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무림치매대응반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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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좀 가 볼까 하다가 그럴 생각도 없어진다. 그냥 술병을 들고 멍하니 관도에 서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다가. 술병이 툭 걸린다.
“어어. 잘 보고 다녀요.”
“아, 미안합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여기 잘 묻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하나하나 낯설다. 여기와서 이십년 가량 살았는데 여전히 내 사고방식도 기억도 예전 그대로 머물러있는것 같다. 이걸 어떻게든 해 보려고 노력은 했는데…. 그랬는데. 다 부질없는 것 같기도 하고. 술병을 들어 한 모금 입으로 넘겼다.
“크으으으….”
어우야 절로 입에서 쓴 소리가 터진다. 아까 엄청 작은 잔으로 마셨었는데 그걸 생각 못하고 벌컥 들이켜버렸다. 여기 있으면 더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걸음을 옮기고 싶지만. 발이 땅바닥에 들러 붙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다. 으. 속쓰려.
“어이, 거기 젊은놈.”
누가 길바닥에서 시비라도 붙는건가 싶어서 돌아봤다. 뭐지? 길바닥에는 아무도 없는데.
“지금 돌아보고 있는 젊은놈 거기 너 말하는거다.”
“...예?”
이제 찾았다. 길가에 펼쳐진 노점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 하나와 푹 썩은 얼굴을 한 거지 하나가 탁자에 앉아 있었다. 뭐지?
“거, 멍하니 서서 좋은 술 다 날려 보낼거면 이리로 가져오너라.”
“…예?”
“그러고 있을거면 뚜껑이라도 닫아 이놈아! 향만 폴폴 풍기지 말고!”
“아, 예에….”
일단은 뚜껑을 닫았다. 거 누구신데 처음 보는 사람을 이놈 저놈. 어. 내가 연이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는데.
“어디 갈 데 있으면 가고! 없으면 이리와서 앉거라. 내 향을 맡아 보니 저자에 서서 맨속으로 마시기는 술이 아깝구나야.”
“어허, 처음 보는 아해인데….”
오히려 옆에 있는 거지꼴 할아버지가 말이 점잖다. 일단은 딱히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고. 딱 보기에도 어르신들 생긴게 범상치 않아서 터덜터덜 걸어가 옆으로 길게 빠진 나무 의자에 앉았다.
“오호라…. 여기까지 오니 병 주둥이에 묻은 것 만으로도 향이 진동을 하는구나. 어디 한 번 까 보자.”
“근데 대관절 노인장은….”
“통성명은 무슨. 일단 술이나 한 잔 하고 이야기 하자.”
“어흠. 거 참…. 미안허이. 나는 개방에서 온 운중개라 하고 여기 이 주책맞은 노인네는 대충 강호 동도들에게 의선이라고 불리고 있는 분일세.”
“분은 무슨! 어차피 거지 너도 속으로 내 욕하지 않느냐.”
“그래도 거, 무림의 존장이라는 양반이….”
“존장은 얼어죽을. 얼른 술이나 따라 봐!”
영감님 승질머리 불같네. 생긴건 선풍도골이라 점잖게 보이는 양반이…. 어차피 너무 독해서 내 혼자 다 먹기도 힘든 술. 그냥 뚜껑을 열었다. 탁자 위에는 잘 구워진 꿩이 한 마리 있고, 적당히 술 냄새가 나는 황주가 올라와 있었다. 이런 술하고는 비교불가지. 술 맛 아시네.
“자 노인장. 한 잔 받으시오.”
“의선을 먼저 드리시게.”
“점잖은 양반 먼저 드리는게 낫지요.”
“어흠. 젊은 친구가 뭘 좀 아는구만.”
두 사람의 사이는 딱히 상하 관계는 아닌듯 했다.
“허허…. 이거 향이.”
“감질 나서 안되겠구나. 어서 나도 한 잔 주거라.”
