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물 사냥꾼이 할 수 있는 것] -->
식당을 나온 우리는 평소 여느 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왠지 이러고 있으니까, 학기 중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학기 중에 이렇게 셋이서 곧잘 뭉쳐 다니곤 했으니 말이다. 물론 빈도수를 엄밀히 따져보자면 나를 빼고 은하와 지현이가 단 둘이서 찰떡처럼 붙어 다니는 일이 더 많긴 했지만 말이다.
그 때를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데 불쑥 지현이가 내 등을 탁 치며 입을 열었다.
“오빠, 저 그럼 가볼게요!”
“어,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이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지현이는 슬쩍 내 팔을 잡아당기며 속삭이듯 말했다.
“은하한테 신경 좀 써주세요.”
이리 말한 지현이는 찡긋 윙크까지 하고는 은하를 향해 넉살 좋게 ‘은하야, 그럼 내일 보자.’라고 말한 뒤에 저 먼저 훌쩍 가버렸다. 마치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폭풍과도 같았다. 실제로 지현이가 빠지고 나니, 은하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다가 이윽고 은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도 가자.”
“아, 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한 은하는 나를 따라 곧장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처럼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는 은하한테 할 말을 정리해보았다. 헤어지자. 고백은 못 들은 걸로 할게. 난 지금 서연이 누나하고 사귀고 있어. 서연이 누나하고 결혼할 거야.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여전히 그 무엇 하나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들던, 마음에 들지 않던 간에 결국엔 하나를 선택해야만 되었다.
한참동안 걸음을 옮기며 상념에 잠겨있던 나는 이윽고 하나의 그럴 듯한 문장을 구성했다.
‘지금 내가 서연이 누나하고 사귀고 있으니까, 저번에 들은 네 고백은 못 들은 걸로 할게.’
이게 가장 무난해보았다. 다른 것에 비해서 공격적이지도 않고, 은하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해보였다. 물론 은하가 이런 내 말을 듣고서 얌전히 물러나 줄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최소한 지금 당장으로서는 이게 가장 나아보였다.
천천히 숨을 고른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은하의 걸음 또한 우뚝 멈추었다.
“은하야.”
내 부름에 은하가 대답 없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고 있는 골목길을 배경 삼아 서있는 은하의 모습이 살짝 동떨어져 보였다. 나는 잠시 은하를 마주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서연이 누나하고 사귀고 있는 거 알지?”
“네……. 알고 있어요.”
은하의 목소리가 조금 떨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었다. 애정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토록 애잔하게 쳐다보는데, 그걸 쳐내려고 하니 마음이 미어져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실에선 다수의 이성과 사귀는 것이 불가능했다.
차라리 이계였다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해.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준비한 말을 마저 쏟아내었다.
“……내가 지금 서연이 누나하고 사귀고 있는 중이니까……. 저번에 들었던 네 고백은 못 들은 걸로 할게.”
“못 들은 걸로요?”
“그래, 못 들은 걸로 하자.”
이런 내 말에 은하가 울먹거리며 내 팔을 붙잡았다. 학기 초부터 오빠 오빠하며 따랐던 그 시절의 그녀가 겹쳐 보여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는 내 팔을 붙잡고 있는 은하의 손을 떨쳐내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은하야, 이쯤 하자.”
“싫어요.”
“싫다고 해도…….”
“싫어요!”
나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단순히 은하가 소리쳐서? 아니었다. 갑작스레 내 품에 안겨든 은하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를 끌어안고 있는 은하가 내 가슴팍을 눈물로 적시고 있었다.
“……저 오빠, 포기 못 해요.”
“이건 안 되는 거야.”
나는 어린 아이를 훈계하듯이 단호히 말했다. 그러나 은하의 행동은 단호했다. 필사적이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아! 그 감정이 여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나 같은 놈이 어디가 좋다고 이렇게 매달리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잠시 내 품에 안겨있는 은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은하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은하의 눈동자는 역시나 눈물로 한가득 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저랑 사귀면 안 돼요?”
은하의 말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온갖 감정들이 뒤섞인 은하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혀들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포기란 감정이 조금도 섞여있지 않았다. 오히려 은하는 더더욱 집요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제가 그 언니보다 어디가 모자란 건데요? 오빠가 말하면 제가 다 고칠게요. 네?”
