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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앞의 혼잡도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북새통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만약에 기사와 병사들의 호위를 받지 못 했다면 꼼짝없이 상인들에게 둘러싸여서 현자냐는 질문 세례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후드를 깊숙이 눌러써서 정체를 숨긴다면 얼마든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도 어둑어둑한 해질녘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환한 대낮에는 아무리 후드를 눌러쓴다고 하더라도 별 수가 없었다.
아무쪼록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여름 축제 기간이라서 거리가 다소 혼잡합니다.”
자신을 로렌 크레포스라고 소개한 젊은 기사는 여러 사람들로 혼잡한 거리를 향해 눈짓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대로 거리는 축제의 분위기가 물씬 나고 있었다.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지푸라기 인형이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꽤나 인상 깊은 광경이었다.
‘굉장하네.’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문득 기괴한 옷차림을 한 집단이 길거리를 거닐며 뿔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 어떤 이는 얼굴을 검게 칠한 뒤에 머리에 길쭉한 뿔을 달고 있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새의 깃털처럼 생긴 것을 등에 지고 있었다.
‘……퍼레이드 행렬인가?’
각양각색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구경꾼들을 향해 손 인사를 하며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특히나 반나체나 다름이 없는 여성들이 앞으로 나와서 입 키스를 날릴 때면 거의 모든 남성들이 광적인 환호성을 터트렸다.
‘역시 사람 사는 건, 비슷하구나.’
나 또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환호성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옆에서 에나가 근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꾹 참았다.
‘……음, 이렇게 된 거 구경 좀 하고 갈까?’
모처럼 마주친 이색적인 볼거리였다. 아무리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것도 구경하지 않고 지나친다는 건, 여러모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살면서 이런 광경을 몇 번이나 보겠는가? 나는 내 곁에 서있는 젊은 기사, 로렌 크레포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잠깐 구경 좀 하다가 가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선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뒤따르던 병사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슬쩍 보니 다들 얼굴에 반가워하는 기색이 서려있었다. 아무래도 그들도 사람인지라 축제를 즐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만큼 퍼레이드 행렬은 볼거리가 풍성했다.
‘에나도 좋아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퍼레이드 행렬을 구경하고 있는 에나의 모습에 옅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슬쩍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앗! 하고 작게 탄성을 터트리며 얼굴을 붉히는 에나다.
“유현 님…….”
책망하는 뜻에서 나를 부른 게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공개적으로 손을 잡는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실제로 내 손에 잡혀있는 에나의 손은 지금 여염집 처녀처럼 얌전히 있었다.
나는 쿡쿡, 웃음을 터트리며 에나와 함께 퍼레이드 행렬을 구경했다. 그리고 이처럼 행렬이 절반쯤 지나가자, 돌연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남녀 한 쌍이 나타났다. 그 둘은 무어라 소곤소곤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이윽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오른편을 가리켰다. 이에 일동의 시선이 일제히 오른편으로 향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곳에서 한 무리의 악단이 나타났다.
각양각색의 악기를 든 그들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거리로 나와서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어깨가 절로 들썩이는 흥에 겨운 연주였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인 양, 멀리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남녀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치 하나의 잘 짜인 연극을 보는 듯했다.
‘굉장하네.’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샌가 길 전체가 거대한 무도회장으로 변해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술을 마시고 있던 사내들도 길 가던 아가씨를 하나씩 붙잡고서 즉석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심지어 나를 호위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춤을 추자며 조르는 아가씨들도 있었다.
‘……춤이라.’
나는 슬쩍 에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까 전부터 계속 나를 훔쳐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고 있던 에나가 화들짝 놀라서는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보아하니 나와 함께 춤을 추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빙그레 웃음을 터트리며 에나를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우리도 춤을 출까요?”
내 물음에 에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춤을 출 줄 몰라서…….”
“춤이야 자기 마음대로 추면 그만이죠.”
