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무림치매대응반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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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이.”
“그거야 뭐….”
이상하기로 따지자면 내가 여기 와 있는것 부터 시작해서 무림인이란 인종들이 하늘을 펄펄 날아 다니며 돌을 썰어대는 것도 마찬가지. 여기서 이십년 가까이를 살았지만 아직도 하루하루가 새롭다.
“말하자면, 이 명이라는 천명을 받든 황가의 힘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그 천명이라는게 뭐냐는 말입니다….”
“글쎄. 잘 모르겠다니까. 받은놈이 아는거라고.”
아니 저기, 좋은 술 잡숫고 지금 주사 부리십니까. 아까 했던 이야기 또 하고 계시는데요.
“무공, 도술, 진법, 마공…. 뭐 이런것들이 그렇다. 따지자면 이는 인간의 힘이다. 인간이 자연을 모방하고 또 노력해서 얻은 힘이지. 하지만 천명이라는건 말이다…. 어떤 신적인 힘인거야. 그렇게 밖에 볼 수가 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인간의 힘을 싹 지워낸다는게 말이 안되는 이야기거든.”
“그러니까 이게 신적인 존재로부터 유래된 무공이다?”
“흐. 말이 무공이지. 그걸 무공이라고 할 수가 있나. 너 그거 수련한다고 뭐가 딱히 나아지든?”
“뭐, 기운을 다루는 기술이나 숙련도 정도는….”
그러네? 따지고 보면 내가 서령이 무공익히는 것 처럼 뭔가를 노력해서 경지를 올린적은 없었던 것 같네.
“그런거야. 천명이 너한테 닿아 있으니 그렇게 된게다. 아무튼 다시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서. 네놈의 천명이 대명의 천명과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다마는, 당금의 황상이 오뉴월 개부랄처럼 늘어진 꼴과 똑 닮았다.”
“…황상하고요?”
“그래. 아주 똑같아.”
“흐으음….”
“허면 의선께서는 장 문주가 황실의 자손이라고 보시는…?”
“…그건 확실히 아니지?”
“확실히 아닙니다.”
해남에 계시는 아버지와 형님들, 나까지 딱 세워놓고 보면 이건 진짜 빼도박도 못한다. 생물학적으로 우리 아버지 자식이 맞다.
“흐으음…. 조금 생각을 해 보기는 해야겠다마는….”
어, 갑자기 기감의 한 구석탱이에 익숙하고도 거대한 기운이 훅 들어왔다. 내 쪽을 향해서 급속도로 다가온 기운이….
“오라버니!”
후루룩 하고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내 옆에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깜짝이야. 얘들을 제대로 감시하고 있으려면 기감을 좀 더 넓게 펼쳐놓고 있어야겠네. 오늘 좀 답답해서 나서기는 했어도 딱히 얘들 앞에서 사라진다거나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기때문에 기척을 숨기고 그러진 않았다. 애초에 그럴거면 나올 때 부터 연이 모르게 나왔겠지.
“어, 왔어?”
“으응…. 화란이가 오라버니 어디 갈 것 같다고….”
윤성이가 호들갑을 떨었나보다. 아 거. 금제까지 풀어 줬으면 그냥 지 갈길 갈 것이지.
“허허어…. 이것 참…. 연이 아니냐?”
“...의선?”
“뒤는 어디다가 잘라먹었을고. 내 살다 보니 참 못볼꼴을 많이 보는구나.”
“아니, 의선이 왜 오라버니하고 같이 있어요?”
“어흠…. 우연히 만났네.”
“운중개 어르신도 계셨네요?”
“커흠. 죽었다더니….”
연이는 면사도 빼놓고 왔다. 워낙에 눈이 가는 면사인데다, 이 두 사람이면 경지도 상당할테니 의외로 간단하게 알아 본 모양이다. 그러고 나니 남은것은 갈곳없는 민망함…. 나라도 옛날에 알던 사람이 적어도 50살은 어린 애인한테 앵앵거리고 있으면 그거 눈뜨고 보기 괴롭지 않을까.
“…길에서 이야기 하실 내용은 아닌 것 같으니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혹시 뭐 다른 일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무림첩을 보고 당가로 갈 생각은 했네만, 자네들쪽이 훨씬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것 같구만.”
“그리하시지요 의선. 저, 여기 이거 남은것좀 싸 주게!”
과연 개방. 남은 음식도 잊지 않고 싸 달라고 챙겼다. 병을 흔들어 보니 바닥에 조금 남아 있는 술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서 그대로 병을 거꾸로 물고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아니 그거를!”
“얼마 안남았는데요 뭐.”
나중에 윤성이한테 부탁하면 두어병 더 얻을 수 있겠지.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일단 집으로 가야겠다.
“가자 연아.”
“어…. 어?”
“가자고.”
“으으응….”
“살다살다 천하의 제일매화가 남자앞에서 눈까는 꼴을 다 보네.”
“의선!”
“앞장이나 서거라.”
좀 신기한 느낌이다. 무림맹 남경지부의 시설에서 종리혜를 본 것 외에 연이의 과거와 연관된 다른 사람을 본 건 처음이라서 그런지. 화란이나 린이와는 또 상황이 달라서 연이가 혼란스러워 하는 느낌이었다. 연이가 앞장서서 몸을 튕기고 나와 의선, 운중개까지 함께 몸을 날려 집으로 돌아갔다.