“옛소.”
“이놈 저놈 했다고 뿔이라도 났느냐?”
대충 따라줬다. 알아서 드시라지. 나는 나대로 탁자위에 있던 주발을 하나 엎어서 거기다 약주를 따르고 꿩 다리 하나를 붙들었다.
“어허, 젊은친구, 다리는!”
“안됍니까? 향기 맡으셨으면 아실텐데.”
잠깐의 대치. 그러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향을 맡고 넘어갈 수가 없다.
“…좋네. 마음껏 들게.”
“끄응…. 하나 더 시키세.”
“의선께서 내십니까?”
“자네는…거지지. 내 깜빡했군.”
더 시킬 돈도 없나보다. 그건 뭐 안주가 떨어지면 생각해야지. 나는 신경을 끄고 다리를 부욱 뜯어 손에 들었다.
“자 이것도 인연인데 한 잔 하시죠.”
“소형제 덕분에 귀한 술을 하게 되었구만!”
“흠…. 뭐 좋은 술이 있으니 다른건 넘어 가세. 자!”
안넘어가면 어쩔건데. 영 불만스러운 표정의 의선과 함께 잔을 마주하고 쭉 털어 넣었다. 그리고 나서는 껍질이 바삭하게 익은 꿩 허벅지를 한 입 가득 깨물었다. 으음…. 천상의 맛이다. 노점의 꿩 구이래봐야 별 것 있나 싶지만, 입에 쩍쩍 들러붙는다. 입 안에 남은 약재향을 묵직한 기름기로 덮으며 술의 단 맛 만을 남기고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으으음….”
“좋네.”
“음. 좋군.”
우리는 서로 눈빛을 주고 받으며 이 끝내주는 낮술판이 최고임에 동의했다. 크. 이게 섹스지 씨펄. 앞에 앉은 티꺼운 의선 노친네도 왠지 친근해 보인다. 나는 주저 없이 병을 들어 두 노친네의 잔을 채우고 다시 내 잔에다가 술을 따랐다.
“헌데, 자네…. 이름이 뭔가?”
“장구입니다.”
이러다 내 이름이 짱구가 되겠다.
“그래? 흐으음…. 해동사람 같진 않은데?”
“왜 그러시오 의선? 혹시 소형제와 면식이 있습니까?”
의선이라고 하는걸 보니 당가에서 뿌린 무림첩을 확인했을 수도 있고…. 그럼 해동장씨의문 장구라는 이름을 들어 본 모양이지.
“어디 출신이신가?”
“해남…출신입니다만?”
꼴랑 꿩 다리 하나에 호구조사는 무슨….
“의선. 거 그러지 말고. 소형제 기분 상할라. 자. 자. 쭉 들이킵시다. 보아하니 병이 작아 몇 잔 나오지도 않겠구만.”
“흐으으음…. 주(?)씨가 아니고 장씨라…. 틀림없나?”
“주…씨요?”
주씨라니.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뭐지? 좋은 술 잘 마시고는 왜 지랄이신지. 운중개 영감도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너스레를 떨며 의선을 타박한다.
“그거 한 잔 마시고 취한거요?”
“취하기는.”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내 앞에 놓인 잔을 쭉 들이키고 손에 남은 꿩 다리를 다시 뜯었다. 아. 이거 기가 맥히네.
“상관이 있지. 있고말고. 천명을 받은놈이 눈 앞에 있는데. 그놈이 주씨가 아니라 장씨라니?”
“천명이라니요?”
“네놈이, 이 노망을 치료하겠다고 온 동네에 들쑤시고 다닌 놈이렸다?”
“아하, 장구라면 소형제가 바로 해동 장씨의문의 문주시로구만? 일문의 문주를 소형제 소형제 해 댔으니 이거 원.”
뭔 씨. 길가다 마주친 노친네가 관계자라고? 아무리 사천 성도에 무림인이 절반이라지만.
