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 엘프] -->
‘늦는다고 미리 말해둬야겠지?’
혀를 내두른 나는 단체 톡에다가 조금 늦는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현이가 가장 먼저 답장했다.
[장 지현 : 늦잠?]
이 물음에 나는 ‘누구랑 만나느라.’라고 대답하려다가 이내 귀찮아질 거라는 생각에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 내가 누구랑 만나느라 늦었다고 했다간 틀림없이 누구랑 만났느냐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질문이 다 튀어나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여기서 내가 무언가 말실수를 하게 된다면 차후 은하나 예은이를 통해서 서연이 누나한테 전해들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장 지현 : ㅋㅋㅋㅋㅋ 어젯밤에 뭐했기에 늦잠 잔거예요?]
[김 유현 : 밤늦게 놀았거든]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어젯밤 늦게까지 서연이 누나하고 섹스를 했었으니까 말이다.
[장 지현 : 뭐하고요? 게임?]
[김 유현 : 알면 다침]
[장 지현 : 왜요?ㅋㅋㅋㅋㅋ 누구랑 놀았는데요?]
이 물음에 나는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유현 : 서연이 누나하고]
[장 지현 : 누구에요?]
[이 은하 : 언니가 오빠하고 밤늦게까지요?]
[신 예은 :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요?]
서연이 누나를 모르는 지현이는 당연히 누구냐고 물었고, 은하와 예은이는 내 예상대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질문에 나는 잠시 무어라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이윽고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서연이 누나도 밝혀도 상관없다고 말했었고 말이다.
[김 유현 : 서연이 누나하고 사귀거든]
이처럼 내가 밝히자, 일순 단톡방이 조용해졌다.
“뭐지?”
평소라면 지현이가 대박이니 뭐니 하며 떠들어야 되었는데 단 한마디로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하와 예은이도 조용했다. 나는 오늘따라 요란하게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애들이 무언가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르자, 지현이가 메시지를 올렸다.
[장 지현 : 오빠, 오늘 나오지 마세요]
“나오지 말라고?”
나는 ‘왜?’라고 물으려다가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지현이가 이래봬도 생각이 깊은 애였기 때문이었다. 분명 어떠한 이유에서 오지 말라고 한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애들이 연습하는데, 내가 옆에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였고 말이다.
‘하지만 뭔가 지뢰를 밟은 것만 같단 말이야.’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멀리서 한번 지켜볼까?’
이렇듯 생각을 굳힌 나는 보다 빠르게 걸음을 옮겨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곧 약속한 장소에 도착한 나는 애들한테 들키지 않도록 조심조심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디 갔지?’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은하네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커피숍에 갔나?’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변을 살펴보고는 평소 은하네들과 함께 가던 커피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윽고 커피숍에 도착한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유리창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저기 있네.’
커피숍 안에는 은하와 예은이 그리고 지현이가 있었다. 다만 특이하게도 은하가 양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고서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지현이와 예은이가 그런 은하를 위로해주듯이 등을 두드려주고 있었다.
‘……설마.’
그 순간, 예전에 지현이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래서 오빠는 은하가 다른 남자하고 사귀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오빠가 봤을 때, 은하……. 꽤 괜찮지 않아요?’
‘여자 친구로는 어때요?’
그 때는 별대수롭지 않게 들었었다.
그저 친구로서, 은하가 이상한 놈팡이와 사귀는 것보다 아는 선배와 사귀는 편이 훨씬 낫다고 판단하고서 단순히 나를 부추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지현이는 은하가 날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전제 조건을 이렇게 두면 지현이가 내게 했던 이야기들이 착착 들어맞았다.
‘……이거 참…….’
순간 내 입장이 난처해졌다.
물론 은하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건, 무척이나 기쁜 소식임이 틀림없었다. 누가 뭐라해도 은하는 내게 있어서 아주 소중한 후배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성으로서도 충분히 매력적인 상대였다.
다만 이제까지 내가 은하에게 고백하지 않았던 이유는 현 상태로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단순 선후배 관계로 남는다고 하더라도 딱히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상대가 소중했기 때문에 괜히 고백했다가 사이가 어색해지는 게 더 두려웠다. 이러한 까닭에서 나는 이제까지 은하를 일부러 이성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은하가 나한테 마음이 있다는 걸, 서연이 누나의 고백을 받기 전에 눈치챘다면? 아마도 지금쯤 사귀고 있는 게, 은하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서연이 누나가 매력적이라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은하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돌겠네.’