애원에 가까운 그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은하가 내 팔을 보다 세게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그럼 기다리는 건 안 돼요?”
“…….”
그 말에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여기서 내가 그러라고 하면 정말로 내가 서연이 누나와 헤어질 때까지 기다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게 내 착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내가 서연이 누나와 결혼을 할 때까지 나를 기다려준다면? 그 동안 은하는 제 인생을 나 때문에 낭비한 것이었다.
아끼는 후배이기 때문에, 동생이기 때문에 그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기다릴게요.”
그 때, 은하가 먼저 말했다. 그 단호한 목소리가 어쩐지 서연이 누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은하와 서연이 누나는 뼛속부터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그 무엇 하나 잘 맞는 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우습게도 은하가 서연이 누나와 무척이나 닮아 보였다.
“은하야.”
“언니한테 거슬리는 행동 안 할 게요. 오빠한테 부담주지도 않을 게요.”
“…….”
“그냥 기다릴게요. 그러다가 오빠가 언니하고 헤어지게 되면 저랑 사겨줘요.”
은하의 말에 나는 마음속에 돌이 쿵 하고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것도 제법 묵직한 돌이 말이다.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려올 정도였다. 나는 한참 동안 은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꼭 그럴 필요 없어.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오빠보다 좋은 사람은 없어요.”
내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은하의 당돌한 행동에 나는 일순간 말을 더듬고 말았다. 동시에 당혹감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대체 내가 뭐가 좋다고 이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서연이 누나처럼 목숨을 구해준거라면 이해라도 되었다. 그러나 은하는 그런 게 없었다.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만나서, 평범하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평범한 선후배 관계를 맺었다. 그게 끝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본다면 이 모든 게, 평범하게 사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약에 내가 매니저 어플을 얻지 않았다면, 그 식당에서 서연이 누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쯤 은하와 사귀게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라고 말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은하는 제 눈가에 맺혀있는 눈물을 옷소매로 훔쳤다. 그리고는 샐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 늦게 나오지 마세요.”
은하의 말에 또다시 가슴이 따끔따끔 거려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은하를 붙잡고 싶어졌다. 하지만 서연이 누나를 생각한다면 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혼란스러웠다. 이계가 아닌 현실인 만큼 현실 감각을 확실하게 가질 필요가 있었다.
‘여긴 이계가 아니야.’
이계처럼 이 여자, 저 여자 내 마음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현실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몰매를 맞기에 딱 좋았으니 말이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에 은하는 그제야 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날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봐요, 오빠.”
이리 말한 은하는 씩씩하게 뒤돌더니, 이내 빌라 계단을 따라 자기 먼저 올라갔다. 그리고 이윽고 위쪽에서 문이 닫히는 쿵 소리가 들려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매만지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서연이 누나한테 뭐라고 말해야지?’
잘 해결됐다고? 아니면 은하가 여전히 내게 마음을 두고 있다고? 무슨 말을 하던지, 찝찝하건 매한가지였다. 짧게 숨을 내쉰 나는 한동안 주변을 서성이다가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빌라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 다음에 자취방 안으로 들어선 나는 굳게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서 한동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렇게 숨이 진정되자, 스마트폰을 들어올렸다. 뒤늦게 일본에 나타난 마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오늘만 해도 두 번째네.’
엄밀히 말하자면 세 번째였지만 말이다.
[현계 퀘스트 ‘오크와 오우거의 습격!’의 연계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연계 퀘스트 ‘거대 오우거!’이 발생했습니다.]
[점령된 거점에서 새로운 오우거나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오우거보다 훨씬 더 큰 몸집을 가진 오우거입니다. 녀석은 무척이나 사납고 포악합니다. 또한 자신을 불러낸 오크 족장이 없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입니다. 녀석은 이 세계에 적응되는 즉시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들 겁니다.]
-거대 오우거를 처리하세요! (0/1) (보상 : 랜덤 장비 상자)
“연계 퀘스트?”
이미 해결한 현계 퀘스트의 연계 퀘스트였다.
‘설마…….’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에 나는 재빨리 지도를 열람해보았다. 그러자 지도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지점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만약에 내 생각이 맞다면 하나는 거대 오우거였고, 또 하나는 내가 앞서 죽인 오크 족장이 만든 거점 혹은 소환진일 것이 분명했다.
