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예선] -->
나는 웃는 얼굴로 레이첼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나를 알아본 그녀가 리나와 함께 내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때, 레이첼이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연회장 내에 있는 사람들이 넋을 잃고서 그녀를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절세미녀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창 물이 올라있는 그녀의 미모는 많은 남정네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더없이 충분했다.
나조차도 무심코 설렐 정도였으니 말이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밌게 하고 있었느냐?”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레이첼이 은근슬쩍 내 팔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시샘이 다 날 정도로구나.”
그녀는 정말로 시샘이 난다는 듯이 나를 대하고 있었다.
“영애를 어떻게 구하게 된 건지, 이야기하고 있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부끄러운 이야기는 더 이상 안 했으면 좋겠구나.”
레이첼은 창피하단 듯이 양 볼을 붉게 물들였다.
하긴 던전 내의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내게 얼마나 많은 추태를 보여주었었던가? 하나 같이 입에 담기 민망한 것들이었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내게 안긴 상태로 이바이크 백작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던 일은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었을 게 틀림없었다.
나는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영애께서 원하신다면 그래야지요.”
이런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레이첼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평소 가만히 있을 때는 요염해보다가도, 이렇게 눈꼬리를 휘며 웃을 땐 천생 소녀처럼 보이니 말이다.
나는 가만히 레이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중년인과 신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힐다 공자의 흉계가 시작되기 이전에 준비해야 될게 조금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걸 준비하기 위해선 레이첼과 따로 이야기를 해야 될 필요성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중년인과 신관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 레이첼 영애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와도 괜찮겠습니까?”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이야기를 나누시고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두 사람 모두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이에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레이첼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미처 두 걸음을 떼기도 전에 리나가 내 팔을 붙잡으며 질문을 던졌다.
“시류는 어디에 있나요?”
그 물음에 나는 그제야 시류가 연회장 내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보이지 않는군요.”
“같이 씻고 나온 거 아니었나요?”
“시류 씨가 먼저 씻고 나가는 바람에 함께 오지 못 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 한 시류가 목욕탕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것까지 시시콜콜하게 설명해줄 필요성이 없었기에 나는 대략적으로만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이런 내 말에 리나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더니,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그럼 전 시류 좀 찾아보고 있을게요. 어떤 불여시 같은 게, 시류를 붙잡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리나는 금방이라도 상대방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길 것처럼 적개심을 활활 불태우며 어디론가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저러다가 시류가 여자인 걸 알고 나면 무슨 표정을 지으려나.’
당황할까? 실망할까? 절망할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중에 기회가 될 때, 리나가 보고 있는 앞에서 시류의 성별을 밝혀봐야 될 듯이 싶었다.
아니, 아예 리나가 보는 앞에서 시류와 섹스를 하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리나는 ‘나만의 시류가……! 시류를 놓아줘!’라고 소리치며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긴 사람처럼 울부짖을 것이다.
반면에 시류는 내 아래에 깔린 채, 리나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저항을 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주는 쾌감에 점차 몸도, 마음도 잠식당해버려 나중에는 리나가 보는 앞에서 천생 여자처럼 앙앙 울어댈 것이 틀림없었다.
‘……꼭 해봐야지.’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나니, 지금 당장 하고 싶단 욕망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대여,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는 것이냐? 내게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렇듯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돌연 레이첼이 나를 불렀다. 이에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그녀 쪽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일단 자리부터 옮기죠.”
이러한 내 말에 이사벨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내가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더 이상 나를 추궁하려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처럼 자리를 옮겨, 인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정원에 도착한 나는 레이첼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전 지금부터 힐다 공자가 주방 하녀의 방에 숨겨두었을 독병을 중간에 빼돌리러 갈 겁니다.”
“그거라면 마침 나도 알아놓은 게 있다.”
레이첼은 자신의 가슴골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를 빼내어 내게 건네주었다. 이에 종이를 펼쳐보니, 거기에는 건물의 구조가 세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 중에 몇몇 방은 동그라미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 동그라미 표시는 뭡니까?”
“오늘 주방에서 일한 하녀들의 방을 표시해둔 거다.”
나는 레이첼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저 자존심 강한 귀족 아가씨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철두철미한 아가씨였다.
내심 감탄하던 나는 혹시나 싶은 생각에서 레이첼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오늘 케이크를 만드는 하녀의 방이 어딘지 아십니까?”
“그것까진 내가 미처 물어보지를 못 했구나. 도움이 되지 못 해서 미안하다.”
레이첼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게 사과했다. 이에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리 말하며 그녀의 입술에 살포시 키스를 해주자, 시무룩해져 있던 레이첼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나는 레이첼이 준 종이를 주머니 안에 집어넣은 뒤에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내가 가진 아이템 중에 분명히 꼭두각시가 있을 텐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 꼭두각시를 세워두는 편이 좋을 듯이 싶었다.
‘……여기 있군.’
[아이템 : 꼭두각시(1회)]
[효과 : 사용자와 닮은 꼭두각시를 만듭니다. 꼭두각시의 행동은 사용자의 평소 성격을 바탕으로 움직입니다.]
[지속 시간 : 1시간]
내가 보유한 아이템 중에 꼭두각시가 있다는 걸 확인한 나는 곧바로 그걸 사용했다.
[아이템 ‘꼭두각시(1회)’를 사용하겠습니까?]
[주의. 꼭두각시는 사용자, 본인으로 한정됩니다.]
