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무림치매대응반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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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에에에엑!”
아이 씻팔. 이거 생각보다 쉽게 안되네. 뇌라는것이 연약하고도 섬세해서 분명히 개쩔게 상승했을 나의 경지로도 컨트롤이 힘들다. 아, 근데 이거 이딴식이면 치료법이 나온다고 해도 누가 할 수 있겠어? 기운을 다루는게 지금 세상에 나만큼 되는 사람이 거의 없을텐데. 아, 연이 빼고.
“삼랑. 피는 잘 뺐어요.”
“멧돼지는 좀 질린다. 내일은 다른거 먹자.”
“네.”
아침저녁으로 동물실험을 진행하고 연구하고 명상하고. 여기서 벌써 삼주나 까먹었다. 중원으로 가기전에 마교에서 실험도 하고 가려면 대충 이번주 중에는 결판이 나야 하는데. 도통 길이 보이질 않는다. 무슨 소년만화도 아니고 뭐 하나 넘었다 싶으면 또 하나가 가로막아선다.
서령이는 린이와 함께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린이가 반수검의 고수는 아니지만, 어차피 서령이가 초식은 모두 익히고 있는 상황이고, 반수검은 정해진 투로를 기반으로 하여 초식을 연환하는 실전중심의 무공이라 본인이 실전에 대해서 뭔가 깨달아야만 끝나는 수련이었다.
그래서 폐관 수련에 들어가기 전에 서령이랑 느긋하게 밤을 보내려 했는데….
‘삼아. 나는 지금도 네가 살아 돌아온게 꿈인가 싶을 정도로 네 얼굴만 봐도 기뻐.’
‘어…. 그래.’
‘그래서 지금 내가 너에게는 짐이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어.’
‘아냐 짐이라니.’
‘일행이 움직일때 만일을 위해서 누군가는 날 지킨다는거, 잘 알고 있어.’
‘그거는 우리가 너무 강해서….’
‘알고 있어. 그래서 그냥 움직이는게 훨씬 편하다는것도.’
‘넌 무슨 말을 해도….’
‘으으응. 현실이야. 지금은 아니지만 나는 삼이 네가 하려는 일을 나한테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될거야.’
‘아니 그런 관계가….’
‘그래서 당당하게, 네 품을 차지하겠어. 공을 세워서.’
‘….’
‘어차피 너는, 우리 중 누구도 아직 사랑하지 않아. 책임감은 가지고 있지만.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사랑을 요구할 수 있을만큼 너에게 유용한 사람이 될게.’
우리 중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건 맞는 말이지. 그렇다고 얘들이 나한테 일방적인 호의를 가지고 있는것도 아니다. 썸이지 썸. 벌써 떡도 치고 물고 빨고 핥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해놓고는 무슨 개소리냐 싶겠지만 웃기게도 우리 모두가 그렇다. 서로 호감도 가지고 있고. 언젠가는 우리 사이에서 아이도 낳겠지만 이 감정을 급하게 키우고 싶지 않은것도 사실이니까. 오래 살건데. 시간 많잖아? 얼마나 간질간질하고 좋아.
하여간 그래서 서령이는 지금도 내 발 밑에 추가로 만든 지하토굴에서 린이와 함께 벽곡단을 철근처럼 씹으며 폭풍수련중이고 나는 산짐승 도살자로 클래스 전직을 앞둔 상황이다. 젠장. 이대로는 곤란하다. 서령이가 나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되겠답시고 저렇게 노력중인데, 나왔을때 나는 성과가 없으면 쪽팔려서 죽을거다.
“연아.”
“응. 오라버니.”
“이거, 지금 치료법이 완성이 된다고 쳐도 누가 익히기는 상당히 곤란할 것 같은데.”
“으으음…. 나도 그 부분은 고민중이야.”
언제까지 고민하려고 이제 슬슬 시간 없는데.
“접근 방향을 좀 바꿔 볼 필요가 있을것 같아. 화란아.”
“네. 삼랑.”
“오늘부터는 그냥 멱따서 피 빼고 가져와. 동물실험은 집어치우고 피 잘 빠진 누린내 안나는 고기좀 먹자.”
“그렇게 할게요.”
접근 방향을 바꾸겠다는 소리에 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삼주나 날려먹으면서 기운의 제어가 좀 구려도 안전할 수 있도록 연구했는데, 그걸 다시 뒤집자는 소리니까.
“그럼 오라버니는 생각해둔 방법이라도 있어?”
“흐으으음….”
