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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치매대응반-118화 (118/122)

〈 118화 〉 무림치매대응반 117

* * *

“할 이야기 다 끝났으면 슬슬 일어나지.”

서로 앉아서 환담을 나눌 사이도 아니고, 대략적인 내용과 시기에 대한 협상은 완료했으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심하게. 내년 봄일세.”

“넉넉하게 산해관에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지금까지야 어쩔 수 없었다 치지만, 앞으로는 좋은 협력을 기대하지.”

“내년 봄 이후에 협력할 일이 없는것이 제일 좋겠지요.”

“그거야 그렇지.”

중원 무림에 미련도 없다. 안보고 사는게 제일 좋다. 내 사람들이야 내 사람이라고 느끼지만 여전히 여기에 소속감을 느끼고 그런건 없다.

“그럼 이만.”

“멀리 안나가네.”

동창의 1인자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협상을 끝내고 나서 새삼 돌아보니 놀라움이 느껴진다. 위상으로 따지자면 국무총리쯤…. 아니지. 대통령 권한대행인가? 국정원장? 하여간 이렇게 높은 사람하고 다이다이로 이봐, 내가 이정도 양보할테니 그쪽도 이 정도는 양보해야지 같은 협상을 했다니. 많이 컸다.

“가자.”

내 뒤에 쭉 시립해 있던 연이, 화란이, 린이, 주선이와 함께 당당하게 몸을 돌려 돌아 나왔다. 아. 맞다.

“불가침의 대상에는 무영문과 은월문도 포함되는거, 맞습니까?”

“…흐음. 그 치들은 아는게 너무 많은데.”

“괜한 반발심을 사서 쓸데 없는 소리가 밖으로 새는 것 보다야 낫죠. 작정하고 숨으면 다 죽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 뭐, 그냥 해 본 소리일세 그렇게 하나하나 펄쩍 뛰지좀 말지 그래. 없어보이니까.”

“그런걸로 알아도 될까요?”

“자네가 이야기 하기 전에는 생각도 안하고 있었네. 중원으로 다시 돌려보내지나 말게. 무림인들 생각만하면 아주 골이 지끈거리니까.”

필요한 내용까지 확답 받았으니까 됐다.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는걸 보면 괜히 긁어 부스럼인가 싶었지만 의외로 태감은 쿨하게 드랍을 선택했다. 내가 거기 신경 쓰고 있는걸 알면 뭐라도 하나 더 협상 할 수 있었을 텐데 진짜로 징글징글한 모양이다.

“그럼 진짜 갑니다.”

“한 세력의 수장쯤 되면 말일세. 하나 하나 물어보지좀 말고 적당히 그냥 알아서 하게.”

내가 과하게 쫄아 있는건 맞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게, 누구 하나 죽어나가도 씁 어쩔 수 없지 하고 넘어가는 식의 사고 방식이니까. 내 손으로 젊은이 하나를 시원하게 죽여놓고도 이런 소리를 하는게 우습긴 하지만, 이게 또 골때리는게 그렇게 하나를 죽이고 나니까 더욱 더 내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고 할지…. 아마, 주지수도 조금만 더 있으면 그렇게 되고 말거다. 젠장.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사고치지 마라 연아.”

동창의 건물에서 벗어나자 연이가 툴툴거렸다.

“내가 뭐 입만 뻥긋하면 사고나 치는 줄 아나….”

“너는 좀 그런 경향이 있어.”

다 빠져 나와서야 입을 여는 걸 보면, 방해를 하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한거겠지.

“감사해요 문주님.”

“괜히 말을 꺼냈나 싶기도 하네.”

“확답을 받아주시니 훨씬 마음이 가벼운걸요.”

내 옆으로 바싹 달라붙는 주선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옆에서 연이가 작게 코웃음을 쳤지만 연이의 허리도 끌어당겨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일단 다시 토굴로 복귀하자.”

“그래요. 가서 이야기 해요.”

아무말 없이 뒤를 따르는 화란이와 린이까지 달고 순식간에 토굴로 돌아왔다. 혹시나 감시가 붙는건 아닐까 해서 기감을 펼치고 움직였지만 동창은 진짜로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왔어?”

“별 일 없었지?”

“응.”

뭔가 집지키는 개 쓰다듬는 느낌이긴 했는데, 나도 좋고 서령이도 좋으면 아무래도 좋은거지. 밖에 나와있던 서령이도 데리고 토굴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어. 넓어진 느낌인데.

“뭐하냐 니네?”

