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리] -->
“이제 좀 진정이 되십니까?”
“네……. 현자님, 덕택에……. 정말로…….”
성녀는 띄엄띄엄 말하며 숨을 골랐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는 손가락이 무척이나 고와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이윽고 성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네, 얼마든지요. 제 문제인데, 당연히 대답해드려야죠.”
“좋습니다. 그럼 제가 성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의아했던 점을 말해보겠습니다. 일단 성녀님의 가슴에 관한 것입니다.”
“아, 네.”
이 말에 성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제가 느낀 의문은 과연 이게 대체 무슨 의도에서 들리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것을 욕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성녀님께 들었던 말들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욕정으로 대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성녀님께서는 제 생각을 듣지 못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맞아요.”
“그렇다면 여기서 두 가지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진정으로 성녀님에게 욕정하지 못 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욕정이 아닌 다른 형태의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른 형태의 감정이요?”
“그렇습니다. 애정, 호기심, 악의, 증오……. 이러한 것들이 영향을 끼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내 말에 성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이윽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건가요?”
“일단 첫 번째를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성녀님에게 욕정을 했을 때, 속마음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 지를요.”
“그럼 제가 뭘 해야 하는 건가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성녀님께서 저를 유혹하시는 겁니다.”
“제, 제가 현자님을요?”
적잖게 당황한 모양인지, 성녀의 얼굴이 다시금 새빨갛게 물들었다.
“네, 그렇습니다. 다만 성녀님께서 정히 안 되겠다 싶으시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이 말에 성녀는 잠시 어쩔 줄 몰라해하다가 이윽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게 아니라……. 제가 남성을 유혹해본 적이 없어서…….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당초 성녀님은 무척이나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그저 가볍게 절 만져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걸로……. 충분할까요?”
“물론입니다. 자, 이리 와서 제 몸을 만져보시겠습니까? 어디라도 좋습니다.”
이리 말한 나는 성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잠시 정처 없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성녀가 불현듯 용기를 낸 듯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내 오른손을 꼭 붙잡았다.
지극히 예상 범위 내의 행동이었다.
“어, 어떤가요?”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양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더불어 미약한 떨림도 느껴졌다. 아무래도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에 나는 내 오른손을 붙잡고 있는 성녀의 손을 왼손으로 덮으며 대답했다.
“다른 곳도 만져주시겠습니까?”
“다른 곳이요?”
“그렇습니다. 제 얼굴도 좋고, 제 가슴도 좋습니다. 허벅지도 괜찮습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내 남근을 만져보라고 하고 싶었다. 저 작은 손으로 내 남근을 꽉 움켜쥔 채로 문질러주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것은 더없이 훌륭한 자극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성녀에게 홀딱 넘어가서 욕정하고 말 것이다.
“그, 그렇다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리 말한 성녀는 슬그머니 손을 들어서 내 얼굴을 만졌다. 처음에는 가볍게 손끝으로 내 뺨을 어루만진 성녀는 이윽고 점차 용기가 난 모양인지, 귀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성녀의 손바닥이 내 이마를 쓸며 포근한 게 덮었다.
더없이 기분 좋은 손길이었다.
“……얼굴이 뜨거우세요.”
얇게 여민 것만 같은 다홍색의 입술 사이로 달콤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입술을 보고 있자니, 절로 마음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 성녀의 입술을 내 입술로 덮어서 마음껏 더럽히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성녀의 일을 해결해주는 사람이었기에 그래서는 안 되었다.
“성녀님이 만져주셨기 때문입니다.”
“제, 제가요?”
“그렇습니다. 미인의 손길은 언제나 기분이 좋은 법이니까요.”
이리 말하며 옅게 웃음을 터트리자, 성녀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마냥 빨갛게 달아올랐다.
“미, 미인이라니요! 그렇지 않아요. 저를 너무 놀리지 말아주세요.”