“눈 그렇게 뜨지 마라. 장구라는 이름이 좀 유명해야지.”
“그렇습니까?”
“흐음…. 내가 몇 살 같아 보이냐?”
“한 칠순은 족히 되어 보이십니다만….”
“허어! 허허허허허!”
“하, 이 친구. 혀에 꿀을 바른거 같구만 그래. 의선 요새 뭐 좋은거 드십니까?”
“음? 이야…. 내가 칠순이면 어? 나 아직 괜찮네 그래.”
이 시대에 칠순보다 나이가 많으면 몇살이라는 거야? 칠순이라니까 되게 좋아하네.
“내가 백이 넘고서는 나이를 세지 않았네. 아무튼, 그러다보니 보이는게 있어. 인위적이란 말이지.”
“그럼, 의선씩이나 되시는 분이 어떻게 좀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부끄럽네만 손을 쓸 수 없었네. 왜 그런지 감도 못 잡았었거든.”
한숨을 푸욱 내 쉬고는 손에 든 잔을 들이킨다. 앗따 술 잘 넘어간다. 하기사 동창놈들 길게 길게 음흉하게 움직였으니 의선이 아무리 날고 기었어도 알아보기 힘들었겠지. 하긴, 우리쪽도 나랑 연이가 같이 모여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면 치료법은 생각도 못했을거다.
“자네들쪽에서 무림첩을 돌리기 전에는 도통…. 인위적인 무언가가 적용되어 있다고 촉은 오는데…. 하여간 그걸 떡하니 해동장씨의문이라는 곳에서 해결을 했다고 하니…. 장구라는 이름이 유명해질 수 밖에. 유명하지 않아도 나 한테는 말이지.”
“이 영감이 의선이라고 거창하게 달고는 있어도. 매양 무의촌으로만 돌아다니는 통에 그런걸 또 연구할 시간이 없었단 말이지….”
“예 그러셨군요.”
뭐, 그거야 좋다. 어차피 치료약은 다 나왔고. 치료법도 시중에 다 갖다 풀었다. 무림첩에도 아마 그거 다 공유해 줄테니까 오라고 적어놨다.
“당가쪽에 가시면 치료약도 주고, 치료법도 알려 줄 겁니다.”
“그것도 중요하긴 한데, 지금은 네놈이 더 문제군.”
“예?”
“당금의 황상이…. 왜 저모양인줄 알고 있나?”
갑자기 여기서 황상이? 이야기가 두서가 없어도 너무 없는데.
“네놈이 몸에 두르고 있는 그거. 그거 말이야.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 없나? 아, 그 전에 그게 뭔지는 알고 있나?”
“이미 알고 계시는 듯 하니…. 황상에서 황상으로 이어지는 무공이라고 들었습니다.”
“허어? 그럼 소형제가, 아니 문주께서 황실의…?”
“주씨가 아니라지 않는가!”
날씨는 맑고, 바람은 좋고, 꿩은 기름지고. 에라 술이나 먹자. 나는 탁자위에 놓여진 잔을 비기 전에 다시 채웠다. 의선은 채워진 잔을 받아들고 다시 한 번 독주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크흐으…. 네놈이 주씨이건 아니건 상관은 없다. 어쨌거나 네놈에게도 천명은 있고, 그 천명이 다 해 간다는 말이지.”
“대체 그 천명이 뭡니까?”
“그거야 받은놈이 때 되면 알게 되겠지만…. 네놈 요즘 아무것도 하기 싫지?”
“…그걸 노인장께서 어찌 아십니까?”
아니지. 봄이고 그러면 원래 다들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런거 아닌가?
“마음도 붕붕 뜨고, 하물도 시원찮을것이고…. 다 놓고 싶고…매사에 짜증이고…. 그렇지 않나?”
“허, 의원이 아니라 도문에 계셨습니까?”
영감 거 족집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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