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저 어플-272화 (272/599)

<-- [하이 엘프] -->

“뭐?”

나도 모르게 그만 바보처럼 되묻고 말았다.

“웬만하면 오빠를 포기하려고 했는데, 역시 못 포기하겠어요.”

“은하야.”

“그러니까 그렇게 알아두세요.”

딱 잘라 말한 은하는 그대로 뒤돌더니,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말이다.

결국 나는 은하를 붙잡지 못 한 채,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윽고 3층에 도착한 은하는 제 고개를 빼꼼 내밀고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오빠, 내일 봐요!”

크게 소리쳐 말한 은하는 씩 웃음을 터트리며 속이 다 시원하단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심정이 복잡해졌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점 어두워지는 은하의 표정에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래, 내일 보자.”

이처럼 내가 손을 흔들며 화답해주자, 그제야 은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네!”

큰 소리로 대답한 은하는 자기 또한 오른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일순 사방이 고요해졌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귓가에 맴도는 은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뚜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거 참…….’

나도 참 구제불능이란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손을 흔들어주다니.’

아무리 은하를 달래줄 생각에서 그런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절대로 하지 말아야 될 행동이었다.

사실상 은하의 행동을 인정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좀 더 크게 확대 해석하자면 나는 지금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누나한테 뭐라고 설명해야지?’

흔히들 이걸 두고서 산 너머 산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나는 서연이 누나의 반응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해결책을 구상해보았다. 하지만 좀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내가 취했던 행동들은 하나 같이 은하를 달래주기 위해서 취했던 행동들이었다.

현재 여자 친구인 서연이 누나를 배려해주는 움직임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걸 서연이 누나한테 숨김없이 밝힌다? 누나한테 차이기에 딱 좋았다. 아니, 어쩌면 살해당할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서연이 누나의 처녀를 가져간 첫 남자였으니 말이다.

누나의 성격상 분명 날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 들지도 몰랐다.

‘……숨길까?’

하지만 과연 이게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애당초 서연이 누나와 은하는 가면을 쓴 사람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런 이상, 괜히 숨긴다고 아등바등 거려봤자 무의미했다.

오히려 나중에 들켰을 때, 서연이 누나의 화만 돋을 뿐이었다.

“하아.”

어째서 여난이란 단어가 있는 것인지 심히 이해가 되었다. 문자 그대로 여인과의 교제로 인하여 생기는 근심과 재난이라 할 수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건물들 사이로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다가 문득 누나의 퇴근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에 나는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낸 뒤에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그러자 화면에 오후 5시 27분이란 시간이 표시되었다.

이를 확인한 나는 누나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김 유현 : 저 오늘 저녁으로 애들이랑 치킨 먹었어요]

이처럼 메시지를 보내자, 얼마 있지 않아서 누나한테서 답장이 왔다.

[유 서연 : 벌써?]

[김 유현 : 네]

[유 서연 : 배부르겠네?]

[김 유현 : 네. 누나는 어떻게 하실래요? 회사 분들하고 드시고 오실 건가요?]

[유 서연 : 아니, 퇴근하고 바로 거기로 갈게]

‘회사 사람들하고는 별로 안 친한가?’

이쯤 되면 회사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간다고 할 법도 하건만, 누나는 그런 말도 없이 곧장 여기로 오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누나가 회식 자리를 가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하다못해 회사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 것도 보지 못 했다. 물론 나를 배려해서 일찍 들어오는 걸 수도 있겠지만, 나와 사귀는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사람과 저녁 약속을 잡지 않는 걸 보면 정말로 친하지 않은 걸 수도 있었다.

‘……하긴 누나가 조금 드센가?’

분명 다들 누나를 어렵게 대할 것이 틀림없었다. 더욱이 누나가 보통 위치의 사람이던가? 비록 인턴이라고는 하지만 현주의 사촌이었다. 즉, 언제까지고 인턴의 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분명 경험을 쌓으라는 차원에서 인턴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회사 사람들도 그걸 알고 누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겠지.’

쓰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네’라고 답장을 보낸 뒤에 계단에 걸터앉았다.

