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예선] -->
“아가씨. 현자님. 두 분 말씀 중에 정말로 죄송하지만 한 가지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나와 레이첼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중년인이 돌연 끼어들었다.
그는 무척이나 죄송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면서도 이것 하나만큼은 반드시 물어봐야겠다는 의사가 간절하게 담겨있는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에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이러한 내 말에 중년인의 표정이 환하게 풀렸다.
그는 넙죽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내게 내비쳐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영주님의 유언이 담긴 반지를 가져오셨다고 하셨는데, 그럼 정말로 영주님께서 돌아가신 겁니까? 물론 아가씨와 현자님을 의심하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영주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소피아란 이름을 가진 젊은 수녀를 통해서 이전에도 한 번 들었던지라……. 혹시라도 살아계신 건 아닌지……. 지금 이 자리에서 영주님의 생사를 확실하게 알고 싶습니다.”
절박함이 뚝뚝 묻어나는 중년인의 부탁에 나는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제가 이런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서 정말로 유감스럽지만……. 제가 레이첼 영애와 함께 이바이크 백작님을 구했을 땐 너무 늦은 상황이었습니다. 제 능력으론 도저히 백작님의 목숨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중년인은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탄식을 토해내었다.
그 행동에선 일말의 가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정으로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바이크 백작을 향해 그의 충심이 얼마나 두터운지 알 수 있었다.
‘믿을만한 사람이군.’
내가 없는 동안에 레이첼을 이 중년의 가신에게 맡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게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중년인의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데, 대게 이런 중년인들은 충직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 처음 본 중년인에게 모든 걸 믿고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뭣 때문에 시류 발렌시아와 리나를 데려왔는데?’
여차 할 때, 레이첼을 보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에나만큼 확실하게 보호하진 못 하겠지만, 시류 발렌시아의 스킬에 영웅의 씨앗이 포함되어 있는 만큼 적어도 나를 실망시키진 않을 것이다. 하물며 등급도 희귀에 속하지 않던가? 충분히 믿을만했다.
“아가씨께서 영주님의 유언을 들고 오셨다고 하셨을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영주님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실 줄은……. 제가 곁에서 영주님을 보필하고 있었어야 되었는데…….”
이처럼 스스로를 자책하며 통탄하는 중년인의 태도에 레이첼도 나처럼 측은한 마음이 든 모양인지, 무척이나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를 위로해주었다.
“그대 탓이 아니니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말거라.”
“아가씨…….”
“아버지도 그대를 원망하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이건……. 아버지의 유언을 들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레이첼의 말에 중년인은 그제야 기운을 차린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제가 아가씨께 그만 몹쓸 추태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겠다.”
“감사합니다. 그럼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리로 가시죠.”
이리 말한 중년인은 아까처럼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를 따라 도착한 방은 서른 명이 들어가더라도 거뜬해 보일 정도로 상당히 넓었다.
‘응접실인가?’
중앙에 큰 테이블이 놓여있고, 그 주변에는 앉기 편안해 보이는 소파가 놓여있었다. 또한 벽이며 방 안 구석구석에는 화려한 장식품들이 놓여있었다.
화려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화려함에 압도되어 잠시 멈칫했지만, 레이첼은 이런 게 익숙하단 듯이 척척 발걸음을 옮겨 소파에 앉았다.
“그럼 전 다른 가신들을 불러모아오겠습니다.”
그 때, 중년인이 우리에게 이리 말하고는 도로 방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레이첼이 날 향해 요염하게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계속 그렇게 서있을 셈인가? 어서 이리로 와서 날 안아다오. 아버지를 여의고, 남은 두 명의 오라버니까지 잃게 되어 슬픔에 빠진 날 위로해다오.”
어서 빨리 내게 안기고 싶은 모양인지, 아직 죽지도 않은 아버지와 오라비까지 죽었다 말하며 날 향해 양 손을 쭉 뻗는 레이첼이었다.
제법 발칙한 어리광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에 나는 그녀를 벌해주고자, 레이첼 쪽으로 발걸음을 성큼 내딛었다.
‘어떤 식으로 혼을 내줘볼까?’
중년인이 금방 돌아올 테니, 그리 오래 벌은 주지 못 할 것이다. 그러니 간단하게 레이첼의 엉덩이를 떡 주무르듯이 주물러주던가, 아니면 저 커다란 가슴이 쭉쭉 늘어날 때까지 잡아당기는 게 좋을 듯이 싶었다.
