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무림치매대응반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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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요기도 했고, 주지수가 있어서 대놓고 판을 벌리기는 힘들었지만, 간만에 느긋한 분위기에서 연이의 말랑한 다리를 베고 누워서 노닥거렸다. 주지수가 힐끔거리기는 했어도 지가 어쩔거야 쳐다보면.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밖이 어두워 지고 나서 나설 준비를 했다.
“철저하게 감시해.”
“네. 주공.”
“도주하려는 낌새나 뭔가 수를 쓰려는 기색이 보이면 바로 죽여도 무방하다.”
“오라버니 아무리 그래도 사람 앞에서….”
“본인도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알겠냐 노평공주?”
“공주는 그만 둬 주시게…. 그리고 지금 이런 지경인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꼭 통수를 맞으면 그런지경인 사람한테 맞더라고. 자윤이가 안에서 감시하고, 서령이는 밖에서 감시해. 알겠지?”
“응! 맡겨둬.”
2인 1조로 감시를 하면 만에하나 뭐가 있어도 괜찮겠지 해서 둘은 남기고 가기로 했다. 협상장에 굳이 우르르 몰려갈 필요도 없고. 자신감을 담은 자윤이와 서령이의 미소를 뒤로하고 토굴을 빠져나왔다.
“가자 얘들아.”
“응. 오라버니.”
“네. 삼랑.”
“예. 주인님.”
어쩌다 보니 토굴을 나오는건 딱 초창기 멤버네. 딱 이렇게 다닐때가 재미 좋았는데. 거리낄것 없이 떡도 치고. 아니 뭐, 그렇다고 서령이나 자윤이, 주선이가 걸리적거린다는 건 아니고.
“주선이는?”
“중간까지 나와 있는 것 같아.”
그리 먼 거리에 짱박힌것도 아니라서 기감을 펼치자 금방 주선이의 기척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습격을 하러 가는것도 아니니 공중수레는 그대로 처박아두고 경공을 펼쳐 주선이를 향해 달렸다. 주선이는 그럴필요가 없다고 말렸는데도, 아까 잠깐 들어와서 요기만 하고 다시 밖에서 감시 중이었다.
“문주님!”
“별다른 특이한 낌새는 없지?”
“네. 별도로 준비하고 있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상관없는데, 혹시나 쟤들이 별거 아닌걸로 죽자고 달려들면 우리 애들도 다칠 수 있으니까. 그건 좀 조심해야지. 혹시 뭐 독이라거나…. 시간이 있으면 뭐 너끈히 다 해결할 수 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 혹시 몸이라도 상하면 짜증나니까.
“좋아. 약속한 시간이 가까운것 같으니까 바로 움직이자. 앞장서.”
“네 문주님.”
주선이는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서 준의군민부 동창지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따라붙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보니 웃는 낯이다.
“뭐가 그렇게 좋아?”
“음…. 처음 여기를 칠때도 바짝 긴장하고 갔었지만, 지금은 손님으로 가는 입장이니까요.”
“그런가?”
“아무래도, 저희는 동창에 비하면 절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이었는데. 지금은 저희한테 함부로 못하잖아요? 그냥 그게 좀 신기해서요.”
뭐…. 쫓기다가 식솔들도 많이 잃었을테고…. 그러고 보면 그때 정송을 잡으면서 복수는 한 셈인가?
“아, 저기 마중을 나와 있네요.”
“예의바르군.”
“그럴 수 밖에. 안 그러면 피곤해질테니까.”
연이가 피식 웃으며 동창 건물 앞쪽에 내려섰다. 주선이, 화란이, 린이. 끝으로 나 까지. 좋아. 이상없다. 인원이 늘어나니까 어딜 가기만 하면 인원파악을 하는게 버릇이 되었다.
“해동장씨의문 일행이신지요?”
“그렇소. 해동장씨의문의 장 구요.”
젊은 환관이다. 젊다기 보다는 앳된 느낌까지 있다. 길게 읍을 하며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기에 포권을 하며 마주 고개를 숙여주었다. 예의를 차려주면 서로 좋은거지.
“안으로 드시지요. 태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요.”
나는 이름을 깠는데, 환관은 아무말 없이 그냥 뒤로 돌아서 안내를 시작했다. 뭐, 윗사람이랑 직접 이야기 하라는건가. 한 번 쭉 스캔을 해 보니 몸에 가진 기운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흠. 괜히 저번에 내가 직접 손을 써서 죽였던 그 젊은 환관이 떠올라서 기분이 좀 안좋아졌다.
[괜찮아?]
[응? 뭐가?]
[아니, 표정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괜찮아. 걱정하지마.]
연이가 걷는중에 다가와 손을 잡으며 전음으로 속삭였다. 표정에서 티가났나보다. 흠.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태감 정송을 잡아왔던 바로 그 방. 그 안에서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한 환관이 한 명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흔들리는 촛불이 그의 얼굴을 좀 더 기괴해 보이게 만든다.
“…어서오시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딱히 환대를 하고 있지는 않소.”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목소리도 카랑카랑하다.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서로 안부를 나눌 처지는 아닌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래….”
