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리] -->
무수히 많은 귀족들이 내 곁으로 몰려들었다.
얼마나 많이 몰려들던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만약 베네딕트가 내 곁으로 몰려드는 귀족들을 일일이 정리해주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인파에 파묻혀 허우적대는 우스꽝스런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눈인사로 왕자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날 향해 악수를 건네는 귀족들을 하나하나 성심성의껏 상대해주었다. 그리고 이처럼 인사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돌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성녀라는 말에 일순 홀 안이 조용해졌다. 홀 안의 귀족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탄성을 터트리며 예의를 취했다. 다들 하나 같이 놀라움과 감탄 그리고 황홀함을 동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가슴이…….’
입이 저절로 딱 벌려졌다. 놀랄 만큼 커다란 가슴이었다. 특히나 성녀가 홀의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위아래로 거세게 흔들리는 가슴의 위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세상에 저렇게 큰 가슴은 난생 처음 보았다.
그 때문일까? 홀 안이 마치 성녀의 가슴으로 가득 찬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폐하를 뵙습니다.”
성녀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순간 가슴이 요란하게 출렁였다. 더불어 모든 귀족들이 감탄성을 터트렸다. 심지어 몇몇은 눈물까지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저건 영원불멸한 신앙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강적이었다.
여기서 성녀가 검은색 돌을 달라고 요구한다면 귀족들은 반항다운 반항 한번 제대로 못 하고 그대로 내어줄 것이 틀림없었다.
“…….”
슬쩍 베네딕트 왕자를 바라보니, 그 또한 귀족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성녀의 가슴에서 시선을 감히 떼어내지 못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무서운 가슴이란 말인가? 저건 요물이었다. 가슴의 범주를 뛰어넘은 것이다. 그러니까 저 가슴이야 말로 진정한 성녀인 것이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건, 다름이 아니라 베네딕트 왕자가 구한 검은색 돌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 때, 성녀가 다짜고짜 검은색 돌을 요구했다. 별다른 미사구여 없이 곧바로 본론을 꺼낸 것이다. 설마하니 처음부터 직구를 날릴 줄은 예상지도 못 했다. 슬쩍 성녀를 바라보니,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초조함이 엿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유난히도 투명해보였다.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왜 그런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잡념을 떨쳐내며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생각을 하자.’
이대로 멍하니 있다간 마정석 파편을 성녀에게 빼앗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무언가 수를 생각해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내가 처한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일단 신전 측에서는 마정석 파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를 감지하고서 왕실 측에 요구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왕실 측에서는 베네딕트의 의사를 존중해서 내게 마정석 파편을 넘겨주기 위해서 신전과 대립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왕자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서 신전과 대립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이걸 한다고 해서 왕실 측에서 이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었다. 바로 자존심 싸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전 측에서 달라는 대로 왕실에서 전부 다 줘버리면 마치 왕실이 신전보다 아래라는 느낌이 들 테니 말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왕실과 신전의 자존심 싸움은 번번이 있었던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내게 유리한데.’
그런데 여기서 성녀가 등장했다.
신전에서 먼저 고개를 숙이고 성의를 보인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더 이상 왕실 측에서도 나를 옹호해줄 이유가 없었다. 물론 베네딕트는 여전히 내게 마정석 파편을 넘겨주기 위해서 노력을 하겠지만, 큰 기대를 하기에는 어려웠다. 하물며 지금처럼 성녀의 가슴에 홀린 상태라면 말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나 혼자서 헤쳐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를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는 논리를 앞세워서 설득하는 것이다.
‘모두를 납득시킬만한 논리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내가 다른 대륙에서 넘어온 이방인이라는 사실과 베네딕트 왕자를 구하면서 마정석 파편을 채취한 사실을 합친다면 충분히 모두를 납득시킬만한 논리를 펼칠 수 있었다.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나는 국왕의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폐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홀 안이 술렁였다. 국왕은 성녀의 가슴에서 시선을 떼어 나를 바라보았다. 성녀 또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
그 순간, 성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녀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나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감격한 기색까지 띄우고 있었다. 왜 그런 건가 싶어서 성녀를 마주바라보자, 돌연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성녀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양 손으로 자기 입을 가렸다.
‘뭐지?’
당혹스런 감정이 붕 떠올랐다. 설마 미인계인가? 확실히 유효타였다.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바라보는 성녀의 표정은 확실히 매력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크게 출렁거리는 가슴은 옥에 티였다.
저것만 없었다면 더없이 완벽했을 텐데,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는 끌끌 혀를 차며 국왕 폐하를 올려다보았다. 이에 국왕은 잠시 나와 성녀를 번갈아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허락하겠다.”
이렇듯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검은색 돌을 신전 측에 양도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내 말에 성녀를 따라 홀 안으로 들어온 신관들이 술렁였다. 다들 하나 같이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편 나를 바라보며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성녀가 예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극히 정중한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이쪽도 정중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쓸데없이 도발할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하물며 나는 되도록 이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그래야지 다음에 또 왔을 때, 신전 측과 마찰 없이 편안하게 마정석 파편을 회수할 것이 아닌가? 실제로 이러한 이유에서 귀족들을 성심성의껏 상대했었고 말이다.
“검은색 돌이 신전을 오염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리도 단언하실 수 있는 거죠?”
“왜냐하면 이미 한 차례 검은색 돌에 의해서 신전이 오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검은색 돌에 의해서 오염된 신전이 있다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듣지 못 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나는 덤덤하게 수긍하며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이건 제가 살던 대륙에서 일어난 일이니까요.”
“네? 그 말은 마치…….”
“성녀님께서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저는 다른 대륙에서 넘어온 이방인입니다.”
이리 말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경고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성녀님께서 제가 알지 못 하는 방법으로 검은색 돌을 소멸 혹은 봉인 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저희 대륙에서도 검은색 돌을 신전에서 관리하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대부분의 국가가 몰락을 맞이했습니다.”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금 여러분들은 검은색 돌이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무지만큼 위험한 일도 없습니다. 반면에 저는 검은색 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내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오로지 저만이 검은색 돌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오만한 말을 하기 위해서 제가 이 자리에 서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단지 이 대륙이 제가 살던 대륙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성녀의 가슴만 바라보던 귀족들의 시선이 어느샌가 내게로 넘어왔다. 나는 그런 그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저를 믿고, 검은색 돌을 제게 넘겨주시지 않겠습니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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