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던전 디펜스] -->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등장한 렉스가 양 팔을 크게 휘저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뽐냈다.
“뭉개자!”
“아니, 박살내자!”
거대한 덩치를 가진 트윈 헤드 오우거가 방 안을 가득 채우며 나타나자, 일순 서른 명에 달하는 병사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렀다. 안 그래도 고블린들만으로도 벅찬데 여기에 트윈 헤드 오우거까지 등장한 것이었다.
“이게 대체 뭐야! 오우거라니!”
“망할! 이걸 어떻게 이겨! 백작님, 도망치셔야합니다!”
“당장 물러나라! 길을 뚫어!”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은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서 마구잡이로 창을 내밀고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흔이 넘어가는 고블린들은 결코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도리어 더더욱 악착같이 병사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발을 붙잡았다.
나는 그 틈에 렉스에게 명령했다.
“되도록 생포해주세요. 하지만 저항이 심하다면 죽이셔도 좋습니다.”
이러한 내 말에 렉스가 제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소리쳤다.
“걱정 마! 안 죽일게!”
“그래, 나만 믿어! 저항이 심한 인간만 죽일게!”
이리 소리치며 앞으로 나아간 트윈 헤드 오우거는 쿵쿵 발소리를 내며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묵직한 육탄 공세였다. 이에 화들짝 놀란 병사들이 저마다 ‘피해!’ ‘도망쳐!’라고 소리치며 몸을 피했다. 그러나 미처 몸을 피하지 못 한 병사들은 그대로 렉스의 발에 밟혀 크게 다치거나 죽었다.
“어이쿠! 뭉개버렸네! 살아있어?”
“조심해, 이 멍청아! 인간이 간식을 주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래!”
“알았어. 조심조심!”
“조심조심 살살 밟아. 그럼 안 아플 거야!”
렉스는 꽥꽥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인간들을 뒤쫓으며 하나씩 하나씩 제압했다. 물론 방패를 높이 치켜들어, 어떻게든 렉스의 주먹을 막아내 보려하는 병사가 있기는 했지만, 트윈 헤드 오우거의 묵직한 주먹질은 인간의 몸으로 감히 박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렉스는 마정석 파편을 삼킨 존재였다.
“끄아아아악!”
“영애님,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줘! 항복이야! 제발……!”
여기저기서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급기야 몇몇 병사들은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버리고서 레이첼에게 자비를 바랬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에게 버려졌다는 충격에 빠진 영애는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있었다. 그저 내 품에 안긴 채로 어린애처럼 흐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철저하게 짓눌러놔야지.’
게다가 무엇보다도 레이첼의 아버지인 이바이크 백작이 항복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기사의 도움을 받으며 도망치는 백작을 향해 칠흑의 지팡이를 겨누었다.
“어둠의 화살.”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짙은 검은색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쏘아져 나아갔다. 그리고 이윽고 어둠의 화살은 백작을 호위하고 있던 기사의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아아악!”
동굴 안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기사의 근처에 있던 병사 하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마법! 마법이야! 마법이라고!”
“이걸 어떻게 이기라고!”
“살려줘! 영애님,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병사들은 마지막 남은 침착성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레이첼에게 애걸복걸 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레이첼은 충격에 빠져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잠시 전장을 둘러보던 나는 이윽고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만.”
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고블린들이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물론 렉스 또한 발자국 물러나서 숨통을 트여주었다. 이에 병사들은 그제야 안도하며 가쁜 숨을 내쉬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론 여전히 손에 검을 쥐고 있는 병사가 있기는 했지만, 안색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푸르죽죽하게 죽어있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나는 잠시 그들을 둘러보다가 이윽고 이바이크 백작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백작을 이리로 끌고 오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목숨을 살려드리겠습니다.”
이러한 내 제안에 병사들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이바이크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런 병사들의 시선에 백작이 양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빽빽 소리 질렀다.
“천한 것들! 지금 누구를 노리는 것이냐! 당장 검을 들어라! 죽을 때까지 싸우란 말이다! 네 놈들이 먹고 살 수 있던 게 전부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돈을 받았으면 개처럼 싸우란 말이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더니, 딱 그 말이 맞았다. 어쩜 저렇게 부녀가 얄미운 말들만 쏙쏙 빼서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절래절래,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병사들을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당장 끌고 오지 않으면 모조리 몰살시키겠습니다.”
이렇듯 딱 잘라 말하자,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백작에게 달려들었다.