이리 말한 나는 대뜸 에나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몸이 내 가슴팍에 포옥 안겨왔다. 더불어 에나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뜨거운 숨결이 내 목덜미를 간질였다.
그 감촉이 너무나도 기분 좋아서, 그냥 이렇게 꼭 끌어안고 있고만 싶어졌다.
“어쩌면……. 유현 님의 발을 밟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 에나가 수줍음 가득한 목소리로 고백해왔다. 걱정도 참 태산이었다. 나는 에나의 손을 꽉 붙잡아주며 입을 열었다.
“밟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하나도 안 아플 테니까요.”
“하지만…….”
“쉬잇, 걱정 마세요.”
붉게 달아오른 뺨을 가볍게 어루만져주며 에나를 진정시킨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로렌 크레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춤을 추다가 오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아가씨들과 함께 즐기고 계세요.”
이리 말한 나는 에나를 데리고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축제를 즐겼다. 물론 오른손에 들려있는 마트 봉지가 다소 거추장스럽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격렬하게 춤을 추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리와 파트너를 바꾸자며 찾아오는 남녀들이 방해였다. 역시 에나의 외모는 어딜 가도 밀리지가 않았다. 나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욕지기를 겨우겨우 참으며, 그들의 제안을 좋은 말로 거절했다.
‘……감히 누굴 넘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었다.
나는 꿋꿋이 사람들을 물리치며 에나와 세곡 연속으로 춤을 추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에나는 나와 춤을 춘 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인지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머금고 있었다. 더욱이 파란색 눈동자에 생기가 가득 담겨있는 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춤을 추던 도중에 그녀를 덮칠 뻔 했었다.
“오셨습니까?”
자리로 돌아오자, 로렌 크레포스가 나를 맞이했다. 슬쩍 병사들을 훑어보니, 다들 아가씨들과 한곡씩 추고 온 듯이 뺨에 붉은 립스틱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그럼 마저 가죠.”
이러한 내 말에 로렌 크레포스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여전히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지만, 병사들이 앞장서서 길을 뚫어주니 걸음이 멈추는 일 없이 곧장 성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성에 도착하자, 로렌 크레포스는 병사들 없이 혼자서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기사가 아닌 일반 병사는 성 내로 들어올 수 없는 모양이었다.
“현자님께서 무척이나 젊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문득 로렌 크레포스가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크레포스 경 또한 젊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현자가 아닙니다. 그저 세상을 떠도는 일개 여행자에 불과합니다.”
“일개 여행자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자님은 왕국의 은인이십니다. 더욱이 현자님 덕분에 제 약혼녀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약혼하신 분도 기사인 모양이로군요.”
“네,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악연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곤란하다는 어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짙은 애정이 담겨있었다. 진심으로 약혼녀를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디 좋은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옅게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원래 남녀 사이가 그런 법이 아니겠습니까? 야가 너가 되고, 너가 오빠가 되고, 결국에는 오빠가 자기야로 변하는 법이니까요.”
“헛……! 어떻게 아셨습니까?”
로렌 크레포스가 헛숨을 크게 들이켜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무래도 내가 정확하게 짚은 모양이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따로 없었다. 쓰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딱 보면 척 아니겠습니까?”
“역시 현자님이시군요!”
그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존경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오해가 더욱 깊어진 듯이 보였다. 곤란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존경을 받으면 다소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이대로 놔둬도 되려나?’
이리 생각하며 그를 따라 꾸준히 걸음을 옮기는데, 돌연 맞은편에서 한 명의 여성이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얼핏 봤을 때 굉장한 미모를 가진 미인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녀의 손에 술병이 쥐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구지?’
범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특히나 그녀의 뒤에는 시녀로 보이는 여성들이 조용히 뒤따르고 있었다. 혹시 하폰의 왕녀인 건 아닐까 싶었지만, 왕녀가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복도를 거닌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건, 모든 남성의 판타지를 배신하는 행위였다.
