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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의 안내를 받아 별실로 들어선 나는 성녀와 함께 창가 쪽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기 위해서였다. 큰 창문 너머로는 노을빛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는데, 왕성 내에 마련된 별실답게 꽤나 호사스러운 풍경이었다.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은 단연 나와 함께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성녀라고 할 수 있었다.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입가에 머금고 있는 인자한 미소는 과연 성녀라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자애롭게 느껴졌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성녀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빼어주었다.
성녀는 이런 내 친절에 고마움을 표시하며 의자에 앉았다. 이를 확인한 나는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먼저, 제 요청을 들어주신 점에 대해서 감사드리겠습니다.”
이리 말하며 살짝 고개를 숙이자, 성녀 또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감사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녀가 생긋 웃는 순간 별실 안에 화악 밝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닙니다. 제게 있어서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런가요?”
“물론이고말고요. 특히나 이번 일 같은 경우에는……. 사실 제가 이렇게 따로 성녀님을 부른 까닭은 앞서 홀 안에서 말씀드린 것과 연관이 깊습니다.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사람 속은 모른다고요.”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입니다. 실제로 성녀님께서도 제 말씀에 동의하셨고요.”
“네, 맞습니다. 현자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리 말한 성녀는 더없이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더불어 성녀가 한숨을 포옥 내쉴 때마다 커다란 가슴이 위아래로 출렁이며 거세게 흔들렸다. 어찌나 요란하게 흔들리던지, 멀미가 다 날 지경이었다. 최악이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저 못된 가슴이 더 이상 출렁이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켜두고 싶었다.
근질거리는 양 손을 꽉 움켜쥔 나는 성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성녀님이 이리 말씀하실 정도인데, 저를 진실로 환영해줄 이가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많은 이들이 현자님을 반길 겁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거듭된 내 질문에 성녀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보아하니 내 예상이 맞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 누가 성녀를 앞에 두고서 겉과 속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나 정도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들 성녀의 앞에서만 신에 대한 찬양을 하고 뒤에선 가슴에 대한 이야기만 할 것이다.
“성녀님은 어떠한 경우를 보셨습니까?”
“많이 보았습니다. 이제 막 신관이 된 자도 보았고, 신실한 신도도 보았습니다. 심지어 교황 성하도…….”
여기까지 말하던 성녀는 일순 아차 싶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자기 입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말은 쏟아져 나온 뒤였다.
‘교황이라…….’
꽤 놀라운 이야기였다. 교황까지 겉과 속이 다른 자라는 건, 그 만큼 종교가 부패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심각했다. 어쩌면 성녀가 이리도 집요하게 마정석 파편을 요구하는 것도 종교가 부패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누군가 마정석 사용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이겠지.’
나는 놀란 성녀를 다독여주고자,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여기는 별실입니다. 저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제가 성녀님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자님께서요?”
“그렇습니다. 성녀님께서 정확히 무슨 일을 겪고 계신 것인지만 알려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에 이게 게임이었다면 이쯤에서 성녀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부모 혹은 형제자매를 구해달라는 퀘스트를 내어줄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악당은 교황 혹은 종교 전체일지도 몰랐다. 부패한 종교와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니, 제법 그림이 되었다.
“하지만…….”
성녀의 얼굴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많이 힘들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하고 있었기에 저런다는 말인가? 혹시 부모 혹은 형제자매가 볼모로 잡혀서 몸까지 더럽힌 건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울컥 치밀었다.
나는 재빨리 성녀의 양 손을 꽉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무얼 주저하십니까? 도움이란 건,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 되는 법입니다.”
“…….”
“이대로 시기를 놓친다면 분명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악화될 겁니다.”
이러한 내 말에 성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는 한동안 나를 올려다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었다.
“맞습니다. 현자님의 말씀대로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듭니다.”
“그 동안 대체 무슨 일을 겪고 계셨던 겁니까?”
나는 최대한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성녀를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이런 내 말에 위안은 얻은 모양인지, 성녀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편안해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다른 이들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
순간 나도 모르게 ‘네? 뭐라고요?’라고 되물을 뻔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속마음이 들린다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성녀가 실없는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이렇게나 진지한 얼굴로 말이다. 나는 성녀의 손을 보다 세게 꽉 움켜쥐었다. 손끝이 벌벌 떨리고 있는 걸 숨기기 위해서였다.
‘……괜찮아, 침착하자.’
아직 단정 짓기에는 일렀다. 그도 그럴 것이 성녀가 내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내가 마정석 파편을 두고서 거짓말했다는 것을 단숨에 눈치 챘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물며 내게 이렇게나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일도 없었다.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이것을 어머니께서 내리신 시련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참고 견디고 인내하면 언젠가 끝날 거라고요.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졌습니다. 들려오는 소리의 숫자가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머리가 울릴 정도로 커지기까지 했습니다. 때때로 그 소리가 너무나도 커서 실제로 말하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못 할 때도 있습니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이 성녀는 자신의 심정을 내게 하나하나 밝혔다. 물론 하나 같이 믿기 어려운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전부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무어라 말을 해줄 필요도 없었다.
단지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주는 것만으로도 성녀는 위안을 얻고 있었다. 하긴 성녀가 그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보았겠는가? 하물며 들어보니, 하루이틀동안 시달린 걸로 보이지도 않았다.
분명 몇 년 동안 속으로 끙끙 앓으며 고민했을 것이다.
“……그 때, 현자님을 뵈었습니다. 잊을 수 없습니다.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이……. 단언컨대 제 인생에 있어서 이토록 기쁜 날은 없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나는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물었다.
“현자님의 생각이 읽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자님은…….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현자님은 제 가슴을 바라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기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정도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내심 환호성을 터트렸다. 역시 내 생각대로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덧붙여 성녀가 나를 본 순간, 왜 그렇게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옅게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 동안 마음고생이 심하셨군요.”
“끔찍했습니다. 어쩔 때는 제 가슴을 도려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가슴을 도려내다니요?”
성녀답지 않게 과격한 언사에 내가 짐짓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며 묻자, 성녀는 그제야 자신이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제가 들을 수 있는 속마음은 오로지 제 가슴에 관한 것뿐입니다.”
“가슴에 관한 것이요?”
“네, 그렇습니다. 다른 이들이 제 가슴을 보며 생각하는 것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들려서 괴롭습니다. 3년 전, 그 날 교황 성하께서 제 가슴을 보시며 생각하시던 것은……. 가히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입에 담기에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 작품 후기 ==========
먹이지 말라니요? 성녀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