크게 소리쳐 말한 성녀는 내 이마를 쓸어주고 있던 손을 슬며시 떼어내었다. 그 태도에서 진심이 느껴지고 있었다. 성녀는 진심으로 자신이 미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라는 말인가? 성녀의 미적 기준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지난 10년 동안 오로지 가슴에 대한 칭찬만 받아왔던 성녀였다. 외모는 뒷전으로 밀려난 채로 말이다. 타인에게 외모에 대한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한 탓에 본인이 미인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 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나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치부하는 것은 다소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심각한 자기 비하였다.
“아닙니다, 성녀님은 분명 미인입니다. 실제로 제 가슴이 이렇게나 뛰고 있지 않습니까?”
이리 말한 나는 허공을 배회하고 있는 성녀의 손을 잡아당겨 내 가슴 위로 올렸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었다. 비록 살과 살이 직접적으로 맞닿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올려져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분이 되었다.
“……어떻습니까, 성녀님?”
내 물음에 성녀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손바닥을 통해서 전해져오는 심장의 고동이 뚜렷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실제로 내 가슴이 쿵쿵 뛸 때마다 가슴 위에 올려져있는 성녀의 손이 움찔움찔 떠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저, 정말로 뛰고 있어요. 쿵쿵 거리는 게……. 굉장해요.”
“그렇지요? 그러니 스스로를 비하하는 건, 그만 두세요.”
“하지만……. 저를 미인이라고 부르는 건, 현자님 밖에 없는 걸요.”
이리 말한 성녀는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며 자신감 없는 모습을 비추어보였다.
“그건 다른 사람들이 성녀님을 똑바로 보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똑바로요?”
“그렇습니다. 전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녀님의 아름다움을요. 외면뿐만이 아니라 내면까지도요. 분명히 성녀님은 아름답습니다.”
이리 말한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려, 성녀의 뺨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러자 아기 피부처럼 부드러운 촉감이 손바닥을 타고서 전해져왔다. 특히나 내가 엄지로 뺨을 어루만져줄 때마다 파르르 떠는 긴 속눈썹은 마치 한 송이의 꽃을 보는 것만 같았다.
딱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성녀의 모습이었다.
상냥하고 따스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그런 여성 말이다.
“현자님은 신기하세요.”
그 때, 성녀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요?”
“네, 굉장히…….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너무나도 편해요. 솔직히 말해서……. 마치 신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만 같아요. 고요하고 부드러워서, 마음이 절로 편안해져요. 저도 모르게 무심코 현자님에게 어리광을 부리게 될 것만 같아요.”
성녀의 어리광이라……. 굉장히 보고 싶었다. 대체 어떤 어리광을 부릴까? 날 좀 더 세게 끌어안아달라고? 키스해달라고? 아니면 사랑한다고 속삭여달라고? 무엇을 하던 간에 무척이나 사랑스러울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꿀꺽, 군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 또한 성녀님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이리 말한 나는 천천히 손을 떼어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앞서는 건, 성녀님을 구해드리고 싶다는 겁니다. 무려 10년입니다. 그 긴 세월을 혼자서…….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
이런 내 말에 성녀는 새삼 서러움이 북받쳐 오른 모양인지, 눈물을 글썽였다. 이에 나는 재차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성녀님,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저는 성녀님에게 욕정을 품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네? 그게 무슨…….”
“저는 지금까지 성녀님에게 연민을 느꼈습니다. 더불어 애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성녀님을 진정으로 구해드리고 싶다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감정은 성녀님이 지금 앓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나는 잠시 성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감격과 고마움 그리고 놀라움이 한데 뒤섞인 표정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요?”
“그렇습니다. 제가 성녀님에게 욕정을 품을 수 있도록……. 지금보다도 더 자극적으로 저를 유혹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성녀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성녀님에게 요구할 것은 지금까지 하신 것보다도 훨씬 더 자극적인 것들이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단언하건데, 이 모든 건 성녀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순수하게 성녀님을 돕고자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는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으며 속삭였다. 감정이 섣불리 노출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성녀를 차근차근 설듯했다. 지금 내가 성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욕정이 아니라 연민과 애정이니, 욕정을 느낄 수 있도록 좀 더 큰 자극이 필요하다. 덧붙여 나는 오로지 성녀를 위해서만 욕정을 느끼는 것이다.
기실 그럴 듯한 개소리였다.