“삼랑!”
“주인님.”
“삼아.”
“주공!”
“문주님!”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여러개도 아니고. 왜 주선이까지 껴서 호들갑인지.
“허허! 복마전이 따로있을까!”
그렇지. 여기가 복마전이지. 여기가.
“저놈 눈깔이 슬슬 거무죽죽해지는걸 보면, 상태가 심각하구나. 여보게 제일매화.”
“에…예?”
“언제부터 저 지경이었어?”
“뭐가요?”
“자네 바깥양반.”
“바깥양반은 아닌….”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저놈 저거 언제부터 저랬냐니까?”
“여기 와서부터, 그랬어요.”
마당에 내려서자 마자 뛰쳐나온 내 여자들에게 둘러져서 옴쭉달싹도 못하고 있다. 거기다 연이와 의선이 뭐라고 자꾸 날 가리키면서 구시렁거려대고. 아우 정신사나워.
“들어들 가서 이야기 합시다….”
“저 봐라 저….”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맑고…. 오늘 대체 날씨 생각을 몇 번이나 하는거지. 나는 내 주변을 가로막고 있는 내 여자들을 손으로 슬쩍 밀쳐서 구멍을 내고 본채 안으로 들어갔다. 어후. 귀 쨍그러워.
“언제부터 그랬냐?”
“뭐가요?”
“만사가 귀찮고 다 때려치고 싶어진거 말이야.”
“딱히 잘 생각은 안나네요.”
본채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으니 서령이와 자윤이가 달려가서 차를 준비한다 어쩐다 부산을 떨었다. 의선과 운중개도 따라 들어와서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연이와 화란이, 린이, 주선이는 내 뒤에 시립하듯이 둘러 서고. 안 봐도 알 수 있다. 다들 얼굴에 걱정을 한 바가지씩 달고 있겠지.
“지금 황상이 태정중이라는건 말 했으니까 알테고.”
“예…. 뭐 들어서 압니다.”
들어서 안다기 보다는 전생의 기억으로 알고 있는거지. 만력태정(????)이야 워낙에 유명하니까. 여기와서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황실쪽에 별 관심도 없었다. 시기적으로 물건너 조선에서 왜란이 한창인걸 알았어도 거길 건너가서 뭘 어떻게 해 보겠다거나 그럴 생각도 없었고.
“너, 여기 사람 아니구나?”
“예…뭐. 저기 해남출신….”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고. 여기 와서 쭉 붙어 있으면서 보니까 알겠어. 너 여기놈 아니지.”
“무슨…. 말씀이신지.”
“냄새가 달라. 다른놈이 차고 앉았어.”
고향이야기가 아니면, 그 쪽의 이야기인걸까?
“의선. 내가 세인들에게 그래도 신선이라 불리는 사람일세. 깜빡 정신을 놓으면 우화등선할뻔도 하지. 눈 앞에 두고도 못 알아 볼 것 같은가?”
“아깐 못 알아 보신거 아닙니까?”
“…거기는 저자라서 너무 혼잡하지 않나.”
“아, 예 뭐. 그렇다고 치시죠.”
신선치고는 센서가 많이 둔하신거 아닌가 그러면.
“한 번 이야기 해 보게.”
“…여기서요?”
“어차피 자네 사람들 아닌가? 여기 거지놈은 신경쓰지 말게.”
“거 사람 참. 말 하는거 하고는…. 불편하면 나는 좀 나가 있겠네.”
의선이야 천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 줘야 하고. 나머진 다 내 여자들이니 운중개 영감 혼자 뻘쭘한 모양이었다. 불편하면 나가 있겠다고 말 해 놓고서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냥 나가버렸다.
“그냥 계셔도 되는데….”
“본인이 불편하면 나가 있는거지. 하여간 편하게 이야기를 좀 해 보려무나.”
“아…. 예.”
이걸 어디서부터 이야기 해야 하나. 그 냄새라는걸로 어디까지 알 수 있는건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건지.
“마음 편하게 먹고 이야기 좀 해봐.”
“글쎄요….”
“허어…. 참 답답한 인사로구만.”
“오라버니, 불편하면 우리도 나가있을까?”
“어…어? 아니. 아니, 뭐. 그런건 아닌데….”
“오라버니 여기와서 이상한건 계속 내가 이야기 했지만, 모르겠어. 옆에 있는 나도…응. 한다고 열심히 해 봤는데.”
“그 열심이 나한테 여자 붙여주는거고?”
“허허어…. 여자도 붙여 줬다?”
“그럽디다.”
“악수를 뒀구만 에잉….”
“악수요?”
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선에게 물어본다. 악수라.
“그건 하여간 중요한게 아니니까 조금 있다가 다시 이야기 하고. 나 지금 등선하기 직전이니까 빨리 이야기 해.”
“저는….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 몸이 다섯살때쯤. 이 몸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러면 원래 어디 있었단 말인가?”
“제가 있던 곳은…. 여기서부터….”
지금으로부터 약 420년쯤 뒤의…. 뒤의….
“….”
“말을 하게!”
“어…으….”
이 씨발. 말이 안나오네. 뭐야 이거. 왜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