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무림치매대응반 111
* * *
“손수 무림을 주저 앉힌 원흉의 입으로 이런말을 하기는 뭣하네만, 어쩔 수 없네. 시대의 흐름이지.”
원흉이라.
“원흉…이라기는 좀 그렇군. 어쨌거나,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은 세종황제라 생각해도 되나?”
“지금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혹시 아직도 움직이고 있는 배후의 세력이라도 있나 싶어서 물어보는 거라면 없다고 대답해 주지.”
“…그래.”
이야기를 들으면, 지쳤다는 이야기가 조금 이해가 가긴 한다. 세종, 그러니까 가정제 이후에 융경제는 순식간에 죽어나자빠졌고. 지금의 황제가 즉위한지도 한세월이다. 그 긴 시간동안…. 아니, 그렇다고 동정심이 생긴다는건 아니고. 죽일건 죽여야지.
“그렇다고 동창에다 다 떠밀 생각은 아닐세. 이는 분명 황실의 실수이고, 과오지. 마치 나처럼.”
“스스로 과오라는 것은?”
“…제대로 황족대접을 받을 처지는 아니었으니까. 대충 흔한이야기네. 뭘 생각하든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목종황제께서도 관심이 없으셨나?”
“금천황룡공? 관심이야 있으셨네만…. 글쎄. 선황께서는 아바마마의 흔적을 지워내기도 바빴지. 세인들이 모두 알다시피 주색에 취해 요절하지 않았나.”
자세한 언급이 없더라도 대충 짐작해 보면 가정제가 날뛰다가 죽고나서 동창은 동창대로 지들 이권이 달렸으니까 알아서 무림을 좀먹어가고, 융경제는 별 관심없이 선대의 막장짓을 지워내다가 6년만에 급사. 이후는 막장의 극을 달리는 조선의 은인 만력제코스니까 금천황룡인지 황룡금천인지 관심도 없을거고. 동창으로 부터 몸을 숨겨야 할 정도로…. 흐음.
“다리를 좀 놔줄 수 있나?”
“어디랑 말인가?”
“동창쪽하고.”
“글쎄, 말을 하면 반응이야 하겠지만, 호의적일 것이라고는…. 그리고 어차피 뭘 제시하더라도 동창놈들은 안 들어먹을거라니까.”
“그건 공주님의 말씀이 맞는것 같아 오라버니.”
“하. 홀랑 벗겨서 매달아 놓고서는 공주님이라니. 어처구니가 없군.”
“네가 공주인건 사실이니까.”
“어쨌든, 연결이라면 해 줄 수 있다. 그래도 기왕이면 나를 동창에 넘기기보다는 일이 끝나고 직접 마무리 해 주면 좋겠군.”
“하는거 봐서.”
“박정하기도 하네. 그래도 몸까지 섞었는데. 그래서, 동창에는 뭘 제시할 생각이지?”
어차피 그냥 불러내봐야 동창이 응하지는 않을거다. 이쪽의 카드도 내밀어야 협상테이블에 앉을 수 있겠지.
“무림의 이권. 원한다면 주지. 사람이 죽는 것 정도만 막을 생각이다.”
“그 이권이 제 것인것 마냥 이야기 하는군?”
“어차피, 동창이든 군부든, 무림인에게 큰 원한이 있는것도 아니잖아? 정치적으로 반드시 모두 숙청해야 한다거나. 여기서 물러나 세외든 어디든 갈테니 서로 좋게 좋게 가자는거지.”
좋게 좋게. 결국 노평공주를 만나서 협상하려던 것도 그거였다. 노평공주가 정소소였던 덕분에 뭔가 일이 돌아돌아 온 느낌이지만, 일단은 그래. 동창과 접촉할 수 있으면 된다. 지금 사천의 무림이래봐야 어차피 오합지졸이다. 나나, 내 여자들의 무력과 각 문파를 실질적으로 점령할 수 있는 만복회의 협조가 있으면 충분히 다 장악할 수 있다.
“좋게 좋게라…. 그렇게 물렁한 사람들이 아닐텐데….”
“너한테 뭘 더 요구할 것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냥 이번 사태를 뒤로 무를 수 있는 사람과 자리만 주선해라.”
“이렇게 묶인 상태이니, 거부할 수 없겠군.”
“그 부분만 해결된다면 자유롭게 놓아주지.”
그…. 흠. 대놓고 이야기하기는 뭣하지만, 지수에게 더 위해를 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첫째로는 그때 그 동창 소속의 환관을 죽였을때의 더러운 기분. 이게 그, 천명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는지 혹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둘째로는 뭔가 쌤쌤이라는 느낌. 소소, 그러니까 지수는 나한테 독을 탔고 죽일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미수로 끝났다. 죽일뻔 한거지. 그리고 나도 분명 죽여놓겠다는 살의를 담아서 지수의 목을 졸랐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손끝과 온몸에 느껴지던 한 사람의 생이 꺼져 가던 그 느낌으로, 솔직히 자윤이가 뛰어들어오기 전 잠깐동안은 지수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만, 맥이 빠졌다고 해야할지…. 주지수에게 뭔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 너희들은 어때?”
“응?”
“네?”
“제 입으로도 원흉이라고 하고 있잖아? 어떻게 보면 너희들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데. 자윤이는 어떻게 보면이 아니라 정말 직접적으로 하독을 했던 것 같고.”