“아, 주공. 사람도 많고 해서 좀 넓혀 놓고 있었습니다.”

얘들 뭐 진짜 토굴만드는데 맛이라도 든건지…. 보람찬 얼굴로 광장을 만들어 놓은 자윤이를 보다가 구석탱이에 쪼그려 앉아 있는 주지수를 발견했다. 맞다. 저거 처리해야지.

“야.”

“…나, 말인가?”

내가 여기서 불편한 목소리로 야, 라고 부를건 저거 밖에 없긴 하다.

“따라 나와.”

“이야기가 잘 된 모양이군.”

주지수가 한층 풀이 죽은 목소리로 따라 일어섰다. 이제는 쓸모가 없다. 동창과 협의한 대로 노평공주가 중원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할테니 제일 깔끔한건 애초에 결심했던대로 황천길로 보내드리는 거긴 한데…. 왠지 우리 애들이 또 구시렁거릴것 같기도 하고….

“…오라버니.”

“되었네. 애초에 기대도 않고 있었어.”

연이가 날 말리려는 듯 토굴 밖 까지 따라나와 옷 소매를 잡아 끌었다. 주지수는 절로 동정심이 생기는 신색으로 처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유롭게 보내주려고 했는데, 동창에서 중원으로 돌려보내지 말라더라고.”

“그렇군.”

말은 그렇지만, 동창도 그렇게 이야기 했으면 그냥 모른척 할거다. 즉, 공식적으로 노평공주는 세외로 떠났기 때문에 주지수가 노평공주입네 하고 깝쳐봐야 비공식적으로 묻어버릴 수 있다는거지. 대놓고 대외활동을 하고 세력을 결집하지만 않는다면 칼맞아 죽지는 않을거다.

“그러니까, 그냥 쥐죽은듯이 살아. 최대한 빠르게 어디로든 떠나는걸 추천하지.”

“…그게 무슨….”

“자유롭게 보내주진 못하고, 알아서 세외로 꺼지라고.”

보내주기 전에 앞으로 더 이상은 무공을 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조치할 예정이니, 다시 뭔가 일을 도모할 수는 없을거고…. 앞서 말했듯 공식적으로 나대지만 않으면 추종자들과 함께 적당히 여유롭게 천수를 누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을거다. 썩어도 준치라고 역사에 이름자 하나 못 남긴 공주라고는 하나 돈 한푼 없을라고.

“…이대로, 떠나란 말인가?”

“그럼 뭐 동창에 가서 행선지 보고하고 떠나든지.”

“그런말이 아니라….”

“아니면 진짜 그냥 여기 묻어줘? 쥐도 새도 모르게?”

“….”

아, 뭐. 왜. 말을 해 말을.

“오라버니.”

“하아….”

한숨을 푹 쉬었다. 여의… 라고 할 만큼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할매콜렉션이 늘어나는 것 만큼은 정말 내 뜻대로 안된다. 대체 몇 명이야 이게. 공중수레까지 타면 진짜 플라잉 노인정이다.

“니들 맘대로 해라….”

여기서 하나 더 늘어난들. 기어이 안 들어가고 옆에서 추임새를 넣는 연이에게 또 그냥 못이기는 척 넘어갔다. 까짓거. 여자야 많으면 좋지. 이제 나도 모르겠다. 어차피 애초에 맛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수차례 되뇌이지 않았던가.

“들어가요 공주마마.”

“마마는 되었네. 주 소저… 허 참. 주 소저로 족하이.”

“호칭이야 아무려면 어때요.”

야 솔직히 생긴건 그렇다고 치고 그 나이에 그 말투로 소저는 니미…. 양심 어디? 둘이서 웃기지도 않는 대화를 나누는걸 보며 토굴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대충 끝난건가?”

남은건 무림맹애들이랑 이야기 해서 치매 노인들 약 배포하고, 엑소더스다. 세외로 가겠다는 생각은 변함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신세계의 신이 된다거나 뭐 그런식으루다가 전 무림의 새로운 리더로 우뚝 설 생각같은건 없다. 이야기 했던대로 딱 그냥 내년 봄에 산해관에서 동창이랑 빠이빠이하고 나서는 우리 할망구들 데리고 내 갈길 가야지.

“고생하셨어요 삼랑.”

“고생은 니들이 했지.”

“그래두요….”

한 번 이러기 시작하면 말이 길어진다. 극구 나한테 받은게 더 많고, 나한테 더 고맙다고 우겨야만 속이 시원한것 같아서. 화란이에게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려 주고는 토굴 한 복판에 크게 펼쳐놓은 이불 위로 몸을 던졌다.

