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저 어플-393화 (393/599)

<-- [마물 사냥꾼이 할 수 있는 것] -->

희은이와 지현이의 손에 과일 꼬치를 하나씩 쥐어주자, 그 둘은 내게 고맙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고는 나란히 벤치에 앉아서 과일 꼬치를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옆에 서있는 예은이에게도 하나 사줄까라고 물었다. 이에 그녀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리고는 뒤이어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나중에 밥 살게요.”

이러한 예은이의 말에 나는 재차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말이라도 고맙다.”

이리 말한 나는 지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희은이를 제 무릎 위에 올려두고서 갖은 아양을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상황이 반대로 된 것만 같았다. 보통은 어린 아이가 어른에게 애교를 피우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반대로 지현이가 희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아양을 떨고 있었다.

어른의 품위가 순식간에 바닥을 내리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엄청 잘 노네.’

만약에 지현이가 유치원 선생님을 한다면 참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어린 아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선생님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어린 아이들 뿐이겠는가? 학부모는 물론이고, 못 남성들의 수많은 대시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유치원 선생님인데 미인이기까지…….’

남심을 확 사로잡는 탄탄한 구성이었다. 나는 자꾸만 비집고 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간신히 집어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내 물음에 지현이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이윽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마치 미어캣마냥 고개를 빼꼼 내밀고서 주변을 살피다가 이내 왼손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요?”

“그럼 너 말고 누가 있는데?”

이러한 내 되물음에 지현이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1시 안 됐는데요?”

아무래도 내 질문을 지각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질문을 정정했다.

“아니, 그거 말고. 너 평소엔 더 일찍 나와서 연습하잖아.”

“아……! 어제는 좀 늦게 잤거든요.”

“왜?”

“밀린 애니를 좀 보느라…….”

라고 말하며 두루뭉술하게 웃는 지현이다. 그리고 그 말대로 요즘 아이돌 프로젝트 연습을 하느라 한동안 취미 생활을 즐기지 못 한 지현이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옮겨 공원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진한 녹색을 띤 잔디밭이 잔잔한 여름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확실히 도심 속 공원은 이런 면에서 보기 좋았다. 게다가 평일이다 보니 공원에는 우리를 제외하곤 거의 아무도 없었다. 기껏 해봐야 산책을 나온 할아버지, 할머니들뿐이었다. 가끔씩 아주머니들이 유모차를 끌고서 돌아다니고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가끔이었다.

“오빠.”

그 때, 지현이가 내 팔을 툭 치며 나를 불렀다. 이에 내가 그녀 쪽으로 돌리자, 지현이가 슬쩍 내 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작게 속삭였다.

“……은하한테 뭐라고 하실 거예요?”

“…….”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네.’

희은이의 사랑스러움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가장 중요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나는 은하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될지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서연이 누나와 사귀고 있으니까 양보해달라고? 아니, 내가 서연이 누나하고 사귀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나한테 고백한 은하인데 얌전히 포기해줄까?’

게다가 은하가 평소엔 맹해서 그렇지, 한번 뜻을 굳히면 되던 안 되던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

심각했다. 살면서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 했던 탓에 이걸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될지 선뜻 해결책이 나오지가 않았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서연이 누나와 은하, 둘 다 내 여자 친구로 삼고 싶기야 하지만 그걸 그 두 사람이 용납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더욱이 결혼도 그랬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이상, 결국 마지막엔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만 되었다.

“설마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거예요?”

“기다려봐.”

“조금 있으면 은하 올 거예요.”

“생각 좀 정리하자.”

천천히 숨을 고른 나는 은하에게 할 말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물론 그 모든 말들이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했지만, 은하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서 단념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 불가능했다. 한 사람의 마음을 거절하는 일인데, 어떻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게 작든 크든, 결국 상처가 다가갈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웃으면서 헤어진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세상에 그 어떤 연인이 웃으면서 헤어진다는 말인가? 그건 애당초 상대방에 대한 기대감 혹은 애정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정말로 좋아했다면 절대로 웃으면서 헤어질 수가 없었다.

분명 둘 중 한 명은 겉으론 웃고 있으면서 속으로는 눈물을 펑펑 쏟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제가 제일 늦은 거예요?”

그 때,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예쁘게 차려입고 온 은하가 서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엄청 힘을 주어서 불편하게 입고 왔다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연습에 지장이 가지 않을 선에서 예쁘게 차려입은 것이었다. 특히나 화장을 한 듯, 안 한 듯한 뽀얀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더 청순해보였다.

“…….”

사랑을 하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딱 그 모습이었다.

전혀 예상지도 못 한 은하의 기습 공격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반면에 예은이와 지현이는 뭐가 그리도 경사가 났는지, 호들갑을 떨며 은하를 반겼다.

“오늘 우리 은하, 너무 예쁜 거 아냐? 이러다가 누가 채가겠네!”

“언니, 오늘 진짜 예뻐요.”

이처럼 두 사람이 치켜세워주자, 은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처럼 부끄러워하는 와중에도 은하의 시선은 좀처럼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뭐라고 할까? 마치 내 입술 사이로 자신을 칭찬해주길 원하는 말이 튀어나오길 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 분홍빛 입술이 어서 빨리 자기를 칭찬하려며 내게 강요하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여기서 여지를 주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입술이 자꾸만 달싹거렸다. 나는 한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다가 이윽고 은하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런 내 행동에 은하가 잔뜩 풀이 죽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

그 모습을 본 순간 미안함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결국 나는 처연하게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예쁘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듯이 말했다. 하지만 이런 내 말조차도 기쁜 모양인지, 푹 숙여졌던 은하의 고개가 번쩍 들어지며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얼마나 기뻐하던지,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였다.

‘나도 참 우유부단하네.’

이런 건 원래 칼 같이 잘라내야되는데, 이상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이러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아니, 어쩌면 시우와의 일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군대를 이유로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수도 없이 후회를 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 건가.’

살짝 고개를 가로젓는데, 지현이가 내 품에 희은이를 안겨주며 입을 열었다.

“오빠, 그럼 저희 연습하고 있을 테니까 희은이 좀 맡아주세요.”

“그래.”

나는 내 무릎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는 희은이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아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희은이가 제 고개를 뒤로 젖혀, 내 가슴팍에 뒤통수를 맞대었다. 물론 이 순간, 당연하게도 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귀여워도 너무 귀여웠다!

방금 전, 내 머릿속에서 떠돌던 108 번뇌가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이건 아기 부처인가? 아기 부처가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쉽게 내 번뇌들을 떨쳐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빠, 언니들 뭐하는 거예요?”

불쑥 희은이가 내 팔을 꼭 붙잡으며 물었다. 이에 나는 그런 희은이의 손을 슬며시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춤추는 거 연습할 거야.”

“춤이요? 희은이도 춤 잘 춰요!”

“그래? 그럼 조금 있다가 오빠한테 보여줄래?”

“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하는 희은이의 태도에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나는 희은이의 몸을 보다 세게 꽉 끌어안으며 뺨을 맞대었다. 그러자 꺄르륵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돌려 내 품에 안겨드는 희은이다. 그리고는 좀 더 자기를 안아달라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는 희은이의 태도에 나는 기꺼이 몇 번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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