“그 전에. 사과부터 먼저 하고 싶소.”
“허, 사과라….”
딱히 사과의 표시로 뭘 줄것도 아니고, 내가 굽히고 들어갈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좀 찜찜했다. 알량한 자기위안이라고 해도 좋고…. 뭐…. 잘 모르겠다.
“특이한 인물이로군. 좋소. 뭐가 바뀌는것은 없겠지만 받은걸로 하지.”
“가급적 동창이나, 조정과는 마찰을 빚고 싶지 않습니다.”
“마찰이라? 어째 말을 하는것이 서로 귀찮을 수 있다는 식이군?”
“그 정도를 자신하지 못하고 어찌 태감을 뵙고자 하겠습니까?”
“허어…. 것 참. 살다보니 별 일을 다 겪는군. 물론, 미리 말했던 대로 황룡을 부릴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내 멱을 따는 것 정도야 여반장일테니 허무맹랑한 소리도 아닐터인데….”
“그렇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고집밖에 남지 않는법이지. 그래서 말인데.”
팟. 하는 느낌. 느낌이다. 소리도 나지 않는다. 태감은 작은 협탁을 두고 마주 앉은 상태로 소매에서 판관필을 꺼내 내 얼굴을 찔렀다. 고개를 옆으로 비틀어 피하고 손등을 올려서 옆으로 쳐냈다.
“…과연, 명불허전이로고.”
“필요하시다면 필요하신 만큼.”
태감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고 앉은 상태로 눈을 피하지 않으며 순식간에 십여합을 나누었다. 태감은 은룡보국신공을 끌어올렸지만 몸 밖으로는 뿜을 수 없도록 금천황룡기를 둘러 억눌렀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데.”
“무얼 말씀이십니까?”
한 손만 쓸 줄 알았는데 나머지 손도 뻗어서 내 명치를 노린다. 나는 탁자를 내려쳐 벼루를 튕겨 올린다음 태감의 손이 출수되는 경로를 막아섰다. 먹물이 튀는걸 바라지는 않았기에 세로로 일어선 벼루에서 먹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운으로 감쌌다.
“자네가 마음만 먹으면….”
“먹으면?”
태감의 손에 들린 비수가 벼루를 때리며 카앙하는 소리가 났다. 분명 먹물을 파고 들었을텐데, 태감의 칼 끝에도 먹물이 묻지 않았다. 그 정도 재주는 있다는 이야기다.
“천하를 오시할 수 있을텐데 말이지.”
“천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정말일까?”
“저는 그런 그릇이 못 됩니다.”
스스로도 이런짓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지 점점 판관필과 비수에 실린 기운이 둔해진다. 그러다 판관필로 비수를 튕겨 올리고 손끝을 튕겨 내 미간을 향해 일직선으로 두 날붙이를 쏘아냈다.
“…굉장하군. 내 어디가서 무공이 처진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다. 일년전만해도 좆밥이었다. 나를 향해 날아들던 판관필과 비수는 내쪽에서 보면 점 하나로 보일 정도로 일렬로 찔러들어왔다. 평범하게 막으면 폼이 좀 안 사니까 그냥 그대로 기운을 뿜어 허공에 못 박힌 듯이 고정시켜버렸다. 태감은 놀란듯 떠 있는 자신의 애병을 붙들고 흔들어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완패로군.”
“손속에 사정을 두신….”
“웃기는 소리 하지 말게. 아무튼 굉장하군. 초식이랄것도 없는 무지렁이 같은데. 신묘한 기운만으로도 이 노구를 제압하다니…. 실로 황상에게 어울리는 무공이군 그래.”
“그런 목적이니까요.”
황위에 오른 후계자가, 딱 그날부터 동창을 비롯한 각종 무림인들에게 기죽는 일 없도록 하려고 만들어진 무공이니까. 천명 어쩌고 하는 이야기도 결국에는 황상이 정말 말 그대로 천자로 인정받았다는 증거겠지.
“확인은 그만하면 되었네. 좋아. 원하는 걸 말해보게.”
“관과 무림의 불가침을 당분간만 유지 해 주십시요.”
“…그건 좀 힘들겠는데.”
“방침정도로 충분합니다.”
한 두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다만 조정과 동창이 나서서 대놓고 반역세력으로 몰고, 토벌을 하는 그런 기조만 아니면 된다. 그것도 당분간.
“패자에 대한 아량이라 생각해도 좋습니다.”
“패자라...?”
“이미 무림은 고사 직전입니다. 아니, 사실 뿌리는 썩어 문드러졌고 땅위에 있는 이파리 정도만 빗물에 적셔지면 숨을 돌리는 수준이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글쎄…. 무림인이라는 족속들이 쓸데없이 끈질기기만 해서 말이지. 한 두번이 아닐세.”
“그건 제가 합의를 이끌겠습니다.”
“자네가 무슨수로?”
“때려눕히다 보면 말을 듣겠지요.”
“과격한 인사로고.”
“동창만 하겠습니까.”
“예끼. 누가 들으면 진짜인줄 알겠네.”
누가 들으면 거짓말인줄 알겠네. 어디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개 구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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