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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는 진정으로 왕자를 사랑했었던 겁니다.”
셀리 공주의 말대로 인어공주가 바보 같았던 것은 사실이다. 글이든 행동이든 자신이 그 날 왕자를 구한 인어공주라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어공주는 그러한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저 단순히 왕자의 곁에 머물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서 안주했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결정까지 어리석은 것이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희생은 언제나 옳고 고귀한 법이었으니 말이다. 나 역시도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자살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사라져 줄 수 있었다.
그랬기에 군 입대를 앞두고서 전 여자 친구인 시우와 헤어졌었던 것이고 말이다.
“진정? 사랑? 웃기지마.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 미련한 거지.”
그 때, 공주가 딱 잘라 말했다.
‘미련하다라…….’
옳은 말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인어공주는 정말로 미련했다.
“확실히 공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어 공주의 결정까지 미련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인어 공주는 왕자의 행복을 바라고서 사라져준 거니까요. 안타깝고 슬프지만 이것 또한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진 사랑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게 사랑이라면 난 하지 않겠어.”
셀리 공주는 냉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일어났다. 나는 공주를 똑바로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주님께서는 인어공주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사랑을 하게 되실 테니까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공주님은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 속삭임에 일순 공주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셀리 공주는 삐죽 입술을 내밀고서 말했다.
“이젠 현자로도 모자라서 예언가 행세까지 하려고? 잘났네. 아주 잘났어.”
흥, 하고 콧방귀를 뀐 셀리 공주는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 때, 불현듯 공주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활활 타오르는 듯한 진홍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모르는 척 하지 마. 이런 이야기까지 해놓고서 발뺌하려고 그래?”
공주는 성큼 한 걸음 내딛으며 내 앞에 섰다.
“……왕위가 왕자고, 베네딕트가 이웃 나라 공주잖아. 그리고 내가 인어 공주고.”
“…….”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일단 나는 잠자코 공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나보고 왕위를 포기하란 거잖아. 인어 공주가 왕자를 포기했듯이 말이야. 넌 내가 물거품처럼 사라져졌으면 하는 거야? 아, 그래. 나는 마녀와 거래를 하지 않았으니까 물거품이 되지는 않겠지. 대신에 팔려가듯이 다른 나라로 시집을 가게 되겠지. 어쩌면 네 말대로 행복할지도 몰라. 하지만 과연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음…….”
침음성이 절로 새어나왔다. 이건 지나친 과대 해석이었다. 나는 이 정도까지 생각하고서 인어공주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었다. 그저 사랑에 관한 것을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셀리 공주는 지금 어마어마하게 큰 착각을 하고서 내게 따지고 있었다.
“말해봐, 예언가 겸 현자. 내가 베네딕트보다 모자란 게 도대체 뭐야? 넌 왜 이렇게까지 나를 단념시키려고 하는 건데? 돌려 말하는 건 그만하자. 진절머리 나니까. 속시원하게 까놓고 말해봐. 전부 다 들어줄 테니까.”
“…….”
“현자잖아. 현자면 현자답게 조언을 해보란 말이야!”
셀리 공주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나는 그런 공주를 조용히 마주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 와서 ‘저는 현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물며 인어공주 이야기도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셀리 공주의 말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내 의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어쩌면 이게 더 잘 된 것일지도 몰랐다. 계속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이렇게 담판을 지어버리는 편이 좋았으니 말이다.
‘여기가 승부처인가.’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여기서 말 한 마디만 잘 하면 베네딕트가 셀리 공주와 싸울 필요 없이 모두의 축복 속에서 무사히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마음가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음가짐?”
“그렇습니다. 베네딕트 왕자님은 백성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셀리 공주님은 어떻습니까? 여왕이 될 준비가 되어 계십니까?”
“난 어릴 때부터 왕이 되기 위해서 준비했어.”
“하지만 그건 셀리 공주님의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공주님께선 단 하루라도 왕이 되어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
셀리 공주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보니, 왕이 되어서 무엇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했던 공주였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해보았을 리가 없었다. 이건 비단 셀리 공주에게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었다.
현실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이러한 문제를 앓고 있었다. 다들 부모님 혹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할 뿐이지, 스스로 무엇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단지 눈앞에 목표만 바라볼 뿐이었다.
학생이 대학을 바라본다면, 공주는 왕위를 바라보고 있는 셈이었다.
그 이후는 염두에 두어두지 않은 채로 말이다.
나는 셀리 공주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강요할 뜻은 없었습니다. 단지 저는 공주님께서 뚜렷한 삶의 목표를 가지셨으면 했을 뿐입니다.”
“뚜렷한 삶의 목표…….”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지요? 사람은 저마다의 목표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고요.”
내 말에 공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내 설득이 제대로 먹혀들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 손에 잡혀있는 셀리 공주의 손을 보다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가늘고 부드러운 공주의 손이 내 손바닥에 비벼지면서 기분 좋은 감촉을 만들어내었다.
흥분감도 덩달아 상승했다. 그리고 이런 내 흥분감은 쾌감 공유를 통해 고스란히 셀리 공주에게 전달되었다.
“…….”
당연히 공주는 왈칵 몰려오는 흥분감에 어쩔 줄 몰라해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이대로 곧장 자빠트려 범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기에 나는 그 감정을 꾹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천천히 여유를 두고서 생각을 하신 다음에 결정을 내리시면 됩니다.”
이리 말한 나는 셀리 공주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런 다음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마트 봉지를 집어든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작별을 고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셀리 공주님.”