“이런.”
그 때, 로렌 크레포스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그런 그를 향해 질문을 던지자, 로렌 크레포스는 잠시 머뭇머뭇 거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셀라 공주님이십니다.”
“…….”
순간 나도 모르게 경악성을 내뱉을 뻔 했다. 저 여성이 공주님이라니? 대체 어느 나라 공주가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심지어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 해서 휘청휘청 걷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배신이었다!
“야!”
이처럼 경악하고 있는데, 불현듯 앙칼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술에 잔뜩 취한 공주가 날 향해 손짓하며 부르고 있는 게 보였다.
“……너 뭐야? 이리 와봐!”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며 나를 부르는 태도가 어디서 껌 좀 씹어본 누나를 보는 듯했다.
“확 씨! 빨리 안 와?”
그 때, 공주가 바닥에 침을 찍 뱉으며 날 향해 재차 손짓했다. 뭔가 재수 없게 찍힌 느낌이 들었다. 로렌 크레포스도 여기서 나를 어떻게 도울 수가 없는 모양인지, 죄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물론 에나는 내 옆에서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라도 검을 뽑겠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상대는 한 왕국의 왕녀였다. 여기서 공주에게 상처라도 입히게 된다면 차후 베네딕트가 곤란해지게 될 지도 몰랐다. 더욱이 마정석 파편도 회수할 수 없게 된다.
천천히 숨을 들이켠 나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너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김 유현이라고 합니다, 셀리 공주님.”
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최대한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나저나 엄청난 미인이네.’
진홍색의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는 듯했다.
불과 화로의 여신이라 불리는 헤스티아가 실제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다.
“김 유현? 엄청 특이한 이름이네……. 아, 그래! 기억나네. 네가 그 현자구나. 베네딕트가 입에 달고 살던 그 놈!”
이리 소리치며 손뼉을 짝 친 그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흐음, 소리를 내며 내 몸을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았다.
미인의 시선이라서 그런지 꽤 기분이 좋았다.
“……그래, 잘난 현자 씨. 여기엔 무슨 일로 온 거지?”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 그녀는 꿀꺽이며 술을 마셨다.
“베네딕트 왕자님을 뵙기 위해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래? 뭘 뜯어내려고? 한 재산 챙겨보려고 그래?”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다는 말입니까?”
“아니라고? 그럼 왜 왔는데? 무언가 목적이 있으니까 온 거 아니야? 응?”
제법 언성이 높아졌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 꼭 무언가 목적이 있어야 되겠습니까?”
“헤에, 현자라더니 말이 좀 번지르르하네. 혀에 기름칠 좀 해놨나 봐? 아하핫! 그래, 자칭 타칭 현자 씨.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는 항상 무언가 목적이 있기 마련이야. 봐봐, 내 주변을. 전부 다 나한테 뭣 좀 얻어 보려고 모여들었잖아. 이런 쓰레기 같은 년들도 말이야!”
돌연 셀리 공주가 술병으로 뒤에 서있던 시녀의 머리를 내려치려고 했다. 워낙에 순식간이었기에 뒤에 서있던 시녀는 미처 반응조차 하지 못 하고 있었다. 이대로 머리를 맞게 된다면 분명 크게 다칠 게 틀림없었다.
그 광경에 깜짝 놀란 나는 막연히 막아야 된다는 생각에서 재빨리 손을 뻗었다.
‘이런!’
하지만 워낙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셀리 공주의 행동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늦었나?’
이리 생각하며 손을 거두려는데, 돌연 휙! 하고 주변 풍경이 빠르게 스쳐지나가더니 돌연 내 손이 셀리 공주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읏!”
이처럼 내 손에 손목이 붙잡힌 공주는 짤막한 신음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손에 자신의 행동이 가로막혔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인지, 표독스럽게 나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당장 놓지 못 해!”
========== 작품 후기 ==========
즐거운 설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