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리] -->
“유현 님이 평범한 학자라면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입니다.”
“비약이 지나치십니다.”
“아니요, 저는 진심입니다! 유현 님께서는 이토록 대륙을 위해서 헌신하고 계신데……. 저는…….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하릴 없이 왕성에 틀어박힌 채로 시간만 축내는 것뿐입니다.”
베네딕트 왕자의 얼굴이 우울하게 내려앉았다. 진심으로 한탄하고 있는 듯이 싶었다. 어찌 보면 참 복에 겨운 소리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순수한 청년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나처럼 세상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은 것이었다.
속뜻이 순수하고 아름다웠기에 그를 질책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왕자는 왕자로 남아줘야 되었다. 더 나아가 그는 왕이 되어야 했다. 옛 이야기 속 현자처럼 세상을 떠돌며 세상을 구하기에는 그는 너무나도 순수했다. 또한 밝게 빛이 났다.
나는 베네딕트가 하폰의 왕이 되어 선정을 펼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셀리 공주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그녀보다는 베네딕트 왕자가 백배 천배 훨씬 나았다.
왕으로서 말이다.
‘……일단 단념을 시켜야겠지.’
혹시라도 나를 따라 왕성을 나서겠다는 헛소리를 하지 않도록 말이다. 나는 조용히 미소 지어보이며 베네딕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왕자님. 왕자님께선 진실 되게 세상을 위해서 헌신하고 계십니다.”
“헌신이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물론 지금 당장에는 아주 작아 보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걸 아십니까, 왕자님? 아름드리나무도 아주 작은 씨앗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요. 수백 년을 살아, 하늘 높이 우뚝 솟은 나무 또한 손톱보다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
“그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주 작아 보일지 몰라도 왕자님께서 제게 이렇게 검은색 돌을 건네주신 게, 후일에는 아주 커다랗게 성장할 날이 찾아올 겁니다. 아니, 단언컨대 이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입니다.”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다.
이보다 더 황홀한 일도 없었다.
“……후세는 우리를 기억할 겁니다.”
이러한 내 속삭임에 베네딕트는 감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심지어 눈물까지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순수해 보여서 내 양심이 저려올 정도였다. 거짓말의 대가가 이리도 따끔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기분이 한 없이 치솟아 올랐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모든 귀족들이 경건한 표정으로 내 이름과 베네딕트의 이름을 높여 부르고 있었다. 다들 이 순간이 위대한 모험의 첫 장식이 될 것이라고, 의심치 않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국왕까지도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왕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사라…….’
어쩌면 정말로 이 순간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로부터 역사는 승자의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베네딕트가 왕위에 오르고, 내 거짓말이 들통 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후세는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현자와 왕자의 우정 그리고 대륙을 지키기 위한 헌신.
조금 오글거리긴 했지만 어린 아이들의 동심을 자극하기엔 이보다 더 좋은 적합한 것도 없었다.
“제가 뭔가 더 도울 일이 없겠습니까?”
문득 베네딕트가 내게 물었다. 의욕이 다소 과하게 내비쳐보이고 있었다. 이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검은색 돌을 꾸준히 모아주시겠습니까?”
“검은색 돌 말씀이십니까? 걱정 마십시오! 최대한 많이 모아놓도록 하겠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베네딕트의 대답에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로서 마정석 파편을 수급할 장소가 한 군데 더 늘어난 것이다. 실로 경사스런 상황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나는 그 충동을 점잖게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베네딕트 왕자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이리 말한 나는 에나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곁으로 바짝 다가오는 그녀다. 모니카와는 다르게 흔들리지 않는 가슴이 무척이나 안정적으로 보였다. 더욱이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침대라고 할까? 저 위에 머리를 얹고서 잔다면 실로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가시다니요? 어디를요?”
이런 내 말에 베네딕트가 다급한 목소리로 연거푸 물었다. 이대로 나와 헤어지기 싫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내 손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길이 한층 더 세진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베네딕트 왕자 말고도 수두룩한 것을 말이다.
