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저 어플-431화 (431/599)

<-- [2차 예선] -->

현자라고 불러달라는 내 말에 다들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하긴 이해하지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일단 이들에게 있어서 나는 던전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는 악의 군주, 그쯤이었으니 말이다.

악당 이상, 마왕 이하.

이들에게 있어서 나는 딱 그쯤의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갑자기 현자라니? 다들 어리둥절 할만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은 나를 현자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던전이 아닌 밖으로 나온 만큼 철저하게 현자로서 행동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이러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 되니까.’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반지를 꺼냈다. 일단 숲을 빠져나가기 전에 이바이크 백작이 남긴 유언을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일단 봐두어야지 서로 말을 맞출 것이 아닌가? 나는 소피아가 알려준 방법대로 반지를 만져서 영상을 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지에서 선명한 빛이 새어나오더니, 이내 일전에 들은 적이 있는 이바이크 백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레스, 토니. 너희들이 내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내가 죽은 이후겠지.

“아.”

이바이크 백작의 목소리가 나옴과 동시에 레이첼이 짤막한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곧 내 곁으로 다가와 유언의 내용을 귀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동굴 안에 숨어있던 고블린들을 모조리 죽이는데 성공한 이 아비는 레이첼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기쁨을 만끽한 순간, 콜록콜록! 고블린들이 수풀 속에서 쏟아져 나오더구나! 아차 싶었지! 하아, 서둘러 레이첼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지만 나의 충성스런 기사 다밀 경이 쓰러지는 순간 병사들이 모조리 죽고 말았다.

중간중간 기침 소리를 섞는 것이 꽤 인상적이었다. 누가 봐도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콜록콜록! 레이첼도……. 크으윽! 커헉! 하아, 결국 나 또한 큰 부상을 당해서……. 그나마 여기서 소피아 수녀님을 만나서 이렇게 말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유언이 남긴 반지를 말이다.

소피아 수녀라……. 제법 그럴 듯한 거짓말이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마저 유언을 들었다.

-하지만 소피아 수녀님과 헤어지고 나서 나는 레이첼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비로운 여신님께서 내 딸아이에게 마지막 숨결을 불어넣은 것이었단다. 콜록콜록. 나는 진심으로 기도했단다. 내 딸아이가 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나는 기적을 보았다. 은인이 나타나 내 딸아이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여기서 은인이 어떤 사람인지 따로 특정 짓지 않음으로서 그 누가 레이첼과 함께 이바이크 백작령으로 가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로서 레이첼과 말을 맞추기가 훨씬 수월해진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내 유언을 듣고 있다는 것은 내 은인이 무사히 레이첼을 데리고서 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하아……. 헤레스, 토니. 네 누이는 모진 고초를 당했다. 그러니……. 콜록콜록! 너희가 나를 대신해서 어린 누이를 잘 보살펴 다오.

이처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반지에서 새어나오던 빛이 사그라졌다.

유언은 이걸로 끝인 것이었다.

‘괜찮네.’

이걸로 선택의 폭이 비약적으로 넓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바이크 백작이 자신의 생사를 따로 밝히지 않은 탓에 내가 말하는 것에 따라서 그의 생사가 정해지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바이크 백작이 살아있다고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남은 일평생을 던전의 지하 감옥에서 보내게 될 테니 말이다.

“이렇게 합시다.”

나는 운을 떼며 레이첼과 시류 발렌시아 그리고 리나를 돌아보았다.

“……이바이크 백작은 죽은 것으로 하고, 저는 레이첼 씨를 구한 은인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시류 씨와 리나 씨는 중간에 고용된 용병으로 하고요. 어떻습니까?”

이러한 내 물음에 다들 불만이 없는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로서 딱히 흠 잡을데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물론 상대방이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제법 골치 아파지겠지만, 백작 가의 영애에게 꼬치꼬치 캐물을 간 큰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욱이 레이첼은 방금 막 죽다 살아난 사람이었다.

피곤하단 핑계로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추후 레이첼은 후계자 자리가 공백이 된 이바이크 백작 가의 영주가 될 사람이었다.

