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예선] -->
‘조용히 마무리 지어져야 될 텐데…….’
걱정 반, 근심 반으로 도시를 지켜보던 나는 이내 흐트러진 마음을 다 잡으며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그리고 이윽고 도시로 들어서는 성문 쪽에 가까워지자, 줄을 지어 서있는 사람들과 마차 행렬 그리고 여행자들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보자 성벽 또는 주위에 세워진 아름드리나무들 아래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용병들은 잠시 무구류를 내려놓고서 땀을 식히고 있었고, 상인들은 도시 내로 들어서기 전에 간단히 장사라도 할 생각인 모양인지 간이 간판대를 세워두고서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엄연히 도시 외곽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사람들도 북적이는 걸 보면 꽤나 활기찬 도시인 것이 틀림없었다. 실제로 도시 규모 또한 숲 속에서 얼추 보았을 때,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확실히 레이첼의 콧대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번화된 도시에서 자란 영애가 그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쓴웃음을 터트린 나는 세 사람을 데리고서 곧장 성문 쪽으로 다가섰다. 이 때문에 줄을 서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따가운 눈총을 보내긴 했지만, 내 곁에 서있는 레이첼을 보고는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아니, 오히려 동정하듯이 나와 시류, 리나를 바라보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내가 귀족 영애의 변덕에 시달리고 있는 호위 무사 혹은 용병쯤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레이첼은 한 눈에 보아도 장난기 많아 보이는 귀족 아가씨였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생각 때문인지, 레이첼의 도도한 표정이 한층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나와 처음 마주했던 그녀의 모습이 새삼 떠오를 정도였다.
‘그 땐, 참 도도했는데.’
마치 겁 없는 망아지를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괴롭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원래 길들여지지 않은 것을 내 취향에 맞도록 길들이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엉덩이를 실룩실룩 흔들며 걸음을 옮기는 레이첼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성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쪽을 향해 허둥지둥 뛰어오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이곳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인 모양이었다. 이에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춘 뒤에 경비병들과 마주했다.
“아, 아가씨? 정말로 살아계셨습니까?”
숨을 헐떡이며 질문을 던지는 경비병의 태도에 레이첼은 살포시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럼 지금 내가 죽었다는 것이냐?”
앙칼진 그녀의 외침에 경비병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레이첼 아가씨, 돌아오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이리 대답한 경비병은 다른 경비병들을 향해 ‘뭣들 하는 것이냐? 아가씨를 모시지 않고? 마차는 아직 멀은 것이냐!’라고 호통을 쳤다. 아무래도 처음 말문을 연 경비병이 이곳을 책임지는 경비 대장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레이첼이 날 향해 눈을 찡긋하며 마치 ‘저 잘했죠?’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꽤 나쁘지 않은 첫 인상이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칭찬해주고는 경비병들이 이끌고 온 마차에 레이첼과 함께 올라탔다.
그 후, 우리는 극진한 안내를 받으며 편안하게 성까지 향할 수 있었다.
“저희가 따로 해야 될 일은 없는 겁니까?”
그 때, 시류 발렌시아가 내게 물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일도 겪지 않다 보니, 자기가 무엇을 해야 될지 선뜻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마차에 나있는 창문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다가 이내 시류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레이첼 씨와 저를 보호해주시면 됩니다.”
“무슨 일이 생길까요?”
“그거야 저도 모르죠. 하지만 일단 만반의 준비를 해놓는 편이 좋을 겁니다.”
가장 좋은 건 아무런 일도 없이, 조용히 레이첼이 이바이크 백작 위를 건네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래 사람의 삶이란 게, 자기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두는 편이 좋았다.
게다가 내가 시류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이번 기회에 그의 성별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말이다. 사뭇 기대가 되었다. 저 외모 속에 감춰져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일지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류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새 성에 도착한 모양인지 마차가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이윽고 마차 문이 열리자,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시종, 시녀들과 몇몇 중년인들이 보였다.