“다밀 경! 다밀 경, 나를 지켜라! 지키란 말이다!”
이바이크 백작이 크게 소리치며 기사를 다그쳤다. 그러나 어둠의 화살에 어깻죽지가 관통당한 기사는 별다른 힘을 내지 못 했다. 오히려 병사들에게 끌어내려져, 백작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백작은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내 앞에 무릎 꿇려지고 말았다.
“……이 개돼지만도 못 한 놈들! 짐승도 은혜를 알면 갚는다고 했다! 그런데 네 놈들은 은혜도 모르는 개돼지로구나! 이 망할 놈들! 퉷! 아단트 여신님께서 너희에게 천벌을 내리실 것이다!”
자신을 끌고 온 병사들을 향해 침을 뱉으며 악담을 퍼붓는 이바이크 백작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쯤 되면 살려달라고 애걸 할 법도 하건만 백작은 조금도 살기를 죽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이 모습이 처음 레이첼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해서 입술 밖으로 조금 탄성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이바이크 백작,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십니까?”
“뭐가 안 된다는 것이냐? 혹여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흐흐, 그래. 어디 한번 죽여보거라! 내가 죽으면 내 자랑스러운 아들들이 당장에 군사들을 이끌고서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테니 말이다!”
이러한 백작의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이건 단순히 이바이크 백작을 죽이거나 감금한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잘 못 했다간 무수히 많은 군사들의 공격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말 그래도 던전 디펜스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 차라리 던전 디펜스라면 좋았다.
거기서는 적을 죽이면 돈도 얻고, 경험치도 얻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걸 바탕으로 던전을 발전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유일하게 죽지 않는 게 있다고 한다면 내가 스킬로 소환하는 소환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던전 수호자와 소피아 같은 던전 일원들은 한번 죽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되살아난다는 게 없었다.
‘여기서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좋은 말로 백작을 타일러서 두 번 다시는 던전을 넘보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백작의 상태를 미루어 보았을 때, 그건 그다지 현실성이 없어보였다. 지금도 이렇게 죽일 테면 죽여보란 식으로 나오는데, 어쩌라는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죽일 수도 없고…….’
머리가 지근지근 거려왔다.
‘차라리 던전을 옮겨버릴까?’
확실히 던전을 통째로 옮겨버린다면 이바이크 백작의 공격을 받게 될 확률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다만 던전의 레벨이 이대로 유지되는 지는 미지수였다.
‘……던전 코어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네.’
이렇듯 생각을 끝마친 나는 던전 코어가 있는 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내 품에 안겨있는 레이첼을 잠시 떼어놓으려는데, 불쑥 고블린들 사이에서 갈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고개를 내미는 소녀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소피아?”
소피아를 발견한 순간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반면에 소피아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이윽고 내 품에 안겨있는 레이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여전히 화려하구나. 그래, 마왕은 자고로 많은 미인을 취해야하는 법이지. 소녀는 그대의 미학에 찬성하는 바이다.”
“…….”
“그나저나 그대의 고민이 깊어 보이는구나. 뭘 그리 고민하는 것이냐?”
이리 말하며 턱을 치켜세운 소피아는 오만하게 이바이크 백작을 쳐다보았다. 이에 무릎을 꿇고 있던 백작이 사납게 으르렁대며 소피아를 쏘아보았다. 어른과 어린 아이의 눈싸움이라니……. 그다지 썩 유쾌한 장면이 아니었다.
“……이 자를 쳐내야 될지, 아니면 살려줘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은데……. 소녀에게 맡겨라. 소녀가 깔끔하게 처리해주겠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물론이다. 그 뿐인가? 이바이크 백작가가 이곳을 노리지 못 하도록 단단히 봉할 수도 있다.”
“정말로요?”
“간단한 이치다. 그대여, 생각해보라. 이바이크 백작가가 어째서 이곳을 공격해오는 것인지.”
이 물음에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이곳에서 실종된 영애를 구하기 위해서이죠.”
“그렇다면 영애를 본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으면 그만이 아닌가?”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저는 제 여자를 다른 사람에게 줄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러한 내 말에 소피아는 작게 탄성을 터트리며 ‘그렇다면 나도 그대의 여자가 되도록 노력해야겠군.’이라 말했고, 내 품에 안겨있던 레이첼은 감격해마지 않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 몸을 보다 억세게 끌어안았다.
어쩐지 두 사람의 충성도와 호감도가 각각 상승하는 듯했다.
