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협] -->
“이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정산된 정기의 양을 확인하고 나니 감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당분간 정기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확인을 눌렀다.
그 후, 민서가 지금 뛰고 있는 배구 경기를 보기 위해서 매니저 어플을 종료하려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따르르릉!
누가 나한테 전화를 걸은 건가 싶어서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은하였다.
“여보세요?
-오빠, 집에 무슨 일이 생기신 거예요?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걱정 어린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내가 집에 무슨 큰 일이 생겨서 급히 돌아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에 나는 그녀를 안심시켜주고자 아무 일 아닌 듯이 말했다.
“별 일 아니었어. 갑자기 아무런 말도 없이 먼저 나가서 미안해, 은하야.”
-아니에요. 별일 아니었다니 다행이긴 한데……. 깜짝 놀랐어요.
은하는 휴, 하고 작게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볼멘소리를 내었다.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아침 일찍 떠났던 게 어지간히도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미안해, 다음에 내가 맛있는 거라도 하나 사줄게.”
-정말이죠?
“그래, 정말로.”
나는 호쾌하게 대답했다.
밥 한 끼 사는 걸로 은하를 달래줄 수만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대답한 뒤에 나는 오늘 있었던 2차 예선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나저나 2차 예선은 어떻게 됐어? 잘 했어?”
-아직 하고 있는 중이에요. 저희는 방금 막 끝났고요.
“합격할 거 같아?”
-음……. 저는 잘 모르겠는데, 지현이하고 하란 언니는 벌써부터 합격했다면서 좋아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이번에 만난 팀장하고는 죽이 척척 잘 맞는 모양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언제쯤 끝날 거 같아?”
-4시나 5시쯤에 끝날 거 같은데……. 오늘 밥 사주려고요?
은하의 물음에 나는 슬쩍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누나가 허락해주려나.’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물론 서연이 누나가 이 정도도 허락해주지 않을 만큼 속이 좁은 사람인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하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선선히 허락을 해줄 정도로 천사 같은 사람인 것은 절대로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잠깐만.”
이리 말한 나는 내 소리 차단을 누른 뒤에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한창 요리 중인 서연이 누나를 등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뭐야, 갑자기…….”
누나는 이런 내 싫지 않은 모양인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이에 나 또한 고개를 숙여, 누나의 매끄러운 입술에 내 입술을 맞췄다.
“……으응, 하음.”
가벼운 키스는 금세 열정적인 키스가 되었다.
누나는 내 가슴팍에 등을 편하게 기댄 채, 두 눈을 꼬옥 감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전율이 손끝을 타고서 찌르르 전해져왔다. 나는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난폭하리만큼 격정적으로 키스했다.
누나는 마치 이런 나를 보채기라도 하듯이, 달뜬 신음을 토해내며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끌어당겼다.
이런 애타는 몸짓에 내 손이 저절로 위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제법 묵직한 무게감이 손바닥 안을 가득 채웠다.
‘아……!’
그것을 느끼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천천히 누나의 입술에서 입을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누나, 부탁이 있어요.”
“부탁……?”
누나는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노곤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네, 이따가 저녁에 지현이하고 다른 애들한테 밥이라도 사줄까 하는데……. 잠깐 밖에 나갔다가 와도 될까요?”
“다른 애들이라면……. 은하?”
“…….”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누나의 얼굴이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른하게 풀어져 있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알았어. 대신에…….”
잠시 말끝을 늘이던 누나는 훗, 하고 마치 상대방을 깔보는 것만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나도 같이 가.”
“누나도요?”
내가 놀라서 묻자, 누나는 그대로 내 품에서 벗어나더니 남은 한 손으로 내 엉덩이를 탁! 소리가 나도록 치며 대답했다.
“그래, 나도.”
이리 말한 서연이 누나는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이 다시금 요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에 나는 애꿎은 뒤통수만 벅벅 긁다가 이윽고 거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내 소리 차단을 푼 뒤에 은하에게 말했다.
“이따 저녁에 괜찮아?”
-네, 괜찮아요!
“지현이하고 예은이는 뭐래?”
-각오하래요!