“오오, 아가씨! 여신님이시여, 이바이크 가문을 버리지 않으셨군요.”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다들 마차에서 내리는 레이첼의 모습을 보더니,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긴 이해하지 못 할 반응도 아니었다.
이바이크 백작을 시작으로 그 아들들인 헤레스와 토니가 돌연 실종되었으니 말이다.
즉, 이바이크 백작 가를 이을 마땅한 후계자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첼이 살아서 돌아왔으니, 가신된 입장에서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라도 기뻐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오라버니는 어디에 있지?”
이처럼 가신들이 레이첼의 생환에 기뻐해하고 있을 때, 레이첼이 능청스럽게 헤레스와 토니를 찾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질문을 받은 가신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 한 채 한동안 바닥을 내려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중년인 한 명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헤레스 도련님, 토니 도련님 모두 실종되셨습니다.”
“실종이라니? 오라버니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레이첼이 기겁하며 소리쳐 묻자, 중년인은 잠시 어물쩍거리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말문을 이었다.
“영주님이 남기신 유언에 반발한 헤레스 도련님이 병사들을 일으키셨고, 그 혼란 중에 토니 도련님과 함께 실종되셨습니다.”
“그런……. 시, 시신은? 설마 시신도 찾지 못 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아아…….”
레이첼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적잖게 충격은 먹은 듯이 몸을 휘청이었고, 이에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레이첼의 몸을 받쳐주었다.
“레이첼 씨?”
레이첼이 정말로 충격을 먹은 줄 알고 내가 놀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레이첼은 슬쩍 오른손으로 내 옷깃을 부여잡으며 능청스럽게 샐룩 웃어보였다. 연기라고 말이다. 정말이지 사람의 혼을 쏙 빼먹는 연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리며 레이첼의 몸을 단단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중년인이 나와 레이첼을 번갈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 분은 누굽니까?”
“이 분은 내 은인이시다. 그래, 일단……. 아버지의 유언이 있으니, 그것을 듣자구나.”
이리 말하며 몸을 똑바로 한 레이첼은 ‘안으로 들어가자.’라고 말을 덧붙였다. 이에 중년인이 직접 길을 열며 우리를 성 내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중년인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사라지시고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겠지. 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라버니들은……. 하.”
레이첼이 어처구니없단 듯이 헛웃음을 터트리자, 중년인은 잠시 우물 쭈물대다가 이윽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아직 더 남아있습니다.”
“더 남아있다고? 여기서 뭐가 더 남아있지?”
순간 레이첼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덕분에 중년인은 마치 대역죄라도 지은 죄인마냥 고개를 들지 못 한 채 어깨를 벌벌 떨어야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것만은 꼭 말해야겠다는 듯이 고개를 치켜들며 대답했다.
“힐다 공자님께서 이곳에 계십니다.”
“뭐?”
중년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이첼이 놀란 목소리로 소리치는데, 돌연 까르르르! 웃는 여성의 웃음소리와 함께 복도가 꺾이는 장소에서 한 쌍의 남녀가 튀어나왔다. 그것도 거의 반나체로 말이다.
“요 앙큼한 년! 드디어 잡았구나!”
“꺄앗! 공자님!”
남성은 자신의 손에 잡힌 여성의 몸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이내 미련해보일 정도로 커다란 가슴에 자기 얼굴을 마구 비벼대었다. 망측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나였다면 음부에 얼굴을 가져다 댄 뒤에 손바닥으로 여성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렸을 것이다.
“…….”
한편 레이첼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아니,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랫입술까지 꽉 깨물고 있었다.
“공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 때, 중년인이 크게 소리치며 남성을 말렸다. 저 남성을 공자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아까 전에 말한 힐다 공자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공자라 불린 남성은 아니꼽단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며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아앙? 너흰 또 뭐야? 응? 너…….”
