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무림치매대응반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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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계속 살아볼까 싶은 마음으로 장원도 질러놨는데. 가을쯤 무림문파의 토벌이 예정대로 진행된다고 하면 적당히 빼고 빠지는게 좋을 것 같았다. 장원이야 뭐…. 집 문서 땅문서 있으니까 윤성이더러 관리하라고 해 놓으면 알아서 처리하겠지. 까놓고 말해서 내 돈 들어간것도 아니고.
“자윤…. 아니다. 됐다.”
“네? 뭐 말씀하실 것 있으세요?”
“아냐. 가서 할 일 해라.”
“아…. 네 주공.”
마의나 마교에서 온 애들은 본인들 의사를 물어봐야 하긴 하겠지만 여기서 정착한다면 예정했던대로 치료약의 제법을 확실하게 내 줄 생각이다. 마의를 알아보고 마교의 잔당이라는걸 알아 챌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치료약은 얘들이 만들어서 당가쪽에 공급하고 당가애들이 전면적으로 치료를 하면 되겠지. 아, 좋은 생각이…. 아니구나. 한 번 시도해 놓고서는 또 똑같은 짓을 반복할 뻔 했다. 사천무림 토벌을 막는 조건으로 치료를 해 주라고 당가에 권하려다 생각해보니 여기 와서도 당가 외의 다른 문파는 전혀 반응을 안했으니까. 당가 조차도 똥 싸고 나서는 마음이 바뀌었고.
“저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아, 네. 혹시 남기실 말씀이라도?”
마당을 쓸고 있던 사영에게 출타를 알렸다. 신투를 제외하고 여기 남아있는 무영문의 인원은 총 다섯명. 소문주 유하와 일영부터 사영까지 였다. 그 중에서도 사영은 일반 문도들 보다야 낫지만 전력이 많이 약한 편이라 장원 내에서 잡일을 처리하면서 주변 경계를 겸하고 있었다. 뭐, 주변경계는 연이가 거의 조기경보기 급이라서 사실상의 잡일꾼이지.
“성도에 가서 배윤성을 만나고 온다 전해 주세요.”
“네. 문주님. 다녀오십시요.”
봄이 한창이라 날씨는 화창하고 공기는 싱그러웠다. 여기 장원에 오고 나서 무영문이 왔을 때 성도에 나간 것 말고는 거의 밖을 나다니질 못해서 풍경이 상당히 낯설었다.
“오지 마라….”
딱 장원을 벗어나는데 연이가 뛰어나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기운에 의념을 실어 멀리서 연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최근에 계속해서 내공 수련을 하다보니 이런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확실히 기운을 다루는 측면에서는 연이보다 윗줄을 점하게 된 것 같다. 연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게 느껴졌지만 오늘은 좀 나가봐야겠기에 무시하고 길을 나섰다. 슬슬 진심으로 올라오는 짜증을 슬쩍 담아서 내비쳤더니 뭔가 다른걸 눈치챘는지 얌전해졌다.
한 발. 한 발. 떼어 놓을 때 마다 뒤로 풍경이 쭉쭉 밀려났다. 평상시에 사용하던 경신법이 아니었다. 내가 경공이나 보법을 제대로 배운게 없는것도 있었고 해서 말로만 많이 듣던 축지법이라는걸 연구 해 봤다. 결과물은 경신법과 다를게 없었지만 허공을 날지 않고 발을 땅에 붙인 모양만큼은 제법 비슷해서 재미가 있었다.
내공의 경지가 여기까지 올라왔다면 초식을 배운적이 없는 나도 초식에 얽매이는 짬은 아니었다. 어설프게 다른 사람들의 경신법을 원리만 베껴와서 따라하다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형을 내다버렸다. 그렇게 그냥 심심풀이로 생각한것이 축지법이었는데, 제법 그럴싸한 느낌이 난다. 아, 물론 이런걸 잘 아는 사람들이 본다면 비웃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까짓거 내가 누구랑 드잡이질을 할 것도 아니고 넘치는 내공으로 자기 만족좀 하면 어떤가.
“형님이 어쩐일이십니까?”
“왜, 오면 안되냐?”
요즘 젊어지고 나서는 아주 미쳐날뛰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만복객잔 성도점 앞에 온 다음 집무실 안에 있는 윤성이를 살폈다. 아무리 내 딸랑이처럼 부려먹는다고 해도 사생활은 존중해 줘야지. 딱히 뭘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불쑥 창문으로 들어갔더니 윤성이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에이, 섭섭하게 무슨 말씀을…. 아가, 나가서 차좀 올리거라.”
“네, 주인님.”
작은 체구와 동글동글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급이 허리를 깊이 숙이고는 배윤성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저런 취향이었냐?”
“무슨 그런 망측한 소리를 다 하십니까? 요 뒷골목에서 돼지 여물통을 뒤적거리고 있길래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 씻겨놓으니 제법 곰살맞게 웃어서 객잔 일 시키기도 험하니 끼고 있는거구요.”
“누가 뭐라더냐.”
“눈빛은 그게 아니셨는데…. 하여간 잘 오셨습니다. 통 외유를 안하시더니 뭐 확인하실거라도 있습니까?”
“그런건 아니고. 날씨도 좋은데 집에만 틀어 박혀 있으려니 영 갑갑해서 바람이나 쏘이러 나왔다.”
“술이라도 한 잔 올릴까요?”
“그냥 나온김에 잠깐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들러봤다.”
“허면 요기라도 하고 가시지요? 여기와서 구한 숙수의 요리 솜씨가 제법 괜찮습니다.”
“아, 그래. 저번에 먹어보니까 맛있더라.”
