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 엘프] -->
“남산?”
내 말에 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서연이 누나의 손을 꼭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남산이요. 거기 가서 자물쇠도 채워보고 주변 경치도 구경하고 그리고 돈가스도 먹어봐야죠.”
“자물쇠는 뭐야?”
“자물쇠를 채워서 서로 헤어지지 말자. 뭐, 이런 식으로 약속하는 거예요. 아참, 그리고 열쇠는 버리고요.”
“아하.”
짤막하게 탄성을 터트린 누나는 넙죽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남산 데이트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는 내 손에 잡혀있는 누나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불쑥 질문을 던졌다.
마침 적당한 시기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누나는 제가 좋으세요?”
내 물음에 누나는 그게 대체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게슴츠레 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좋지. 그럼 내가 싫은데 억지로 사귀겠어? 누구 좋으라고?”
그 모습을 보니, 참 서연이 누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손가락을 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오늘 좀 고민했어요.”
“뭘?”
순간 누나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에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애써 담담한 척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누나의 표정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괜히 말을 꺼낸 건 아닌가 싶었다.
‘아니, 이럴 때 해야지.’
괜히 어물쩍거렸다가는 누나한테 상처만 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걸로 괜히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은하가 내게 고백을 했듯이 나 또한 서연이 누나한테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연인 관계가 아니겠는가? 나는 되도록 이런 걸로 숨기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이 사실을 숨겼다가 나중에 가서 덜컥 은하와 사귀게 되어버린다면, 서연이 누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멍하니 있다가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누나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걸로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진 않으니까.’
내게 있어서 서연이 누나나 은하나 둘 다 소중한 사람이었다. 서연이 누나는 내게 있어서 소중한 연인이었고, 은하는 소중한 후배였으니 말이다. 천천히 숨을 들이켠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늘 은하한테 누나하고 제가 사귄다는 걸 밝혔어요.”
“그래서?”
“그랬더니 울더라고요. 그런데…….”
이걸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될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윽고 중간을 모두 자르고 결론만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도둑 잡는 이야기는 별로 쓸모없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더욱이 스킬까지 사용했었다. 물론 다른 애들은 눈치 채지 못 한 듯이 싶었지만, 서연이 누나라면 또 몰랐다.
“……저한테 고백하더라고요. 누나하고 사귀고 있어도 상관없으니까, 저하고 사귀고 싶다고요. 포기하지 못 하겠다고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내 손에 잡혀있는 누나의 손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대답 못 했어요.”
“왜?”
초조한 모양인지, 내 말을 보채는 누나다. 이에 나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는 누나나 은하나 다 소중해서……. 죄송해요.”
“…….”
이러한 내 대답에 누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를 쳐다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나니, 후련한 동시에 죄책감이 여기저기서 몰려왔다.
정말이지, 이제 와서 내가 했던 행동들을 돌이켜보니 잘 한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나는 마지막에 은하한테 내일 보자고 손까지 흔들어주었었다. 이것은 명백한 배신 행위였다.
만약에 이것까지 누나한테 숨김없이 말했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분위기가 더 차갑게 가라앉았을 것이다.
“김 유현.”
“네.”
누나의 부름에 나는 곧장 대답했다. 무슨 말이 날아올지 조금 무서웠다. 욕일까? 아니면 헤어지자고? 그것도 아니면 여기서 당장 꺼지라면서 날 걷어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두 눈을 찔끔 감은 채로 누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냥 결혼하자.”
“네?”
순간 내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는 전혀 예상지도 못 한 것이었다. 욕도 아니고 이별 통보도 아니었다. 심지어 혼자 있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혹시 잘 못 들었나 싶어서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서연이 누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결혼하면 은하, 걔도 포기하겠지.”
“…….”
서연이 누나의 배포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이 얼마나 극단적인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아니, 애당초 누나의 사고방식은 다소 극단적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고 말이다. 오직 서연이 누나만이 이런 행동과 말을 할 수 있었다.
“아이도 낳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떳떳한 목소리였다. 오히려 내가 다 당황할 정도였다.
“저기 누나…….”
“왜? 넌 내가 싫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아무런 문제도 없잖아.”
누나는 일말 주저함도 없이,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하고, 네가 날 좋아하는데 뭐가 문제야?”
너무나도 맞는 말이라서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마음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전 아직 학생이잖아요.”
“괜찮아. 내가 책임져줄게.”
“우린 사귄지 한 달도 안 됐어요.”
“그게 뭐가 중요해? 너 설마 나랑 사귀다가 헤어질 생각이야?”
“아니요!”
나는 즉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은하의 고백에 흔들린 것은 사실이지만, 서연이 누나와 헤어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런 여자를 놓치다니…….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이었다. 될 수 있다면 서연이 누나와 백년해로 하며 살고 싶었다.
“그럼 된 거잖아.”
누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결혼하자. 내가 은하, 걔보다 훨씬 더 잘 해줄게.”
일순 서연이 누나의 목소리가 뱀처럼 들려왔다. 더 잘해줄게라는 단어가 왜 이리도 달콤한지, 나도 모르게 ‘네, 누나.’라고 대답할 뻔 했다. 하지만 역시 결혼은 좀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슨 어린 아이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이토록 간단하게 정할 게 아니었다.
더욱이 만에 하나 헤어지게 된다면 누나는 졸지에 이혼녀라는 딱지를 달고 살게 된다. 나야 남자니까 상관없지만, 여자인 서연이 누나한테는 상당히 큰 타격이 된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이혼은 길바닥의 돌처럼 흔하디흔한 것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혼녀라는 딱지는 구설수에 오르기에 딱 좋았다.
“누나, 아무리 그래도 결혼은 역시…….”
“왜? 뭐가 문젠데?”