“…그렇긴 합니다. 주공.”
“나는 별 상관없는거 아냐?”
서령이가 내 옆으로 다가와 허리에 팔을 두른다.
“아니지, 쟤가 아니었으면 적당히 고향에 돌아가서 너하고 혼례를 올렸겠지. 그 평화를 깨부순거라고?”
“아하. 그럼 나도 권리가 있는거네.”
정말로, 소소가 없었다면 연이가 반로환동을 했더라도 나랑 조용히 해남으로 떠났을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이 평지풍파에 몸을 던진것도 누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그 불안감과 걱정때문이었으니까.
“듣자하니, 자업자득이라 누굴 타박하지도 못하겠군.”
“그 말 그대로. 니가 거기 매달려있는건 누구의 탓도 아니야.”
쓴웃음을 짓는 주지수를 보다가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다들 나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 아니 왜?
“뭐, 복수를 한다거나, 아프게 해 주겠다거나. 그런거 없어?”
“글쎄요…. 뭔가 애매해 졌네요.”
린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씁쓸하게 웃는다.
“니들이 죽여야 성이 풀리겠다고 하더라도 나는 상관 안할거야.”
“그게…으음…. 이거 너무 뜬금없이 마주친 상황이라…. 그치?”
“좀 그렇긴 하죠….”
“김이 샌다고 해야하나….”
다들 그 빌어먹을놈의 노망독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런데 참 사람이라는게, 그 당시에 겪을때는 이게 독이라는걸 몰랐으니까, 그냥 하늘이 원망스럽고 나이 들어서 노망이 난 팔자가 원망스럽지 누군가를 특정해서 미워할 대상이 없었던 거다. 거기다 가까운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스스로도 자신감을 잃고. 생의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훌훌 털어 버렸던 상황이라서…. 어찌보면 득도한 사람들 같은 느낌이 된거지.
연이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이걸 꼭 뭐 복수를 해서 오체분시를 해버려야겠다는 강력한 원한 보다는, 내가 그런 위협에 대해서 걱정을 하니까 슬렁슬렁 추적한 상황이다. 애초에 우리가 복수만을 위해서 움직일 것 같았으면 타겟이 특정이 되거나 말거나 눈이 벌개져서 여기저기 일단 의심이 되면 다 깨부시고 봤겠지. 솔직히 그게 가능한 전력이었고. 이리저리 핑계를 갖다 붙이긴 했지만 나도 얘들도 사람썰기 싫어서, 늘그막에 젊음도 다시 찾고 했는데 거기에만 매달리고 싶지도 않거니와 가급적이면 이거때문에 불행한 사람들도 겸사겸사 치료하고….
“왜 갑자기 잡아와서는….”
“아니 나라고 거기서 갑자기 소소가 튀어나오고, 소소가 노평공주일줄 알았나 뭐….”
또 웃긴게 내가 어렴풋이 느끼는 천명이라는게 뭐 동창을 다 처죽여라, 황실을 뒤집어 엎어라 이런것도 아니고. 무림을 조용히 역사에서 퇴장시키는 뭐 그런 방향성이다 보니까 여러모로 존나게 애매한 상황이 벌어져 버린거다. 내가 성격이라도 불같아서 불도저처럼 다 걷어 치우고 돌진하는 그런 성향의 리더라면 또 모르겠는데 그런것도 아니니….
“일단 저기, 저 사람 줄이라도 좀 풀어주죠? 내가 다 어깨가 아프네.”
“그, 그럴까?”
서령이의 의견에 화란이와 주선이가 나서서 줄을 끊고 바닥에 내렸다. 주지수는 갑자기 뒤집어진 분위기에 적응이 안되는지 눈만 껌뻑거리고 있다. 너도 이해 불가지? 나도 그래. 근데 또 생각해보면 그렇다. 동창하고도 좋은게 좋은걸로 넘어갈 생각인데…. 막상 또 이제 아무것도 없는 주지수랑 적당히 풀고 못 넘어갈 것은 뭔가…. 같은 분위기가 된거지.
사람이 나이가 들다보면 그렇다. 철천지 원수같은 인간이라도 부고를 들으면 가서 육개장이라도 한 술 뜨고 와야되나 싶기도 하고. 따지자면 지금 일행의 구성에 천마신녀인 자윤이가 껴 있는것도 남들이 보기에는 말이 안되는거지. 주지수도 처음에 자윤이를 봤을때는 마졸이라고 기겁을 했으니까. 팽팽한 거죽들을 덮어쓰고 내 앞에서야 어린애처럼 아양들을 떨고 계시지만 서령이빼고 제일 어린게 무영신투일 정도로 연령대가 높으니 잠깐 정신줄을 놓으면 동네 할머니들 모인 양로원 분위기로 가버린다.
“담요라도 좀 갖고와야겠네요.”
“세상에 내공이 한톨도 안 남았네.”
“주공께서 제압했을 때 부터 이랬어요.”
“어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때 잡아왔던 태감이랑 대우가 너무 다른거 아니냐 니네. 물론 그때는 내가 위기감에 쫓기고 막 사천 무림의 말살계획에 흥분해서 분위기가 안 좋았던것도 있지만….제대로 공감한번 받지 못하고 이슬처럼 사라진 환관에게 아주 쪼금만 애도를 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