렵, 나는 복날의 개처럼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는 두 여자를 볼 수가 있었다.
“소현아, 조심해! 거긴……!”
“네? 잠, 꺄악!”
“집중하십시오.”
콰앙!
에나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땅바닥에 움푹 파였다.
마치 누군가가 지뢰나 수류탄 따위를 잔뜩 던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전부 다 하나 같이 에나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무시무시한 괴력을 자랑하며 달려는 에나의 행동에 소현과 지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맞았던 모양인지 옷이며 얼굴이며 전부 다 아주 가관이었다.
“집중이고 나발이고, 악!”
“언니, 피해요! 꺅!”
“남을 신경 쓰기 전에 자기를 먼저 신경 쓰십시오.”
쾅!
피가 튀기는 추격전이란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에나가 손속에 사정을 봐주고 있었던 모양인지, 두 사람 모두 큰 상처는 없었다.
지금까진 말이다.
퍽!
“우엑!”
“꺼억……. 컥.”
내가 지켜보고 있단 걸 눈치 챈 모양인지, 에나가 한층 더 빨라진 움직임으로 이 소현과 유 지아를 단번에 제압했다. 덕분에 두 사람 모두 나란히 자기 배를 움켜쥔 채로 땅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살벌하네.’
내가 대체 뭘 본 걸까? 두 눈으로 직접 봤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그나저나 실력 차이가 이 정도나 날 줄이야.’
에나가 이길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로 압도적으로 이길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 했다.
왜냐면 이 소현과 유 지아, 두 사람은 마물 사냥꾼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각자 체력과 민첩을 80씩 넘기면서 고유 스킬을 보유하고 있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들이 이토록 무참히 깨질 줄이야.
나는 전혀 예상지도 못한 상황이 깜짝 놀라는 한편, 에나의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이처럼 속으로 놀라고 있는데, 에나가 태연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하지만 이런 그녀와는 다르게 소현과 지아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 한 채, 웩웩대며 헛구역질을 해대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이윽고 에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잠깐 시험을 해볼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봐드리겠습니다.”
“네? 아니요, 에나 씨까지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시험은 저 두 사람에게 맡기면 되니까요.”
만약에 에나가 저주 받은 마리오네트의 상대로 나온다면 보나마자, 예지도 저 두 사람처럼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웩웩대며 헛구역을 해댈 것이 틀림없었다.
이건 예지도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인지,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고 있었다. 심지어 마리오네트도 입을 떡 벌린 채,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만큼 방금 전, 에나가 보여준 무력은 어마무시한 것이었다.
“이 소현 씨와 유 지아 씨가 일어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겁니다.”
하지만 에나는 이런 소녀와 인형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한사코 자기가 하겠다며 의욕을 내비쳐보였다.
그 덕분에 초조해진 예지가 성자의 지팡이를 앞으로 쭈욱 내밀며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치료할 수 있어요! 바로요!”
이리 소리쳐 말한 예지는 그대로 성자의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광역 상처 회복!’이라고 외치자, 팟! 하고 새하얀 빛이 터지더니 그녀를 중심으로 5미터 이내에 있는 사람들의 몸에 빛이 스며들었다.
덕분에 어디 한 군데 성한 곳 없이, 상처로 가득했던 이 소현과 유 지아의 몸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더불어 두 사람의 호흡도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에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크게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대단하군요.”
“다들 저 정도는 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 정도로 빠르게……. 그것도 피부에 난 상처를 눈에 띌 정도로 회복시켜주는 신성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최소한 고위 신관은 되어야 될 겁니다. 그런데 그 정도 수준의 최상급 신성 마법을 저토록 어린 나이에 해내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뭔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기억이 맞다면 성자의 지팡이의 등급은 희귀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작 그 정도 등급 밖에 안 되는 장비가 고위 신관의 능력과 맞는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충성도 100을 찍은 에나가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힐다 공자의 측근들이 놀랄 만도 하네.’
나는 그 날, 힐다 공자를 치료해주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에나는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검이 킹갓엠페러제네럴충무공신검이란 사실을...
P.S. 걱정해주신 독자님들 덕분에 며칠 푹 쉬었습니다. 기다려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수천천사 님 : 엌ㅋㅋ 확실한 방법이긴 하죠
엔루 님 : 매번 감사합니다!
밀뷰 님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언제나 환영입니다!
선무하 님 : 많이 자극적이죠
RunaticR 님 : 영지물이라니... 아마도 안 쓸 겁니다. 저 죽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