“걱정마라. 영애를 어디로 보내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를 이바이크 백작 가의 주인으로 만들겠다는 소리다.”
이러한 소피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바이크 백작이 두 눈을 부릅뜨고서 빽 소리쳤다.
“누굴 주인으로 만다는 것이냐! 저 더러운 년은 더 이상 이바이크 가문의 사람이 아니다!”
그 외침에 소피아는 짐짓 가소롭다는 듯이 게슴츠레 백작을 쳐다보며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라고 중얼거리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지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떤가? 소녀에게 맡겨보지 않겠는가? 확실하게 처리하겠다.”
자신감이 과하게 넘쳐보였다. 소녀는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믿음직스러워서 좋긴 한데…….’
문제는 소피아가 열두 살 남짓한 소녀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십대 소녀답지 않게 무척이나 어른스럽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녀는 소녀였다. 성인이 아니었다.
더욱이 소피아는 아주 약간이지만, 어린아이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걸로 그것마저 파괴되어버리는 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었다.
‘……설마 고문 같은 걸 하려는 건가.’
채찍을 들고서 이바이크 백작을 매질하는 것이다. 그것도 열두 살짜리 소녀가 말이다. 그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니 기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소피아가 타락할 것만 같았다. 순수한 소녀인데 말이다! 모처럼 내 취향 직격인데! 나는 속으로 울부짖으며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말이다.
‘저 작고 사랑스런 가슴이 사디즘으로 부풀어 오르면 어떡하지?’
보통 그렇지 않던가? 사디즘을 가진 여성은 대체로 큰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서연이 누나가 그랬고 말이다. 잘 생각해보면 지현이도 은근히 사디즘이다. 그래서 그렇게 가슴이 컸던 걸 지로 몰랐다.
이처럼 내가 고민에 빠져있는데, 이번에는 금발의 서큐버스가 검은색 날개를 파닥거리며 등장했다. 그리고 그녀의 등장에 일순 병사들이 넋을 빼고 말았다. 물론 이바이크 백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서큐버스답게 등장만으로도 남성을 휘어잡는 엘레노아였다.
“이 건방진 꼬맹이가……!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대가 내 자유를 억압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엘레노아가 소피아의 몸을 붙잡자, 소녀가 눈살을 자못 찌푸리며 대꾸했다. 이에 서큐버스는 아주 단단히 심통이 난 듯이 소피아의 몸을 마구 더듬으며 소리쳤다.
“건방지긴! 가슴이나 좀 더 키우고 까불라고! 이 모유도 안 나오는 빈유가!”
“읏! 내 나이에 모유가 나오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가슴은 점차 커질 것이다!”
소피아의 외침이 내 기대감을 와장창 깨트렸다. 안 된다. 소피아의 가슴은 항상 작아야만 되었다. 설혹 큰다고 하더라도 딱 에나만큼만 커줬으면 할 뿐이었다. 절벽 위에 핀 꽃처럼 말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치라는 말인가.
나는 새삼 에나가 그리워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에나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의 고결함을 이용하기에는 이 자리가 너무나도 추악했으니 말이다.
나는 엘레노아의 행동을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그쯤 하시죠, 엘레노아.”
“네!”
이러한 내 말에 그녀는 얼른 손을 놓으며 내 옆에 찰싹 붙었다. 이 때문에 레이첼이 살짝 밀리자, 영애는 못마땅하단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엘레노아를 밀쳐내기 위해 보다 내 품에 안겨왔다. 덕분에 내 품에서는 두 여인이 때 아닌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반면에 소피아는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손바닥으로 툭툭 털며 내게 물었다.
“그대여, 대답을 언제까지 미룰 생각인가? 이건 오래 끌수록 안 좋다.”
소피아의 말대로 이건 오래 끌수록 좋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에 이바이크 백작 가에서 추가로 병력을 보내올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가 이윽고 뜨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소피아 씨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다. 그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다. 아, 그리고 오크를 빌려주었으면 한다.”
“오크를요?”
“그렇다. 오크가 필요하다.”
“뭘 하려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런 내 물음에 소피아는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로 넘기면서 대답했다.
“소녀가 노예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을 써먹고자 한다.”
========== 작품 후기 ==========
소피아가 당했던 일은 201편에 적혀있습니다. 근데 이것보다 심하게 할 겁니다.
아마도 이바이크 백작은 신체 건장한 오크 세 마리에게.... 걱정마세요. 독자님들의 눈 건강을 생각해서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엘레노아에게 포상을 줄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포상의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