집무실 말고, 윤성의 손짓에 따라 집무실 들어가기 전에 있는 응접실 같은 공간으로 나왔다. 윤성이는 다시 여급에게 요리를 몇 가지 이야기 했다. 얼마 전에도 여기서 잠깐 음식을 먹은적이 있었는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슨 일?”
“어째 답답해 보이십니다.”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게 없어서 그렇다.”
실제로 내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게 있는지도 모르겠고. 지금 황상이면 그래도 임진왜란때 한반도에 전비를 어마어마 하게 투입했는데 이걸 내가 꼭 쳐죽인다던가…. 그래야 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세상일이 뭔들 마음에 차게 되겠습니까. 자. 자. 이러지 말고 한 잔 하시죠?”
“이건 뭐냐? 향이 좋은데?”
“제가 요번에 운남쪽에서 가져온 좋은 술입니다. 차는 이야기 하지 말걸 그랬네요. ”
“음…. 약주인가?”
“약재랑 이것저것 들어갔다고 하던데요. 월국에서 넘어왔다고 합니다.”
“월국이라….”
일단 병 봉인만 열었는데도 쌉쌀한 약향이 코끝을 스친다. 이런 술 이면 안주가 없어도 한 잔 할만 하겠다. 내가 흥미를 보이니까 윤성이가 잔까지 잽싸게 꺼내들고 다시 앉았다.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는데 능글능글 웃는 윤성이가 따라 내미는 잔을 받았다. 친화력 하나는 진짜….
“뭐 그렇게 급하십니까? 형수님들 다 어디가도 한 사람 몫은 하고.”
“누가 걔들이 반푼이라고 그러냐.”
“답답할땐 그냥 한 잔 쭉 들이키십시요.”
“그래야겠다.”
윤성이와 잔을 마주친 후에 한 잔 그대로 쫙 들이켰다. 잔은 엄청 작은데 입에 닿는 순간부터 화끈하게 쫙 들어간다. 식도에서부터 뱃속까지. 쭈욱 느껴질정도로. 내공을 써서 술 기운을 흩어버릴까 했지만 잠시 취해있는것도 괜찮겠지. 어차피 이거 두어잔 먹는다고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하지도 않을거고. 내공때문에 그렇게 취하지도 못할거고.
“크으….”
“좋죠?”
“어. 좋네.”
옛날 생각난다. 내가 참 이렇게 여자들 잔뜩 끼고 그렇게 살던 인생이 아니었는데. 누가 이야기 하면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내가 무림에서 깨어나고 나서 참 평온하게 가늘고 굴곡없는 인생을 추구했는데. 대차게 엿을 먹여주겠다고 생각한 것 치고는 계속해서 적도 안 보이고, 잡으면 또 튀어나오고 뭐 하나 밝혀지면 뒤에 또 있고. 이야 이게 황제의 무공이라고.
누구한테 떠밀리듯이 움직이고. 줏대가 있고 없고 그런걸 떠나서. 문주다 뭐다. 오라버니네 어쩌네 하는것도 잘 모르겠고. 뭘 하자는건지 말자는 건지. 뭐가 바뀔까 싶어서 오글오글 사랑한다는 말까지 끄집어 내 봤지만. 아니 진심이 아니었다는건 아닌데.
“그 왜 자꾸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을 하고 그러십니까?”
“내가 뭘?”
“저야 모르죠, 형님이 도통 말을 안 하시니까.”
“말 할 내용도 없어 인마. 옛다.”
병을 들어 윤성이의 잔에 따라주었다. 윤성이가 흡족한 얼굴로 잔을 받아서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윤성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화란이가 심어 놓은 금제를 찾아냈다. 그리고 손을 휘저어서 금제를 날려버렸다. 술김인가? 한 잔 딱 마셨는데. 이놈이 아부에 능한 놈이고 특유의 친화력으로 손을 비벼댄다는거야 알고 있지만, 뭐 중요한 일 한다고 머리통 속에 흉흉한 금제까지 박아서 사람을 부리고 말고….
“어? 형님 이거 뭡니까?”
“뭐.”
“화란이 누님 아시면 큰일 나는거 아닙니까 이거?”
“큰일이 날라면 큰일이 나라지….”
“이야…. 우리 형님. 이야….”
“됐수다. 그 동안에 변변치 못한 놈 밑에서 맘에도 없는 형님소리 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만복회주. 이제 본업으로 돌아가십쇼.”
“어? 그렇게 선 긋기 있습니까?”
“나이차가 몇 개인데 어르신한테 이놈 저놈 하는것도 못할 짓입니다. 아, 이거 술은 기념으로 갖고 가겠습니다.”
씁. 술이 깨는 느낌인데. 역시 내공이 콸콸 흘러 넘치는 몸이라 그런지 한 잔 먹고 슬쩍 취기가 돌아봐야 순식간에 깬다. 젠장할. 간만에 쪼끔 알딸딸한것이 기분 좋았는데.
“제가 야료를 부렸는데도 봐주셨었어서가 아니라, 꼭 젊음을 돌려주셔서가 아니라, 제가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으니까 형님입니다! 나이어린 형님 좀 모시는게 어때서요!”
“예에. 예.”
거, 그 양반 오글거리게스리.
“형님 꼭 집에 들어가셔야 됩니다!”
“어디 안가요.”
“에헤이….”
창으로 들어갔으니 다시 창으로 나왔다. 워낙 청력이 좋으니 뒤에서 뭐라는지 다 들린다. 화란이한테 보고 하란다. 이제 금제도 없는데. 고 얼마 사이에 화란이한테 보고하는게 아주 습관이 되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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