“옷 벗으세요.”

“물을 좀 덥혀 올까요?”

“아, 사냥을 좀 해 올걸 그랬나봐요. 주선언니.”

“그럴까요?”

어우 정신 사나워. 오로지 누워있는 나를 위해 얼굴만 봐도 흐뭇해지는 여자들이 부산을 떠는게 뿌듯하긴 하지만 이제 인원이 늘어나서 그런지 부담이 좀 느껴지는 분위기다. 먹여살…리는건 자기들이 알아서 할텐데 밤이 큰일이구만. 연이 화란이 린이 서령이 자윤이 주선이 지수까지…. 여긴 일주일 단위로 굴러가는 시대가 아니지만. 일주일 단위면 뭐 할만 하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지수랑 뭐 이야기 할 거 있는거 아니었어?”

“아니? 꿩이나 몇 마리 잡아왔지.”

그 사이에 잘도 잡아온다. 연이 경지면 뭐 눈에 보이는 순간 끔살이지. 안보여도 기감으로 짐승들 쯤이야. 밖에서 지수를 잡고 교육이라도 시키는 줄 알았는데 연이도 지수도 금방 들어왔다.

“자, 연이도 들어왔으니까 다들 앉아봐.”

“응. 오라버니.”

“네, 삼랑.”

연이를 필두로 다들 내 시야에 닿는 범위 안에 둘러 앉았다.

“그, 음. 글쎄. 은원이라는게 참…. 제 삼자가 뭐라고 할 내용은 아니긴 한데.”

“제가 이야기 하겠습니다.”

“가만히 있어봐.”

주지수가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주눅이 들어 눈을 굴리고 있다.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주공. 저는 찬성이에요.”

“저도 찬성합니다 문주님.”

“발언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삼이가 좋으면 뭐.”

주지수와 다들 은원으로 얽혀 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물론 상대적으로 서령이는 덜 하지만.

“내가 무슨 소리를 할 줄 알고 다 찬성이야?”

“뻔하잖아? 공주님도 모시고 가자는거 아냐?”

확실히 서령이는 음. 나는 별 자각이 없지만 날 오래 지켜보긴 했으니까 금방 눈치 까는 것 같다.

“그래…. 뭐. 그렇게 됐다. 갈데가 없다네.”

“그래요 그럼. 꿩 이리 주세요.”

“주공. 발 이쪽으로 주세요.”

그냥 그런갑다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다. 거 참.

“야, 그래도 좀 한마디 해라.”

뭔가 괜히 배알이 뒤틀려서 주지수에게 딱밤수준의 기파를 튕겼다. 고운이마가 살짝 흔들리자 손을 뻗어 머리를 매만졌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편하게 해요 지수언니.”

“주공의 여자가 된 것을 환영합니다. 왠지 뿌듯하네요.”

아니 자윤이 너는 직접적으로 독도 얻어먹었으면서 그런 반응을 하면 안 되는거 아니냐?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가 되자 주지수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린다. 왜 갑자기 즙을 짜? 그런 지수를 보며 연이가 가까이 다가앉아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래요, 이제 그냥 우리 다 털어버리고 새로 살아요. 기왕에 젊어지기도 했잖아요?”

“네…. 네.”

연이도 화란이도 린이도 자윤이도 주선이도 너나 할 것 없이 급 눈물바다다. 서령이는 왠지모를 따뜻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고. 어. 좀 있으면 아주 끌어안고 대화합의 스크럼을 짜겠는데. 어? 흑막이잖아? 막말로 수십년간 서로 엿 먹이고 먹었던 사람이잖아?

심정적으로 이해는 한다. 여성 특유의 막공감이 형성되고, 이제 뭐 더 어쩔거 없이 레알 상황 해제인거니까. 심정적으로는…. 아니 심정적으로도 이해 못하겠다. 악역이고 그러면 막 쳐 죽이고 서로 멱살잡이하고 그래야 되는거 아냐? 아 그래 님도 힘드셨겠네요, 네 님두요. 이걸로 진짜 정리가 된다고?

“아, 금제는 제대로 풀어드릴게요. 불편했죠?”

점입가경이다. 뭘 믿고? 연이는 눈가를 따라 흘러내린 눈물을 옷 소매로 찍어내고 진짜 금제를 풀어버렸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연이를 쏘아보자 연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슨 의미냐 그거?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던

“대인. 대인께서 못 미더우시면 무공을 폐하셔도 좋습니다.”

“대 뭐?”

따거도아니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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