“거점도 파괴했어야 했던 건가.”
현계 퀘스트만 믿고 있다가 뒤통수 세게 얻어맞은 격이었다. 헛웃음을 터트린 나는 평소처럼 마물 사냥꾼들을 호출하기 위해서 손을 부지런히 옮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말로만 임명했던 마물 사냥꾼들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손을 우뚝 멈추었다.
“……까먹을 뻔 했네.”
혀를 내두른 나는 오늘 오전에 임명한 마물 사냥꾼의 숫자를 되뇌어보았다.
‘분명히 열 네 명이었지? 그럼 열 네 명이 쓸만한 무기를 랜덤 장비 상자로 뽑아야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던 나는 불현듯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꼭 무기를 랜덤 장비 상자에서 뽑을 필요는 없잖아?”
애당초 내가 그 남자들을 마물 사냥꾼들로 임명한 건, 정말로 마물 사냥꾼으로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본보기였다. 그런데 그들이 덜컥 마물을 사냥해버리기라도 한다면 도리어 이쪽이 곤란해졌다.
입가를 이죽인 나는 마물 사냥꾼을 호출하는 것이 아닌 던전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일순 눈앞이 일그러졌다가 이윽고 환하게 밝아지며 어두컴컴한 동굴 안의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뒤, 던전 코어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던전 마스터를 뵙습니다.]
“던전 코어, 지난번에 이바이크 백작이 병사들을 이끌고서 던전 안으로 들어왔던 거 기억하지?”
[네, 기억합니다. 이바이크 백작을 이 자리로 불러올까요?]
“아니, 그거 말고 그 때 병사들이 썼던 무기들 지금 가지고 있어?”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럼 거기서 검 열 네 자루 좀 가져와.”
[알겠습니다.]
고분이 대답한 던전 코어는 곧바로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5분 정도가 지나자, 고블린 열네 마리가 뒤뚱뒤뚱 뛰어와 내 앞에 검 열 네 자루를 내밀었다. 이에 허리를 살짝 숙여 검을 집어든 나는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괜찮네.’
그 동안 관리도 틈틈이 해주었던 모양인지, 날 상태가 무척이나 훌륭했다. 이건 다른 열 세 자루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가 보더라도 훌륭한 검들이었다. 물론 보검이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하긴 했지만, 어차피 마물 사냥꾼들이 첫 오크 사냥에서 쓰던 장비도 그렇게 썩 좋은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쪽에 있는 검들이 겉보기에 훨씬 더 그럴듯해 보였다.
“에나 소환.”
에나를 부르자, 순간 내 앞에 로브와 가면을 들고 서있는 여기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기특하게도 내가 왜 자기를 부른 건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에 나는 그녀에게 작은 상을 주고자, 에나의 손에 들려있는 로브와 가면을 건네받으며 가볍게 입술을 맞춰주었다.
“……이건 상입니다.”
“…….”
이러한 내 속삭임에 에나의 양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슬쩍 엉덩이를 토닥여주고는 로브를 입고는 가면을 얼굴에 썼다. 그 후, 나는 손에 쥐고 있는 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검 역소환.”
혹시나 싶은 생각에서 말해보았지만, 내 손에 들려있는 검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매니저 어플로 뽑은 아이템 이외에는 통용되지 않는 건가.’
쯧, 혀를 찬 나는 에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검들을 잠깐 보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에나는 내가 따로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블린들이 들고 있는 열 네 자루의 검들을 척척 회수했다. 그리고 그렇게 열 네 자루의 검들을 품 안에 한가득 끌어안은 에나는 내 다음 명령을 기다리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에 나는 에나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다시 불러드리겠습니다. 에나 역소환.”
이처럼 에나를 돌려보낸 나는 공간 이동 반지를 소환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가장 먼저 일본인 마물 사냥꾼으로 지목했던 기무라 카즈나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공간 이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여기가 이계라서 그런 모양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것도 안 되는 건가.’
설래설래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던전을 빠져나가 자취방으로 이동했다. 그런 다음에 다시금 공간 이동 반지를 사용하자, 순간 으악!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지는 한 남성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이에 유심히 그 남자를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기무라 카즈나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