만약 성녀가 제정신이었다면 이 이상은 안 된다며 거절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성녀는 지난 10년 동안 이 문제로 고통을 받아왔었다. 더욱이 내가 독처럼 조금씩 밀어 넣은 쾌감이 성녀의 몸과 머리를 노곤하게 녹여놓은 상태였다.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쳤고, 몸은 쾌감에 붕 뜬 상태였다.
과연, 이 상황에서 내 제안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미소 지어보이며 성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현자님께선 어째서 저를 이렇게나 도와주시는 건가요?”
“성녀님께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를 보았을 때, 대가를 바라고 도와주십니까?”
“아…….”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완벽한 질문인 동시에 대답이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성녀라면 더 말 할 것도 없었다. 성녀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양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리며 입을 열었다.
“……현자님의 말씀대로 할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짐짓 대견하다는 어투로 성녀를 다독여준 뒤에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옷을 벗어주시겠습니까?”
“오, 옷을요?”
“그렇습니다. 이성을 유혹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몸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래도…….”
“물론 성녀님께서 부담이 되신다면 속옷은 따로 벗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리 말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녀가 옷을 벗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줄 심산에서였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성녀가 옷을 벗는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서 전부 다 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성녀가 가진 내성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아마도 옷을 벗는 도중에 도저히 못 벗겠다면서 포기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면 안 되지.’
나는 주먹을 꽉 쥐고는 그대로 성녀의 말을 듣지 않은 채로 방을 나섰다. 괜히 성녀가 나를 붙잡기 전에 말이다. 그리고 이처럼 방 밖으로 나온 나는 방 문을 닫은 뒤에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텅 비어있는 복도의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슬쩍 창밖을 내다보자, 저 멀리서 청소를 하고 있는 시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시간이 남네.’
흠, 하고 숨을 들이켠 나는 주머니 안쪽으로 손을 찔러 넣은 뒤에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 후, 매니저 어플을 실행하자 화면에 여러 개의 알림문구가 떠올랐다.
[에나와 약속한 것을 지켰습니다.]
[에나의 충성도가 1 상승했습니다.]
[에나가 당신의 호의에 감동합니다.]
[에나의 충성도가 3 상승했습니다.]
“오…….”
에나의 충성도가 상승했다는 알림문구를 확인한 나는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물론 소폭 상승이긴 했지만, 그 동안 에나의 충성도가 정체되어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도 충분히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나는 만족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엄지로 확인을 눌렀다. 그러자 곧 화면 상단에 처음 보는 알림문구 두 개가 떠올라 있는 게 보였다.
[던전 수호자 ‘렉스’ : 마정석 파편 수집 중 (현재까지 수집된 마정석 파편 : 0개), (아라크네(1/1), 타락한 요정 (50/50))]
[던전 수호자 ‘엘레노아’ : 마정석 파편 수집 중 (현재까지 수집된 마정석 파편 : 1개), (코카드리유(1/1), 레드 캡 (50/50))]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가?’
내심 감탄성을 터트린 나는 혹시 다른 기능은 없는 건가 싶어서 던전 수호자 ‘렉스’를 눌러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화면에 새로운 알림문구가 떠올랐다.
[던전 수호자 ‘렉스’가 수행 중인 임무를 취소하고 던전으로 귀환시킵니까?]
[주의. 던전 수호자 이끌고 있는 부대는 던전으로 귀환하지 못 합니다.]
[네 / 아니요]
“귀환까지 조작할 수 있는 건가.”
다만 강제로 하는 만큼 휘하 부대는 던전으로 귀환하지 못 하는 모양이었다. 좋은 듯하면서도 안 좋은 기능이었다. 물론 위급한 상황에선 더없이 좋은 기능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아니요를 누른 뒤에 매니저 어플을 종료했다.
‘슬슬 들어가 볼까?’
혀로 입술을 축인 나는 방 문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수줍음 가득한 성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도 좋다고 말이다. 이에 나는 사양하지 않고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새하얀 속옷만 입고 있는 성녀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들어오고 있는 노을빛과 맞물리면서 말이다.
그것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밥이 다 되었군요.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