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 -->
‘이걸로 좀 단념했을라나?’
나는 슬쩍 소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런 내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소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그 모습에 조금 소름이 돋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소녀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조금 놀랐다. 서늘한 빛을 머금고 있는 갈색 눈동자가 이전보다 훨씬 더 또렷하게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건 결코 단념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괜히 구했나.’
지금이라도 소녀의 배를 갈라서 마정석 파편을 꺼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런 짓을 했다가 자칫 죽기라도 하면…….’
더욱이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당장 내쫓을 수도 없어.’
앞서 소녀가 지적했듯이 여기서 그녀를 내쫓게 되면, 그야말로 짐승의 밥이 되라는 것 밖에는 되지 않았다. 설혹 이 산을 무사히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한낱 십 대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어쩌면 일거리를 구하지 못 해서 사내들에게 몸을 팔아야 될지도 몰랐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건 노예보다도 더 못한 삶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만에 하나, 저 소녀가 복수에 성공하기라도 한다면…….’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긴 하지만, 옛말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었다.
그 말대로 저 소녀가 밖으로 나가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온갖 더러운 방법들을 사용해가면서까지 자신의 복수를 완성시키려 들지도 몰랐다.
‘……그럼 여기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될까.’
일단 죽이는 것은 안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만약에 여기서 내가 저 소녀를 죽이게 된다면 아마도 일평생 악몽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욱이 그런 꺼림칙한 일은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조교를 해볼까?’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했다. 조금씩 쾌감에 젖게 만들어서 복수 같은 건, 생각하지 못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마 이 방법을 사용한다면 서로 사이 좋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무턱대고 조교하는 것은 안 됐다. 만약에 그런 짓을 했다간 소녀의 마음이 죽어버리게 되어버릴 테니 말이다. 어쩌면 증오의 대상이 내게로 향할지도 몰랐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사양하고 싶었다.
“내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불현듯 소녀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이에 나는 잠시 멍하니 소녀를 쳐다보다가 이내 내게 물어본 것이란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 그게…….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소피아다.”
“아, 소피아 씨로군요. 저는 김 유현이라고 합니다. 한 동안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야말로.”
소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며 다른 여자 아이들에게도 이름을 물어 보았다. 그러자 마치 노란 병아리들처럼 내 주위에 몰려들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여자 아이들이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여하튼 이처럼 통성명을 하면서 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덧 고블린들의 주거지를 만들고 있는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소피아를 비롯한 여자아이들이 저마다 감탄성을 터트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호기심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긴 이 어린 소녀들이 언제 이런 광경을 보았겠는가?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이 서로 힘을 합쳐서 집을 짓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좀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이 정도로 체계적으로 만들 줄이야.’
인간의 집에 비해서 그 크기가 조금 작다 싶을 뿐이지, 인간 마을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특히나 이미 완성된 집은 한 눈에 딱 보아도 무척이나 견고해보였다. 나는 내심 감탄하며 방 안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고블린들과 함께 곡괭이질을 하며 방을 넓히고 있는 마틸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구슬땀을 흘리면서까지 열심히 하고 있는 걸 보니, 괜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에나와 소피아 그리고 다섯 명의 여자아이를 데리고서 마틸다 쪽으로 다가섰다.
“마틸다 씨.”
“아! 주, 주인님?”
곡괭이질을 하고 있던 마틸다는 내 부름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곧 배시시 웃음을 터트리며 황급히 곡괭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고블린도 잠시 곡괭이를 내려놓고서 내게 예의를 표시했다.
“케르륵! 주인님, 어서 와라! 케르륵!”
호칭이 어느덧 인간에서 주인님으로 바뀌어있었다. 아무래도 엘레노아와 마틸다의 영향인 모양이었다.
나는 약간 기묘한 느낌을 받으며 고블린들의 말에 대꾸했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케르르르! 아니다, 케륵! 주인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케륵! 난 이 생활이 좋다! 다들 만족한다! 케륵! 케륵!”
고블린은 무척이나 만족한다는 듯이 연신 케륵케륵! 울어대었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마틸다의 손을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잠깐 마틸다 씨 좀 빌려가도 되겠습니까?”
“케륵! 물론이다! 케르륵! 수호자도 주인님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케륵! 일 하는 내내 주인님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케륵! 케륵!”
마치 짓궂은 중년 아저씨처럼 마틸다를 놀려대는 고블린이다. 그리고 그 말에 일순 마틸다의 양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색다르기도 하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앙칼지고, 거만하기만 했는데 말이다.
역시 여자는 남자가 하기 나름인 것 같다.
나는 마틸다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여주고는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엘레노아 씨는 어디에 있습니까?”
“엘레노아라면 고블린들과 함께 나무를 베러 갔습니다. 슬슬 돌아올 시간이 됐는데……. 아, 마침 저기 오는군요.”
마틸다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일곱 마리의 고블린들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엘레노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에 나는 엘레노아 쪽으로 손을 흔들며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우며 곧장 내 곁으로 달려오는 엘레노아다.
“주인님!”
크게 소리쳐 부른 엘레노아는 그대로 내 품에 안겨 들어서는 뺨을 비비적거렸다. 물론 그녀의 커다란 가슴도 내 가슴팍에 꽉 맞닿아서는 호떡마냥 납작하게 문대어졌다. 이에 나는 허허 웃으며 엘레노아를 토닥여주었다.
그 후, 엘레노아와 마틸다에게 여섯 명의 소녀를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롭게 던전의 일원이 된 아이들입니다. 던전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보살펴주세요.”
이러한 내 말에 두 여인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여자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어머나, 귀여운 인간 아이들이네요? 후훗, 언니가 잔뜩 귀여워해줄게.”
“잘 부탁해.”
다행히도 두 사람은 여자 아이들에게 살갑게 대해주었다. 여자 아이들 또한 이런 살가운 대우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 물론 몇몇은 엘레노아가 서큐버스란 사실에 꽤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긴 고블린들과 함께 생활하는 곳이었다. 이런 거에 일일이 놀란다면 심력 낭비였다.
‘뭐, 소개를 이쯤 해두고…….’
마틸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피아를 한번 쳐다본 나는 이내 엘레노아를 내 쪽으로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엘레노아 씨에게 따로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부탁이요? 뭔데요, 주인님?”
“소피아란 이름의 소녀가 누군지 아시죠?”
이런 내 물음에 엘레노아는 정확하게 소피아를 손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인간 소녀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혹시라도 소피아가 엿듣지는 않을까 싶어, 살짝 거리를 벌린 뒤에 말을 이었다.
“……소피아가 혹시라도 여기서 도망치거나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면 곧바로 막아주세요.”
“왜요? 중요한 인간인가요?”
“네, 중요합니다. 무려 마정석 파편을 삼켰으니까요.”
이러한 내 말에 일순 엘레노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어머어머, 그럼 큰일 난 거 아닌가요?”
“네? 왜요? 아…….”
호들갑을 떨며 소리치는 엘레노아의 태도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그제야 마정석 파편이 인체에 흡수되었을 때,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내가 왜 이걸 잊고 있었지?’
소피아에 대한 것만 너무 신경쓰다보니, 정작 중요한 것을 신경쓰지 못 한 나였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네.’
안도의 숨을 내뱉은 나는 소피아의 뱃속에 들어있을 마정석 파편을 어떻게 할지 새롭게 고민해보았다.
========== 작품 후기 ==========
진짜로 배 갈라요? 정말로요?
농담이죠?
다들 저 놀리려고 농담으로 그러시는거죠?
이렇게나 귀여운 여자 아이의 배를 가르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