누가 보면 행복한 고민이라고 하겠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아주 죽을 맛이었다.
더욱이 은하와 내가 오죽 가깝게 지냈던가? 무려 같은 빌라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이상, 학기가 시작되면 싫든 좋든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사과라도 해야 하나?’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무언가 해결책을 구상해보는데, 돌연 어떤 남자가 애들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뭔가 싶어서 봤는데, 보면 볼수록 행동거지가 수상쩍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지현이와 예은이가 우는 은하를 달래는데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에 남자가 지현이 가방을 슬쩍 집어 드는 게 보였다.
“하……. 이젠 별 게 짜증나게 하네.”
헛웃음을 터트린 나는 소매치기가 커피숍 밖으로 나온 순간 오른손을 뻗어 팔을 붙잡았다.
“……이봐요, 그 가방 내려놓으시죠.”
“시발? 넌 뭐야!”
나름 정중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다짜고짜 욕을 하며 내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더불어 소매치기 손에 들려있는 지현이 가방이 위아래로 덜렁덜렁 흔들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과시했다.
저건 두 번 볼 필요도 없이 지현이의 가방이었다.
“그 가방, 제 친구 꺼니까 내려놓으시죠.”
“꺼지라고!”
그 때, 남자가 다짜고짜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찌나 느리던지, 하품이 다 나올 정도였다.
나는 상대의 주먹을 가볍게 피해낸 뒤에 붙잡고 있는 팔을 뒤로 꺾었다.
“……악!”
그러자 마치 거짓말처럼 남자의 몸이 깡마른 수수깡처럼 꺾이며 쓰러졌다.
‘어?’
정말로 내가 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가볍게 제압된 것이었다. 전혀 예상지도 못한 상황에 잠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 하는데, 갑자기 퍽! 소리와 함께 등 쪽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튀어!”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모자를 쓴 남자가 방금 전에 내가 제압한 사람을 일으키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2인조 소매치기였던 모양이었다. 진짜 백주대낮에 할 짓도 없는 인간이었다.
쯧쯧, 혀를 찬 나는 재빨리 오른손을 뻗어 모자 쓴 남자의 옷을 붙잡았다.
“……썅!”
옷이 붙잡힌 남자가 크게 소리치며 양 팔을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대로 왼손마저 뻗어 남자를 넘어트렸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지현이의 가방을 든 남자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게 보였다.
‘의리도 없는 새끼네.’
혀를 내두른 나는 침착하게 주문을 외웠다.
“속박.”
주문을 외운 순간, 지현이의 가방을 들고서 도망치던 남자의 몸이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다리가 굳자, 남자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이리저리 발버둥치고 있는 모자 쓴 남자의 몸을 꽉 억눌렀다. 그 후, 고개를 들어 올리자 길거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에 나는 맞은편 사람들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 저기……. 경찰에 좀 신고해주실래요?”
이런 내 말에 한 여성분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그렇게 통화를 하고 있는데, 돌연 뒤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지현이가 보였다. 이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으로 저 앞에 넘어져있는 소매치기를 가리켰다.
“지현아, 너 가방 저 남자가 들고 있어. 얼른 가져와.”
“네?”
깜짝 놀란 목소리로 되물은 지현이는 이내 내가 가리킨 방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윽고 어떤 남자가 도로에 누워있음을 깨닫고는 그 쪽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 후, 자기 가방이 소매치기의 손에 들려있음을 깨달은 그녀는 ‘악! 내 가방!’ 라고 소리치며 남자의 손에 쥐어져 있는 자신의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동시에 내 손에 제압당해 있는 남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젠 다 끝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 두 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그 정중한 말에 나는 얼른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제압하고 있는 소매치기를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지현이한테 온갖 쌍욕을 한 바가지 먹고 있는 소매치기에게 다가가서 몸을 일으킨 뒤에 속박을 풀어주었다.
“조서 때문에 경찰서까지 함께 가주셨으면 하는데요.”
당연한 조치였기 때문에 나는 지현이를 진정시킨 뒤에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당연히 가야죠!’라고 소리치며 분개하는 지현이다. 더불어 소매치기 두 명한테는 ‘너네 다 콩밥 먹을 줄 알아!’라고 호언하기까지 했다.