모든 건 문제가 없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세 사람을 데리고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자, 숲 밖의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가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때 묻지 않은 어린 아이들보고 새하얀 스케치북에 자연의 풍경을 그려보려 한다면 딱 이러한 장면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저 끝에 인위적으로 세워져 있는 성벽이 보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자연과 함께 잘 어울러져 있었다. 시류와 리나도 이 풍경에 압도당한 모양인지, 자그맣게 탄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반면에 레이첼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인지, 반가움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세 사람을 번갈아보다가 이윽고 저 멀리 보이는 도시 쪽으로 턱짓하며 입을 열었다.

“어서 가죠.”

이러한 내 말에 다들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울퉁불퉁한 흙길을 따라서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시류가 꿀꺽 군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돼지고기.”

이처럼 시류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걷던 리나가 키득키득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시류를 개의치 않아하며 멍하니 ‘닭고기.’ ‘특히 닭다리 하나’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뭔가 싶어서 시류를 바라보니, 살짝 풀린 눈으로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십니까?”

“거위 살도 맛있지.”

동문서답도 이런 동문서답이 따로 없었다. 나는 계속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시류의 팔을 툭 치며 불렀다.

“시류 씨?”

“네?”

살짝 엇나간 목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 정도로 상념에 푹 빠져있었던 모양이었다. 더불어 시류의 입가에 침이 살짝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군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사람은 난생처음 보았다.

“배고프십니까?”

“네? 아, 그……. 그건 아닙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허둥지둥 대답하는 시류의 태도에 옆에 있던 리나가 더더욱 크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에 내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리나를 바라보자, 그제야 그녀가 은근슬쩍 시류의 팔을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이 때, 의외로 볼륨감이 있는 가슴이 시류의 팔에 맞닿으며 살짝궁 찌그러졌다.

“시류가 먹을 걸 좋아해서 그래요. 이래봬도 식도락 꾼이니까요.”

이러한 리나의 말에 시류는 부끄러운 모양인지, 살짝 얼굴을 붉혔다. 확실히 군침을 뚝뚝 흘릴 정도로 음식 이름을 줄줄 외울 정도라면 꽤 식탐이 강한 성격인 듯이 싶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던전의 일원이 되면 항상 배부른 상태가 된다.

배고플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던전의 일원이 되면 배고픔이 사라질 텐데, 배고프십니까?”

“아, 아닙니다. 배고프진 않습니다. 다만…….”

“다만?”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죄송합니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시류를 보니, 절로 웃음을 터져 나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류를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 중에 하나가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었으니 말이다.

“현자여. 혹시 뭐 먹고 싶은 것은 없는가? 내가 전부 다 준비하겠다.”

그 때, 레이첼이 내 팔을 꽉 끌어안으며 물었다. 조용하던 여행길이 돌연 먹을 것으로 빠져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끌벅적한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기에 나는 계속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먹고 싶은 거라……. 시류 씨는 무엇이 좋습니까?”

이런 내 물음에 시류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닭 요리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수탉이 아닌 암탉으로요. 보통 암탉이 살이 더 부드럽거든요.”

이리 말한 시류는 ‘게다가 암탉은 알도 낳죠.’라고 덧붙였다. 확실히 암탉만큼 고마운 존재도 없었다. 특히나 암탉이 낳은 달걀로 도톰한 계란말이를 만들어 캐찹에 찍어 먹는다면 그것만큼 맛있는 것도 또 없었다.

“……게다가 생닭을 향초와 함께 찌고, 다시 야채와 함께 삶아서 뱃속에 이런 저런 것을 가득 채워 넣는다면 그것만큼 맛있는 것도 없죠. 아니면 뜨거운 기름을 확 뿌려서 껍질을 바삭바삭하게 만든 다음에 향이 은은한 나무 열매의 기름을 발라서 다시 한 번 구우면……. 꿀꺽.”

마지막에 꿀꺽 군침까지 삼키는 걸 보니, 영락없이 식도락 꾼이었다. 덕분에 시류의 묘사를 들은 나도 배가 고파졌다. 분명히 오늘 저녁에 뷔페식으로 제법 호화스럽게 먹었는데 말이다.

나는 슬쩍 웃고는 어느새 가까워진 도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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