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협] -->
“……왜? 싫어? 싫으면 말고.”
“아뇨, 좋아요.”
자기는 아쉬울 것 하나 없단 듯이 매정하게 말하는 누나의 행동에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서연이 누나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자, 마셔.”
누나는 유리잔에 소주를 가득 따른 뒤에 내게 내밀었다.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나는 누나한테서 건네받은 술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독한 기운이 목구멍에 차오르자, 무의식중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뭘 그렇게 급하게 마셔? 죄졌어?”
톡 쏘아붙이는 누나의 핀잔에 나는 쓴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죄 지긴 했죠.”
“알긴 아네. 자, 여기 과자도 먹어.”
다행히도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누나의 입술 사이로 쿡쿡 하고 웃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서연이 누나는 과자 봉지 안에 들어있는 과자 하나를 집어 들어, 내 입에 손수 집어넣어주었다. 나는 누나가 먹여주는 과자를 군말 없이 먹었다. 그리고 이처럼 군말 없이 얌전히 과자를 받아먹는 내가 그다지 밉지 않은 모양인지, 누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맛있어?”
“맛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나는 소주병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
이런 내 말에 누나는 자신의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이에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누나의 잔에 술을 따랐다. 서연이 누나는 이런 내 태도에 결국 참지 못 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공손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누나가 이렇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잘 마실게.”
누나는 내가 따라준 술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마치 나보고 자기 입에도 과자를 넣어달란 듯이 날 향해 입술을 살짝 벌렸다.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분홍색 혀도 엿보였다.
이제야 겨우 예전처럼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는 안심하며 누나의 입 속에 과자를 밀어 넣어주었다. 서연이 누나는 고분이 과자를 받아먹으며, 눈꼬리를 예쁘게 휘었다. 이렇게 서로의 입에 술이 들어가니,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방금 전의 살벌했던 분위기가 한 순간의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 그런 능력을 얻게 된 거야? 태어났을 때부터?”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누나가 호기심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얼마 안 됐어요. 누나하고 만났었던 그 날, 얻은 거였으니까요.”
나는 누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170에 가까울 정도로 큰 키에 길게 내려뜨린 머리카락이 살짝 굽이지며 작고 갸름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손을 들어 누나의 뺨을 어루만지자, 유난히도 검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검은 눈동자를 감싸고 있는 길고 짙은 속눈썹 아래로 그늘이 살포시 내려앉자, 차가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신비한 느낌이 풍겨져 나왔다.
“……누나한텐 계속 사과하고 싶었어요.”
“이제 와서?”
누나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내 손을 살짝 꼬집으며 핀잔을 주었다.
샐룩 튀어나온 입술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런 누나의 입술에 입맞춤을 해주기 위해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누나는 내 키스를 받아주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나를 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사과해야할 듯이 싶었다.
나는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누나에게 용서를 빌었다.
“미안해요, 누나.”
“그것 때문에 화난 거 아냐.”
“그럼요?”
내 물음에 누나는 손에 들려있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괘씸해서 그래.”
“괘씸하다니요?”
“그 날, 나랑 같이 있었던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지?”
“…….”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그 동안 네가 민서를 도와준 거지?”
이어지는 누나의 추궁에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괜히 여기서 어설프게 얼버무릴 바에는 차라리 솔직하게 실토하는 게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네, 맞아요. 도와줬어요.”
“그 말은 나랑 사귀고 있는 동안에도 걔를 만나고 있었다는 거야?”
“네…….”
“그런데 그걸 나한테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던 거야?”
“그건……. 일부러 감춘 건 아니었는데……. 민서 씨도 제가 누군지는 몰라요.”
“민서 씨?”
“…….”
여자의 마음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누나는 눈초리를 사납게 치켜올리며 나를 한 차례 쏘아보고는 그대로 홱 하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날 보기도 싫다는 듯이 말이다.
단단히 삐진 모습이었다. 이에 나는 누나의 화를 풀어주고자, 두 손을 쭉 뻗어 누나의 몸을 등 뒤에서부터 꼬옥 끌어안아주었다. 그러자 누나의 따뜻한 체온과 함께 팔위로 뭉클한 가슴의 감촉이 전해져왔다.
“이거 놔.”
그 순간, 누나가 내게서 떨어지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순순히 놓아줄 내가 아니었다.
나는 내 품에서 벗어나가려고 하는 누나의 허리를 보다 강하게 끌어안았다.
“제가 왜 민서 씨를 민서 누나라고 부르지 않고, 민서 씨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알게 뭐야.”
이런 내 물음에 누나의 몸이 흠칫 하고 떨렸다.
내가 왜 민서 씨라고 부르는 건지, 눈치 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여전히 모르는 척 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 품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도 여전했다. 그러나 그 몸부림은 결코 예전 같지 않았다.
그걸 느낀 나는 보다 애절하게, 그리고 연하이기에 가능한 애교까지 부려가며 누나를 달래주었다.
“누나……. 저한테는 누나 밖에 없어요.”
“…….”
내 진심이 통했던 걸까, 누나는 더 이상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얌전히 내 품에 안긴 채, 시선만 다른 곳으로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누나를 힐끗 쳐다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귀가 빨갛네.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유독 누나라는 호칭에 약했던 서연이 누나였다.
나는 한 팔에 쏙 들어오는 누나의 가느다란 허리를 꼬옥 끌어안고서 ‘누나, 사랑해요.’라고 속삭여주었다. 그러자 누나는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듯이 내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시간이 팽팽하게 불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누가 이 침묵을 얼마나 오래 버텨내는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살짝만 건드려도 펑 하고 폭발할 것만 같은 위태로운 침묵이었다.
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점차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이윽고 누나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댄 순간, 가슴 속이 짜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나가 내 키스를 피하지 않고, 이렇게 받아주었다는 사실이 이토록 기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으음…….”
누나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에 몸서리치고 있다는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나는 누나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려, 허벅지와 엉덩이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잠깐만…….”
그 때, 누나가 겨우 간신히 끌어낸 것만 같은 목소리로 나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힘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은 손길로 내 가슴팍을 밀어내었다. 너무나도 약한 힘이었지만, 나는 얌전히 뒤로 물러나주었다.
“그럼……. 민서는 뭐야? 걔랑 왜 만나고 있었던 거야?”
“배구 선수 생활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그거뿐이야?”
누나는 무언가 더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나는 강하게 추궁하고 있었다. 내 얼굴과 몸을 구석구석 훑어보고 있는 누나의 시선에 나는 가쁘게 숨을 토해내며 대답했다.
“대가로 정기를 받았어요.”
“정기? 그건 또 뭐야?”
“그 날, 누나를 불러냈던 방 안에서 유사 성행위나 진짜 성행위를 하면 대가로 정기를 받을 수 있어요. 그리고 저는 그걸 대가로 받았던 거고요.”
“이제까지 계속?”
“네.”
이런 내 대답에 누나는 분한 듯 이득 이를 갈았다.
“그런데 민서, 걔는 너랑 계속 만나고 있었으면서 나한테는 한 마디도 안 해줬다는 거지? 내가 그렇게 죽기 살기로 찾아다니고 있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그리고는 이내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부를 수 있지?”
갑자기 오한이 드는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민서의 명복을 빌어주는 일 밖에 없었다.
“네, 스마트폰만 있으면요.”
이러한 내 말에 누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누나는 내게 스마트폰을 툭 던지며 입을 열었다.
“불러.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