언성을 높이며 무어라 소리치던 힐다 공자는 돌연 레이첼과 시선을 마주치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 했다. 굉장한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몇 번 눈을 껌뻑이더니 이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게 누구야? 내 약혼녀가 아니신가?”
그는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여자를 내려놓은 뒤에 껄렁대며 레이첼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처럼 그가 다가오자, 레이첼이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힐다 공자님, 여긴 대체 어쩐 일이신지요?”
말은 지극히 정중했지만 불쾌해하는 기색이 짙게 서려있었다. 그러나 힐다 공자는 그런 그녀의 기색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거리낌 없이 다가오더니, 서슴없이 손을 뻗어 레이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쩐 일이긴! 약혼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온 거지. 근데…….”
이리 말하며 뱀 같은 눈으로 레이첼과 우리를 훑어본 그는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약혼녀가 살아있네? 흐흐, 아주 잘 됐어. 안 그래도 저 고지식한 늙은이들이 영지를 넘기지 않으려고 해서 골치를 썩고 있었는데 말이야!”
크게 소리쳐 말한 레이첼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며 선언하듯 말했다.
“당장 결혼식을 올리도록 하지!”
이러한 그의 말에 레이첼이 강하게 힐다 공자를 밀쳐내며 소리쳤다.
“전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이리 소리친 레이첼은 힐다 공자가 붙잡고 있던 자신의 손목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었다. 마치 더러운 것을 털어내듯이 말이다. 반면에 레이첼에게 거부당한 힐다 공자는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크게 소리쳤다.
“네 년이 감히 나를 거부해!”
힐다 공자는 성큼 걸음을 내딛어 레이첼의 바로 코앞까지 고개를 들이밀더니, 마치 성난 짐승마냥 씩씩대었다.
“……고블린들에게 붙잡혀서 이리저리 범해졌을 년을 내가 자비롭게 거둬주겠다는데, 주제도 모르고 나를 밀쳐내? 그러고도 네 년이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계속 저를 모욕한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있지 않아? 하! 네 년의 그 잘난 아비도, 오라비도 전부 다 죽었어! 이제 남은 건, 네 년 하나 뿐이야! 넌 그냥 닥치고 내 아래에 깔리기만 하면 된다고!”
으름장을 내어놓는 힐다 공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레이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이처럼 감정이 격해지자, 중년인이 재빨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힐다 공자님, 아무래도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일단 들어가시지요. 그리고 아가씨도 지금 막 돌아오신 참이라 피곤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공자님께서 이해해주십시오.”
이러한 중년인의 말에도 불구하고 힐다 공자는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큰소리 쳤다.
“이해를 하라고? 하! 내가 지금 모욕당한 게 안 보이나? 레이첼, 당장 사과해라! 네 년의 약혼자인 내게 사과하란 말이다!”
“…….”
“당장 무릎을 꿇고 내게 사과해. 그럼 용서해주지.”
나지막하게 소리치며 으르렁대는 힐다 공자의 태도에 레이첼의 표정이 더없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군.’
중재가 필요하다고 느낀 나는 앞으로 걸음을 내딛은 뒤에 레이첼을 내 뒤에 숨겼다. 그리고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힐다 공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그만하시죠.”
“넌 또 뭐야? 당장 안 비켜?”
라고 소리치며 날 향해 손을 내미는 그의 태도에 나는 오른손을 들어 그의 손을 막아내었다. 그리고는 왼손으로는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명패를 꺼내들었다. 일찍이 성녀 모니카가 내게 준 명패였다.
“……어?”
순간 힐다 공자의 표정이 얼빠진 표정으로 변했다. 아니, 이건 힐다 공자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얼빠진 표정 혹은 경악 어린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 손에 들려있는 명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그 때, 리나가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주변에 있는 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나는 아주 천천히 명패를 아래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두실 마음이 드셨습니까?”
이러한 내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몇몇 이들이 ‘현자님’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며 경외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