[네 / 아니요]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네를 눌러서 꼭두각시를 불러왔다. 그러자 나무로 만든 목각 인형이 내 앞에 갑작스레 나타났다.
“꺅!”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레이첼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품에 안겨들었다. 반면에 목각인형은 레이첼이 놀라든 말든 상관없단 듯이 딱딱 소리를 내며 팔과 다리, 목의 관절을 몇 번 꺾더니 이내 벌떡 일어났다.
‘뭔가 이상한데?’
내가 생각했던 꼭두각시와 너무나도 달랐다. 하지만 꼭두각시는 마치 이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내 모습을 변하기 시작했다.
“……!”
헉 소리가 날 정도로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통나무로 만들어진 꼭두각시였는데, 불과 십여 초도 지나지 않아서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으로 변한 것이었다.
레이첼도 나와 함께 이 광경을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넋이 나간처럼 목각인형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대와 똑같이 생긴 것이라니……. 이게 대체 무엇이냐?”
“제가 독이 들어있는 병을 찾고 있는 동안, 저를 대신해서 연회장에 있어줄 꼭두각시입니다.”
“아……!”
이러한 내 설명에 레이첼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꼭두각시에 대한 흥미가 생긴 모양인지, 우리 앞에 서있는 꼭두각시를 향해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그대와 똑같이 생긴 인형이라니……. 놀랍구나.”
이리 말하며 레이첼이 꼭두각시의 몸을 건드리자, 갑자기 꼭두각시가 진심으로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녀를 밀쳐냈다.
“꺅!”
레이첼이 비명을 지르며 밀려나자, 나는 재빨리 두 손을 뻗어 그녀를 받아주었다.
반면에 꼭두각시는 여전히 끔찍하단 표정을 지어보이며, 방금 전 레이첼이 만진 자신의 몸을 오른손으로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마치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은 사람처럼 말이다.
이런 꼭두각시의 태도에 레이첼이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지어보이며 녀석을 노려보자, 꼭두각시도 이에 질세라 레이첼을 사납게 노려보며 소리치듯 말했다.
“그 더러운 손으로 내 몸을 만지지 마라, 이 젖소년아!”
“뭐……? 저, 젖소……? 지금 날 보고 젖소라고 한 것이냐?”
“그래, 젖소년이라고 했다! 너 같이 크고 무거워 보이는 지방덩어리를 가슴에 달고 있는 년에게는 젖소라는 별명이 딱이다.”
“하……! 어처구니가 없구나. 그대여! 그대도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보거라.”
레이첼은 어이가 출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
저게 내 평소 행동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꼭두각시라니? 말도 안 됐다!
물론 내가 거유보다 빈유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저렇게까지 대놓고 거유를 혐오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인의 마음이 넓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너 같이 가슴만 큰 젖소년은 지금도 던전 지하 감옥에 처박혀 있었을 거다!”
“어처구니가 없구나! 게다가 아까부터 계속 젖소, 젖소 타령만 하고 있는데, 이 정도면 왕국 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가슴이다.”
꼭두각시에 못지않게 큰 목소리로 대꾸한 레이첼은 자랑스레 자신의 가슴을 앞으로 내밀어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위아래로 힘차게 출렁이며 자신의 자태를 맘껏 뽐냈다.
확실히 남들에게 자랑해도 될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가슴이긴 했다.
하지만 꼭두각시는 그 장면에 진심으로, 도저히 못 볼 걸 봤단 표정을 지어보이며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아름다운 가슴이라 하는 건, 자고로 드넓은 평원 위에 아담하게 솟아있는 언덕과도 같은 가슴을 일컫는 것이다! 너 같은 젖소년하곤 다르게 말이지!”
“오호라! 이제 보니 네 녀석은 소아성애자로구나! 그대여, 지금 당장 저 더러운 것을 치우거라! 난 저것과 한시도 같이 있을 수가 없다!”
이리 말하며 나보고 지금 당장 꼭두각시를 치우라며 보채는 레이첼의 태도에 꼭두각시가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뭐? 소아성애자? 아주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뭐, 뭐?”
꼭두각시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윽박지르자, 레이첼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더불어 갑자기 무서워진 모양인지, 두 팔로 내 몸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이에 나는 그녀를 안심시켜주고자, 레이첼을 마주 안아주며 꼭두각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꼭두각시가 레이첼의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내가 하는 말을 똑똑히 잘 새겨들어라, 이 젖소년아!”
꼭두각시는 마치 우리에게 깨우침이라도 주려는 것처럼 빈유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로리라는 건, 언제든지 거유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를 말하는 거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빈유는 성년이 된 몸으로 완벽, 그 자체의 가슴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말하는 거지! 로리와는 다르게 거유가 될 가능성이 완벽하게 닫혀있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빈유는 로리와 다르게 완전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나 완벽하게 다른 두 개념을 혼동할 수 있는 거냐? 네 년은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무식하기 짝이 없구나!”
“……!”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던 눈앞이 환하게 밝혀지는 되는 듯했다.
그 동안 소피아를 빈유라고 여겼던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졌다. 그렇다, 로리와 빈유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소피아는 빈유가 아니었다.
거유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로리에 불과했다.
“그, 그대여……. 역시 저건 이상하다.”
그 때, 레이첼이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무래도 레이첼은 이 위대한 이론을 이해하지 못 한 모양이었다.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레이첼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꼭두각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런 내 말에 꼭두각시는 흐뭇하게 웃으며 내 손을 마주잡았다.
“주인이라면 이해할 줄 알았다.”
나는 오늘 개안(開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