실제로 모니카와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서둘러 현실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슬슬 아슬아슬하니까.’
까닥 잘 못 했다가는 서연이 누나가 퇴근한 뒤에 현실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랬다가 만에 하나 누나가 내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광경이었다.
살짝 몸서리친 나는 베네딕트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대륙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한시 바삐 가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하루 정도는…….”
“하룻밤 묵는 거라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해도 괜찮습니다.”
“그렇습니까?”
여전히 아쉬운 모양인지, 끝까지 내 손을 놓지 못 하는 베네딕트다. 이렇게 정이 많아서야 제대로 셀리 공주를 쳐낼 수 있을지 의문이긴 했지만, 어차피 그 문제는 내가 해결주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간단하지.’
사실 반쯤 넘어왔다고 보더라도 무방했다. 실제로 내게 적잖은 호감을 품은 셀리 공주가 아니던가? 더욱이 공주는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또한 목적 없이 마냥 순수하기만 하다.
그런 그녀에게 무언가 뚜렷한 목적을 제시해주고, 콤플렉스를 해결해준다면 분명 지금과는 다르게 왕위를 순순히 포기할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 손을 꼭 붙들어 매고 있는 베네딕트의 손을 떼어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왕자님.”
“아! 저, 그럼 배웅해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따로 배웅은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잠시 성녀님과 할 이야기도 있고요.”
이리 말한 나는 그대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에나와 함께 모니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을 본 성녀가 환한 미소와 함께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러다가 내 얼굴이 뚫리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야기는 잘 끝나셨어요?”
생기 넘기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날 향해 미소 짓는 모니카를 따라 웃은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잘 끝났습니다.”
“저 그럼…….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하시고 가지 않으시겠어요?”
데이트 신청을 하듯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내게 물음을 던지는 모니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당장에 그러자고 하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선약은 서연이 누나였으니 말이다.
나는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하군요.”
“그런가요…….”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모니카였지만, 따로 나를 강요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를 배려해주고 있다는 기색이 느껴져서 고마운 마음마저도 들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위로해주고자, 남들 몰래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아주었다.
“모니카, 다음에 올 땐 시간을 내볼게.”
“저, 정말로요?”
“정말이고말고.”
이러한 내 위로가 제대로 먹힌 모양인지, 모니카의 표정이 해맑게 떠올랐다. 순간 어둑어둑한 홀 안이 환하게 밝혀진 것만 같았다. 쓰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몇 번 조몰락거리다가 이윽고 국왕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후, 고개를 조아린 나는 작별 인사를 했다.
“폐하, 저는 이만 물러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하룻밤 묵고 가는 건 어떤가?”
“저 또한 그러고 싶지만, 미루어진 일이 많아서 어서 가보아야 합니다.”
“현자가 그리 말한다면 그게 맞겠지. 이해하겠네.”
이처럼 국왕의 허락까지 받아낸 나는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물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모니카 또한 국왕의 허락을 받은 뒤에 나와 함께 홀 밖으로 나갔다. 이 때, 모니카가 내 손을 붙잡고 싶어 했지만 신관들의 눈치가 보여서 내 손을 붙잡지를 못했다.
‘잡아줄까?’
쩔쩔 매는 성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먼저 손을 잡아줄까도 싶었지만, 이윽고 내 옆에 서있는 에나를 생각하며 그러지 않기로 했다. 물론 에나의 질투 어린 표정을 보고 싶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성격상 질투보다는 속으로 끙끙 앓으며 눈물을 흘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에나를 울릴 수야 없지.’
에나가 눈물을 보이는 건, 오로지 절정에 달할 때뿐이어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김 유현 : 여자는 세번 울어.
에나 : 태어날때, 결혼할 때, 죽을 때요?
김 유현 : 아니!
에나 : 그럼 뭔데요?
김 유현 : 입으로 절정에 달했을 때! 아랫입으로 절정에 달했을 때! 뒷입로 절정을 달했을 때!
에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