“누나한테 뭐라고 해야 되려나.”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다. 나는 한동안 시간을 죽이며 고민을 하다가 이윽고 적당히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사실 있는 그대로 전부 다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애당초 중요한 건, 내가 서연이 누나와 사귀기 전부터 은하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은하가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 외는 부수적인 것들이었다.

내가 여지를 주었다는 것까지 전부 다 말 할 필요는 없었다.

더욱이 여기서 나만 더 흔들리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래, 융통성 있게 하자.’

나는 짝 소리가 나도록 내 뺨을 때렸다. 그러자 얼얼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확 들었다.

‘……은하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 내 여자 친구는 서연이 누나니까.’

이렇듯 마음을 굳게 먹은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 후, 서연이 누나를 마중 나가기 위해서 거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불현듯 내 시야에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고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이 들어왔다.

‘뭐하는 거지?’

산책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행동거지가 다소 특이했다. 특히나 여성의 손에 들려있는 고양이는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덜렁덜렁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 죽은 건 아닌가 싶었지만, 딱히 피가 나는 곳이 없는 걸 보면 멀쩡해보였다.

‘……뭔가.’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서 몸을 숨었다. 그러고 나서 조금 기다리자, 여성이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윽고 쓰레기 통 안으로 고양이를 휙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개운하단 표정을 지어보이며 양 손을 툭툭 털기까지 했다.

“하.”

그 광경에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어떻게 살아있는 짐승을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말인가? 물론 죽은 고양이일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와락 눈살을 찌푸리며 곧장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매니저 어플을 실행한 뒤에 여성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조교 기능을 사용했다.

[현재 사용자의 레벨은 ‘8’입니다.]

[반경 1킬로미터 이내에 존재하는 여성들만 조교할 수 있습니다.]

[조교 할 여성을 골라주세요.]

[목록에 저장되어 있는 여성이 존재합니다.]

[목록을 열람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요]

이 물음에 나는 아니요를 눌러서 주변 여성 목록을 불러왔다. 그러자 곧 화면에 무수히 많은 여성의 정보가 떠올랐다. 물론 이 때, 나와 가까기에 있는 여성부터 나열되었기 때문에 손쉽게 고양이를 쓰레기통에 버린 여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김 희정]

[나이 : 37살]

[직업 : 가정주부 : 자세히 보기]

[개인 능력치 : 자세히 보기]

“맞군.”

화면에 떠오른 사진까지 확인한 나는 곧바로 김 희정을 선택했다.

[바로 조교의 방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주의. 조교를 끝내기 전까지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네 / 아니요]

[던전 내에 조교의 방이 건설되어 있습니다.]

[던전 내의 조교의 방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요]

이 물음에 나는 조교의 방으로 선택했다. 여기서 던전 내의 조교의 방으로 갈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처럼 조교의 방을 선택하자, 잠시 눈앞이 일그러졌다가 이윽고 환하게 밝아지며 저택 내의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오셨어요, 주인님?”

그 때, 화사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수줍게 웃고 있는 운피레아가 서있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아이린이 성큼성큼 이쪽을 향해 다가오며 소리쳤다.

“어머니, 저 자는 어머니의 주인님이 아닙니다. 말씀을 거둬주십시오.”

상당히 불만어린 목소리였다. 하긴 운피레아는 이제까지 엘프들을 다스리는 여왕으로 존재해왔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니, 아이린의 입장에선 그것이 심히 거슬릴 것이 틀림없었다.

더욱이 그녀는 운피레아의 딸이기도 했다.

‘딸이 된 입장에서 어머니의 이런 모습은 그다지 보기 싫겠지.’

옅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운피레아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잠시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던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품에 안겨왔다. 그러자 크고 풍만한 가슴이 내 가슴팍에 맞닿으며 기분 좋게 물결쳤다. 더욱이 한 아이의 어머니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록한 허리가 내 팔에 착 하고 감겨왔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도 가장 좋은 건, 역시 잘록한 허리 아래 자리 잡고 있는 골반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나 보기 좋게 살랑살랑 흔들리는 둔부는 나를 강렬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어서 빨리 자기를 꽉 움켜잡아달라는 듯이 말이다.