시간이 없는 관계로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옳아보였다. 어차피 다음에 또 베네딕트가 마정석 파편을 얻었을 때, 이곳에 오게 될 테니 말이다. 나는 옅게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돌리고는 에나와 나란히 서있는 로렌 크레포스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젊은 기사가 대뜸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존경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어서 가시죠, 현자님.”
그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가득 실려 있었다. 로렌 크레포스는 나를 데리고서 셀리 공주가 있는 자리를 벗어난 뒤에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단하십니다. 고집불통으로 알려진 셀리 공주님을 이렇게 간단히 설득하실 줄은……. 게다가 공주님이 휘두른 술병을 낚아채는 손놀림은 한순간 저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역시 현자님은 굉장하십니다.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이 젊은 기사는 내 얼굴에 아주 금칠을 해주기로 작정한 모양인지, 온갖 미사구여를 가져다 붙이며 나를 칭송했다. 이러다가 온 나라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았습니다.”
“겸손함까지! 현자님이야 말로 제 우상이십니다!”
로렌 크레포스는 한층 더 감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소리쳤다. 에나 또한 그 옆에서 말만 안하고 있다 뿐이지, 감격 감동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꼼짝없이 외통수였다.
‘그냥 입 다물고 있자.’
나는 이리 결정을 내리고서 조용히 미소만 지은 채로 로렌 크레포스를 따라 베네딕트 왕자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그토록 만나기를 고대하던 반가운 얼굴, 베네딕트와 마주할 수 있었다.
“김 유현 님!”
베네딕트는 나를 와락 끌어안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의 만면에는 미소가 한 가득했다. 누가 보면 내가 그의 애인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내 몸을 꽉 끌어안은 채로 떨어질 줄을 모르는 베네딕트 왕자를 간신히 떼어놓고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베네딕트 왕자님.”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보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이리 말하며 자리를 권하는 베네딕트 왕자의 행동에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현실에서 사온 마트 봉지를 탁자 위에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건 선물입니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그런데 이게 다 뭡니까?”
“초콜릿과 껌 그리고 과자입니다.”
옅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한 나는 베네딕트 왕자에게 초콜릿 하나를 건네주었다. 페로로로쉐를 주고 싶었지만 그건 셀리 공주가 다 먹었기에 키세스를 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맛에선 결코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는 자신 있게 건네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내게 건네준 초콜릿을 맛본 왕자는 감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탄성을 터트렸다.
“이런 맛이……! 놀랍습니다. 정말……. 놀랍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그는 거듭 탄성을 터트리며 초콜릿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또 하나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한 개 더 내밀었고, 베네딕트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냉큼 받아먹었다.
오독오독 씹어 먹는 것이 햄스터를 닮아서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나저나 검은색 돌을 구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운을 떼었다. 그리고 이런 내 말에 베네딕트 또한 정신을 차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실 그것 때문에 김 유현 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리 말한 왕자를 꿀꺽, 초콜릿을 삼킨 뒤에 말을 이었다.
“……저와 함께 가주셔야 될 곳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마정석 파편을 손쉽게 받기에는 글러보였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 베네딕트와 함께 걸음을 옮기며 간단하게 현재 상황을 들을 수가 있었다.
신전이 개입해서 마정석 파편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상황.
새삼 새로울 것도 없었다. 이미 이계 퀘스트를 통해서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 더 추가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성녀가 오늘 왕성을 직접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신전 측에서 왕실 측과 담판을 지으려는 모양이었다.
강수라고 한다면 강수였다.
만약에 오늘 내가 이곳에 오지 못 했다면 꼼짝 없이 신전 측에 마정석 파편을 넘겨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왕자 베네딕트를 따라 홀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왕자님께서 오셨군. 그런데 저 분은 누구지?”
“베네딕트 왕자님과 함께 온 걸 보니, 예의 현자인 것 같군요.”
“저 분이 베네딕트 왕자님을 구한 현자인가.”
홀 안으로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수많은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다들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베네딕트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떠들어댄 것인지는 몰라도, 다들 기묘하다 싶을 정도로 내게 높은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간간히 날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나는 어떨떨한 기분을 맞이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함을 가장했다. 일단 여기서 어수룩한 모습을 보여서 좋은 건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물며 내 뒤에는 에나가 있었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꼴불견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오, 자랑스러운 내 아들 베네딕트! 어쩐 일로 온 것이냐?”
그 때, 저 멀리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말한 건지, 안 봐도 척이었다. 애당초 베네딕트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이 자리에서 단 한 명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다정다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중년 남성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베네딕트가 늙는다면 딱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왕자와 빼닮은 중년 남성이었다.
“폐하께 이 사람을 소개시켜드리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이리 말한 베네딕트는 날 향해 눈짓했다. 이에 나는 예전에 숲 속에서 베네딕트와 처음 마주했을 때, 취했던 자세를 취하며 국왕 폐하에게 인사했다.
“김 유현이라고 합니다, 폐하.”
“그대가 내 아들을 구한 현자인가? 내 그대를 환영하네!”
국왕이 양 팔을 좌우로 쫙 펴며 소리치자,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까지 환영을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쓰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베네딕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이내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김 유현 님과 처음 만났었을 때가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그만…….”
이리 말한 왕자는 수줍게 웃음을 터트렸다. 베네딕트는 처음 나와 마주했을 때와 조금도 변해있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왕자의 모습에 안도하며 몸을 일으켰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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