전화기 너머로 ‘오빠, 오늘 지갑 얇아질 각오 하세요!’라고 소리치는 지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씩씩한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덩달아 힘이 나는 듯했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나는 마저 이야기를 계속 했다.
“서연이 누나도 같이 가고 싶다고 하는데, 괜찮지?”
-서연이 언니도요……?
내가 서연이 누나를 언급하자, 은하가 살짝 말끝을 흐리며 되물었다.
아무래도 누나를 마주보기가 영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싫으면 다음으로 미뤄도 괜찮은데…….”
-아, 아뇨! 괜찮아요. 오늘 저녁에 봐요.
“그래. 그럼 이따 끝나면 다시 전화해.”
-네.
이처럼 통화를 끝마친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산 너머 산이네.’
물론 이 모든 게, 내가 자초한 일이긴 했지만……. 민서 다음에 은하를 서연이 누나와 대면시키려고 하니까 마음이 저절로 답답해졌다.
‘……이번엔 무슨 말들이 오가려나.’
아마도 이번엔 민서 때처럼 어영부영 넘어가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은하에게 내가 변태 가면이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처럼 내가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데, 불쑥 서연이 누나가 날 향해 입을 열었다.
“유현아, 티비 좀 틀어봐. 지금 민서, 경기하고 있잖아.”
이런 누나의 말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거실 탁자 위에 올려져있는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텔레비전을 틀자, 처음부터 스포츠 채널에 맞춰져 있었던 모양인지 민서가 소속되어 있는 대한 건설 힐스테이트가 GS 칸텍스를 상대로 경기를 치루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2세트 진행 중인가.’
2세트가 방금 막 시작한 모양인지, 대한 건설 힐스테이트가 2:1로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첫 번째 볼은 이나바 선수가 너무 안이하게 때렸다고 볼 수가 있겠네요. 물론 충분히 붙어볼만한 상황이긴 했지만……. 결국 그러다보니 김 민서 선수에게 정확하게 걸려버렸죠. 그러니 다음에는 충분히 블로킹을 보면서 때려 넣어야 될 겁니다.”
해설자의 말을 들어보니, 방금 전에 민서가 상대 선수의 공격을 정확하게 블로킹을 하면서 득점을 따낸 모양이었다.
‘그래서 민서가 나한테 자랑을 했었던 거구나.’
이처럼 상황을 얼추 파악했을 때, 대한 건설 힐스테이트 측에서 서브를 시작했다.
“이 재은의 서브입니다. 볼은 윤 인혜에게 향합니다.”
너무나도 익숙하단 듯이 자연스레 서브를 받아낸 GS 칸텍스의 선수는 그대로 공을 높이 띄웠다. 그리고 그 공을 받은 선수는 자연스럽게 공격을 하는가 싶더니, 공격하는 척만 하고 진짜는 갑자기 나타나 그대로 오른쪽으로 길게 꽂아 넣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기습이었다.
“……오른쪽에서 길게! 하지만 그걸 받아냅니다. 다시 연결된 공은 곧바로 김 민서에게! 그대로 바닥에 꽂히는 공! 한 발자국 멀찍이 도망쳐버리는 대한 건설 힐스테이트입니다.”
“이나바 선수도 나쁘지 않지만, 김 민서 선수의 첫 세트 공격 성공률이 거의 52%였는데 점유율도 63%로 압도적이었거든요? 그 많은 점유율에 이 큰 성공률에 또 블로킹으로 득점까지……. 1군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정말로 좋은 활약을 많이 보여주고 있네요.”
“네, 김 민서 선수가 1세트에서 10득점을 하면서 점점 득점의 개수를 높여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89년생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좋은 체력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저 체력, 정말로 부럽네요. 아주 대단합니다.”
민서의 득점 성공에 해설자들이 입을 모아 그녀를 칭찬해주었다. 게다가 다른 선수들과는 다르게 혼자서 쌩쌩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 하고 있었다.
‘혼자서 한 숨 푹 잤으니, 뭐…….’
조교의 방에서 4시간 이상을 푹 자고 왔기에 민서의 체력은 1세트를 끝마치고 짧은 휴식 시간을 가졌었던 다른 선수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회복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해설자들은 이 사실을 몰랐기에 그저 감탄성을 연발하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