‘……여전히 탐스럽단 말이야.’

꿀꺽, 군침을 삼킨 나는 운피레아의 엉덩이 쪽으로 슬금슬금 손을 내렸다. 그러자 그녀 또한 원한다는 듯이 양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몸을 들썩였다. 하지만 내 손이 미처 엉덩이에 닿기도 전에 아이린이 큰 소리로 나를 제지했다.

“지, 지금 뭐하는 짓이냐! 어머니, 지금 당장 그 자에게서 떨어지십시오!”

아이린은 적잖게 흥분한 모양인지, 운피레아의 팔을 잡아당기며 내게서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운피레아는 더더욱 내 몸에서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찰싹 달라붙어왔다.

그렇게 운피레아와 아이린의 실랑이가 계속되자, 나는 아이린을 손목을 꽉 움켜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린 씨, 그만 하시죠.”

“그대야말로 그만해라! 대체 어머니께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이라니요?”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것이 아이린의 화를 돋운 모양인지, 그녀는 잔뜩 성난 표정을 지어보이며 귀를 뾰족하게 세웠다.

“어머니가 하루 종일 뭘 하셨는지 아느냐? 그대를 기다렸다! 이 저택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어머니가 이런다는 말이냐!”

이러한 아이린의 외침에 운피레아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입술을 벌렸다. 자신의 딸에게 무언가 한 마디 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얼른 손으로 허리를 꽉 붙잡으며 제지했다.

‘여기선 아이린이 괴로워하는 편이 좋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아이린이 엘프의 숲에서 엘프들을 다스리던 어머니의 모습과 지금 어머니의 모습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면 할수록 내게는 이득이었으니 말이다. 기품 있고 우아했던 운피레아가 어느 날 갑자기 주인님만 찾아대는 한 명의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분명 아이린은 의문을 가질 것이다.

어째서 자신의 어머니가 이렇게 변해버린 것인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해답을 던져주는 거지.’

키득거리며 웃은 나는 운피레아의 턱을 붙잡아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목에 양 팔을 두르며 두 눈을 꼭 감는 운피레아다. 이에 나는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자, 아이린이 보는 앞에서 입맞춤을 했다.

“……!”

그 순간, 아이린의 경악어린 표정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 표정을 보니, 좀 더 짓궂게 놀려주고 싶단 못된 생각이 들었다.

흥이 돋는 걸 느낀 나는 그대로 혀를 내밀어 운피레아의 입 안을 휘저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 혀 놀림에 그녀는 더없이 황홀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야릇한 신음을 흘렸다.

“하음, 읏……. 하앙. 으읏.”

운피레아의 입술 사이로 야릇한 신음성이 새어나오자, 아이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내 키스를 받으며 황홀해하는 모습이 어버버 거리다가 이윽고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또 울려버렸네.’

이 얼마나 눈물이 많은 하이 엘프라는 말인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웃음을 꾹 삼킨 나는 좀 더 세게 운피레아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 또한 내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격하게 호응했다.

“하우, 아……. 아앙.”

그리고 이윽고 입맞춤이 끝나자, 서로의 타액이 투명한 실선을 만들며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운피레아의 입가에 묻어있는 타액을 검지로 슥 훑어 내주며 입을 열었다.

“아이린 씨, 당신의 어머니가 왜 이렇게 변했냐고 저한테 물으셨죠?”

“…….”

천천히 아이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보란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이게 그 대답입니다.”

이 말과 동시에 운피레아의 둔부를 꽉 움켜쥐자, 하앙! 하고 달콤한 신음성이 저택 내부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것에 맞춰 아이린의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녀는 한동안 나와 운피레아를 번갈아보더니, 이윽고 이를 악 물고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옷소매로 훔쳤다.

그 후, 나를 무섭게 쏘아보며 소리쳤다.

“거짓말 하지 마라, 이 위선자!”

========== 작품 후기 ==========

여전히 건방진 아이린이군요! 후후, 하지만 그 건방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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