“누나가 절 마음에 안 들어 할 수도 있잖아요.”
“내가 널? 왜?”
누나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어보이며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역시 이 성격은 피곤하다. 하지만 또 그렇기에 서연이 누나가 사랑스러웠다. 더욱이 누나의 시선은 오로지 나만을 향해 있었다. 그것이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나도 되도록 주변을 정리하고 누나만 보고 싶은데, 그게 또 안 된다.
‘나란 남자는 정말이지…….’
구제불능이다. 이렇게나 엉망진창인 남자가 또 세상에 어디 있을까? 자조 섞인 미소를 지어보인 나는 누나의 손을 보다 세게 꽉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함께 살다보면 이런저런 문제가 많이 생기잖아요. 성격이라던가, 가치관이라던가.”
“그래서?”
“그래서…….”
숨을 한번 들이 쉬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동시에 누나의 손가락이 꼼지락대었다. 나는 그 손가락을 하나하나 문지르다가 이윽고 혀로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보기에 누나는 지금 너무 마음이 앞서있는 것 같아요. 아이도 그래요. 만약에 우리가 헤어지게 되면 아이는 뭐가 되나요? 전 그런 거 보기 싫어요. 누나가 좀 더 결혼이란 걸 진지하게 봐주었으면 해요.”
“…….”
이런 내 말에 누나는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더니, 이윽고 누나가 입술을 벌렸다.
“넌 내가 싫은 거야?”
“아니요, 좋아요. 너무 좋아요. 그래서 누나랑 당장 결혼하고 싶어요.”
“그럼……!”
“그래서 그런 거예요. 너무 좋으니까, 참는 거예요. 혹시라도 누나가 절 싫어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서연이 누나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이런 내 말에 누나는 놀란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누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데 어떻게 참아? 나는 못 참겠어.”
“누나.”
“너무 좋은 걸…….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아. 평생 같이 있고 싶어. 난 이런 감정……. 이런 거,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 아마도 이건 너 이외에는 아무한테도 느끼지 못 할 거야. 앞으로 평생.”
누나는 더없이 뜨겁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방금 전, 차에서 느꼈던 노을의 온기보다도 더 뜨겁고 따스했다. 심지어 포근하기까지도 했다. 무척이나 사랑스런 시선이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이 시끄러울 정도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누나의 손을 꽉 붙잡았다.
놓치고 싶지 않다. 이런 여자를 또 어디서 만날까? 서연이 누나의 말대로 나 또한 누나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저도 똑같아요. 누나 말곤 다른 여자를 생각할 수 없어요. 하지만 우린 아직 젊잖아요.”
이런 내 말에 누나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시선이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내 손등에 꽂혔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며 누나의 손을 더더욱 세게 붙잡아주었다. 내 진심이 전해지도록 말이다. 더불어 아주 잠시나마 흔들렸던 내 마음에 대한 사과도 담아서 말이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데?”
문득 누나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내게 물었다.
“조금만 더 사귀어요.”
“조금이 얼마나인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런 누나를 달래주고자, 오른손을 들어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져주었다.
“제가 졸업할 때까지요.”
“너무 길어.”
누나는 불만 가득한 어린아이마냥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1년은 어때요?”
“그것도 너무 길어.”
“반년은요?”
“…….”
반년이란 말에 누나는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 머릿속으로 계산해보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데, 불쑥 누나가 내 손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도 너무 길어.”
“그럼 너무 짧아지잖아요.”
“그렇지만…….”
“왜요?”
누나는 한동안 어물어물거리다가 이윽고 말소리를 뽑아내었다.
“은하, 걔가 널 꼬시면 어떡해? 그것만 생각하면 나 미칠 것 같아. 넌 내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
“제가 누나보고 헤어지자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도 싫어. 그리고 너 좀 있으면 방학 끝나잖아? 그럼 학기가 다시 시작될 테고……. 은하, 걔랑 같이 학교 다니게 되잖아? 나보고 그걸 그냥 내버려두라고? 난 그 꼴 못 봐. 차라리 자퇴해. 그럼 반년동안 기다려줄게.”
이건 또 예상지 못 한 제안이었다. 설마하니 자퇴를 하라니……. 아무리 그래도 자퇴는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뱉은 나는 누나의 매끄러운 뺨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은하, 걔는 그냥 후배에요.”
“그런데 그 후배가 너한테 고백했잖아. 심지어 나하고 사귀고 있는 걸 빤히 아는데도 말이야.”
누나는 뿌득뿌득 이를 갈았다. 이에 나는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그럼 제가 은하한테 딱 잘라서 말할게요. 사귀지 못 하겠다고요.”
“안 들을 걸.”
누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들을 거예요. 제가 잘 말할게요. 여차하면 누나하고 결혼할 사이라는 것도 밝힐게요.”
은하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역시 서연이 누나가 더 좋다. 나는 누나의 시선을 마주 받으며 진심을 내보였다. 그리고 이런 내 태도에 누나의 시선이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그래도 포기 안 하면?”
“그 땐, 누나랑 결혼할게요.”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무리 은하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내가 정중하게 거절한다면 끝까지 고집부리지 못 할 거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음이야 상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은하라면 금세 털고 일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그게 바로 은하의 장점이었으니 말이다.
“정말로?”
“네, 정말로요.”
이처럼 대답하자, 그제야 누나의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그 모습을 보니, 겨우 안심이 되었다. 특히나 배시시 웃음을 터트리는 누나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역시 누나를 선택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손바닥에 맞닿아있는 누나의 뺨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종업원을 발견하고는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종업원은 잠시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테이블 위로 주문한 음식이 담긴 그릇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윽고 음식이 다 올라오자, 누나가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오늘 남산 갈까?”
========== 작품 후기 ==========
유현이가 이만큼이나 서연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