물론 여기서 가장 좋은 건, 역시 레이첼을 창가 쪽으로 데려가 내 남근으로 그녀의 음부를 무자비하게 푹푹 쑤셔대며 창밖으로 소변을 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 막 성으로 되돌아 온 귀족 영애가 어떤 남자의 품에 안긴 채, 앙앙 울면서 창문 밖으로 소변을 보고 있는 장면이라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귀족 영애가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며 좋아했던 영지민들이 아주 기겁할만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되겠지.’
이 방 안에 나와 레이첼, 단 둘이만 있다면 모를까 시류 발렌시아와 리나가 있는 이상 그런 행위는 불가능했다.
‘벌써부터 시류 발렌시아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최소한 시류 발렌시아의 성별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기 전까지는 나는 점잖은 사람이어야 되었다. 그래야지 시류가 날 향한 경계심을 풀고, 편하게 대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풀린 경계심을 토대로 시류의 성별을 차근차근 알아내는 것이다.
선물 보따리를 풀듯이 말이다.
나는 두근두근, 설레는 감정을 느끼며 레이첼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렇게 두 걸음 정도 내딛었을 때, 돌연 시류 발렌시아가 내 앞을 딱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
갑작스레 내 앞을 가로막는 시류의 태도에 내가 발걸음을 우뚝 멈춘 채로 의문을 표시하자, 시류는 언제나 그랬듯이 정작함이 엿보이는 갈색 눈동자로 내 눈을 직시했다.
하지만 이런 시류의 눈보다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미소녀처럼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서양인 특유의 커다란 눈에 백옥처럼 하얀 피부, 거기에 도톰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까지……. 누가 봐도 미소녀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짧게 자른 머리와 제법 다부져 보이는 몸은 청년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정말 헷갈린단 말이지.’
어서 빨리 벗겨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꿀꺽, 군침을 삼키는데 시류 발렌시아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정말로 현자님이셨습니까?”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는 어투로 묻는 시류의 태도에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제가 처음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현자라고요.”
“하, 하지만…….”
너무나도 당당한 내 태도에 시류는 혼란스러워진 모양인지, 머리를 좌우로 살짝 흔들며 말끝을 흐렸다. 이에 나는 시류의 혼란을 잠재워주고자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요.”
“중요하지 않다니요! 다들 지금……. 속고 있는 게 아닙니까? 게다가 그 명패……. 대신관이 와서 확인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만에 하나 그 명패에 신성력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단순히 사칭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이단으로 몰려서 대륙 끝까지 쫓길지도 모릅니다.”
시류는 정말로 걱정이 된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이단으로 몰려 대륙 끝까지 교단의 추적을 받게 된다면, 그보다 끔찍한 삶은 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럴 일은 절대로 없었다.
“걱정 마세요. 이건 진품이니까요.”
성녀 모니카가 직접 준 명패가 가짜일 리가 없었다.
하물며 그녀는 내게 아주 푹 빠져있는 상태였다.
아니, 그냥 푹 빠져있기만 하던가? 사랑에 빠진 순진한 시골 소녀처럼 오롯 나만 바라봐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이단으로 몰릴 일은 결코 없었다.
“설마 훔치신 겁니까? 진짜 현자에게서……?”
“그럴 리가요.”
“그, 그럼 죽이신 겁니까!”
시류의 목소리가 경악에 가깝게 변했다.
대체 시류가 나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애당초 현자가 나인데, 누가 누굴 죽인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해가 안 됩니다. 당신은 마물들을 이끄는…….”
“쉿, 거기까지 하시죠.”
나는 오른손을 내밀어, 시류 발렌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끊었다.
“……시류 씨는 이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저와 레이첼 씨를 지키는데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그것만 생각하세요.”
“…….”
시류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내게 동료들의 목숨이 저당 잡혀있는 이상 허튼짓을 할 수 없었다. 하물며 시류는 내 노예이기도 했다.
만약에 내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한다면 당장에 역소환하면 그만이었다.
아니, 아예 이 기회에 시류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실하게 알아내기 위해서 조교의 방으로 호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거친 방법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이윽고 시류의 입술 사이로 수긍의 대답이 새어나오자, 나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이첼 쪽으로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