‘무섭지도 않나?’
혹시라도 보복을 당할까봐 제대로 목소리도 내지 못 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지현이는 뭘 그렇게 믿고 있는 건지, 목소리를 줄이긴 커녕 쩌렁쩌렁 소리치며 앞장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은하에 대한 일이 떠오른 모양인지 경찰관 두 분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에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흐르자, 갑자기 커피숍 밖으로 은하가 뛰쳐나왔다.
“오빠!”
큰 소리로 나를 부른 은하는 내 손을 꽉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소매치기랑 싸웠다면서요? 어디 안 다쳤어요?”
“…….”
“왜 그랬어요? 그냥 놔두지! 오빠, 다쳤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피는 안 나요? 흐윽!”
급기야 눈물까지 보이는 은하의 태도에 순간 감동이 몰려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은하가 커피숍 밖으로 나오지 않거나 나를 못 본 척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은하가 보이고 있는 행동은 내 예상 밖의 행동이었다.
그것도 엄청 좋은 쪽으로 말이다.
나는 일단 우는 은하를 달래줄 생각에서 가볍게 끌어안아주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은하 등 뒤로 검지로 코 밑을 슥슥 문지르고 있는 지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청 흐뭇한 표정으로 말이다.
‘지현이가 도와준 건가.’
내 생각이지만, 지현이가 다소 과장되게 은하한테 설명해준 모양이었다.
나는 옅게 웃는 걸로 지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은하와 함께 경찰차를 탔다. 그리고 지현이와 예은이는 우리를 배려해주는 건지 뒤늦게 온 경찰차에 올랐다.
덕분에 나는 계속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며 은하를 달래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경찰서에 도착하자, 은하는 겨우겨우 울음을 멈추며 혹시 내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특히나 내 등에 큼지막하게 발자국 표시가 찍혀있는 걸 발견했을 때는 경악에 가까운 비명성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반면에 지현이와 함께 뒤늦게 온 예은이가 좋은 증거라면서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역시 내 몸을 생각해주는 건, 은하 밖에 없다.
여하튼 조서는 나와 지현이가 교대로 했다. 더불어 2인조 소매치기가 내게 폭력을 행사했으니, 폭행죄로 고소가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나는 합의 없이 폭행죄까지 더 해주었다. 물론 소매치기들은 말도 안 된다며 소리쳤지만, 커피숍 내부와 현관 쪽에 설치되어 있던 CCTV가 확보되자 그 소리가 쏙 들어갔다.
그리고 이처럼 조서를 끝마치고 경찰서를 나가게 되자, 예은이가 기분이라며 우리를 치킨 집으로 이끌었다. 이 때, 은하가 병원에 먼저 가보자며 보챘지만 나는 괜찮다는 말로 일축했다.
실제로 아픈 것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혹 나중에 허리가 아파온다고 하더라도 치료술사의 지팡이로 치료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오빠, 아프면 바로 말해요. 괜히 끙끙 앓지 말고요.”
물론 이것을 모르는 은하는 내가 치킨집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전전긍긍하며 걱정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지현이와 예은이는 음흉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키득거렸다. 어지간히도 이 상황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다행이네.’
처음에는 은하를 어떻게 봐야 되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어찌저찌 좋게 풀려가는 듯이 싶었다.
나는 은하와 함께 나란히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은하, 네가 내 등 좀 주물러주면 나을 것 같은데?”
반쯤 농담 삼아서 한 말인데, 은하는 진담으로 받은 모양인지 내 등 쪽으로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주물러드릴게요!”
“뭐? 여기서?”
되레 깜짝 놀란 내가 이리 묻자, 은하는 의지로 가득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요.”
그 말에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녁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은 우리 빼고 아무도 없었다. 이에 나는 내심 안도하며 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셔츠의 등 부분을 걷자, 은하를 비롯한 지현이와 예은이가 감탄성을 터트렸다.
“우와아…….”
“오빠 등빨 쩐다.”
“선배, 의외로……. 운동 많이 하시나 봐요?”
이러한 세 사람의 탄성이 나는 잠시 옷을 들춰 내 복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전에 확인했던 복근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어쩐지 전보다 훨씬 더 뚜렷해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세 사람이 똑같이 꿀꺽, 군침을 삼키며 눈동자를 빛냈다.
========== 작품 후기 ==========
아마도 다음화에서 은하가... 크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