아니, 나도 대안은 없지. 있었으면 진즉에 말했을거고. 다만 좀 시도해 볼까 싶은 방법은 있다. 독기의 경우 뇌 속으로 넓게 퍼져나가기 위해서 지들끼리 밀어내는 성질과 혈맥에 들러붙으려는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때 연이가 고독의 특성같다고 언급한것도 이러한 특성 중의 하나다. 현대의학측면에서 보면 조금만 생각해도 대체 이딴걸 무슨수로 만드는거야 싶지만 어쨌거나 일어나고 현상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 처럼 내가 가진 정도로 ‘천지환원공’의 정심한 기운을 쓴다면 일은 간단하다. 예전에 화란이를 치료할때도 연이가 이야기 했지만 머릿속에 있는 독기들만 쏙쏙 골라서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정심하며 온 몸 여기저기를 마구 휘저어도 뇌속의 혈맥이 다치지 않는다.
연이가 화란이를 치료할 당시 나와 몸을 섞으면서 묻은 내 기운의 특성으로 정말 세심하게 제어하여 뇌 속으로 파고드는 기운을 끄집어냈다. 모이면 퍼지려고 하는 독기여서 간신히 붙들어두고 끝마무리는 내 기운을 끌어다가 했었다. 그러고 나서도 혈맥 안으로 파고 들어간 기운들 때문에 화란이와 몸을 섞으면서 내 기운을 직접적으로 주입해야 했고.
이 경우는 몸 안의 부정한 기운과 살면서 쌓였던 노폐물들이 싹 쓸려나가면서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을 동시에 이루게 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뇌에 있는 기운을 끌어당길게 아니라, 차라리 뇌에다가 기운을 밀어 넣어 볼까 싶어서.”
“응?”
일단 이게 독기인지 아닌지 은폐를 하는 기막을 무너뜨리고 나서, 독기와 유사한….
“아, 연아. 그 뭉치려고 하면 서로 밀어내며 흩어지고, 혈맥에 흡착하는 특성을 지닌 약을 만들 수 있을까?”
“으으음…. 그것만이라면. 혈강시 제조에 사용되던 기술이니까 아마 가능할 것 같은데. 저번에 린이한테 뽑아냈던 독기를 소뢰음사에서 병 밖으로 꺼냈더니 평범한 독수가 되어버렸어.”
아무래도 그 성분은 휘발성이었나보다. 그렇다면 새로운 샘플이 필요해 졌는데 어쩐다.
“오라버니, 조금 어…. 기피하고 싶겠지만 말이야.”
“여자가 하나 더 있어야겠군.”
“으응….”
“그런 표정 짓지 마. 마교 이야기를 꺼냈을 때 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어.”
겸사겸사. 도랑치고 가재잡고, 꿩먹고 알먹고.
실제 독기는 없지만, 독기의 특성과 유사하여 뇌 속에 있는 독기를 밀어내고 대신 협착할 수 있는 약액을 제조할 생각이다. 그걸 퍼 먹이고 활성화 시키면 머리속으로 들어가 먼저 자리잡고 있던 독기를 밀어내고서 대신 혈맥에 흡착이 될거다. 그러면 독기를 감추던 기막을 걷어낸다.
’천지환원공’의 기가 약간만 섞여도, 정말 조금만 섞여도 독기를 끌어당겨 붙들 수는 있었으니까, 그 약액에 밀려나서 머리통 어딘가에 고인 독기를 살살 끌어다가 혈맥이 다치지 않는 위치에서 일거에 강한 내공을 일으켜 밖으로 뽑아낸다.
독기가 아예 없을 때 까지 너댓번 반복한다. 그럼 치료 끝.
여기서 핵심이 되는게 독기와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독기를 밀어내는 약액의 제조인데…. 실제 독기를 밀어내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독기의 샘플이 필요하다. 그 샘플을 뽑아내려면 결국 전에 화란이나 린이에게 했던것 처럼 직접 내 기운을 체내에 쑤셔 박아서 뽑아내야 한다. 즉, 떡을쳐야 한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여고수와 떡을 쳐야 할텐데, 기왕이면 마교에서 말빨이 좀 먹히는 고위층 여고수를 잡아다가 하는게 좋을 것 같다. 치료 했는데 죽이려고 들진 않겠지. 이후에 중원으로 돌아가서 암중세력과 결전을 벌일 때 마교의 지원도 받을 수 있을거고. 통수를 쳐도 안 죽을 자신은 있지만 만일을 위해 그냥 내 여자로 만들어 두는게 제일 좋다.
“너희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또 여자가 늘어나겠군.”
“…마교라면 충분히 오라버니의 세력이 되어줄거야.”
온 무림에 노망이 퍼지면서 천마도 노망났단 소리가 들릴 만큼, 최근의 마교는 대외활동이 거의 없이 신강에만 박혀 있었다. 혈라마들이 중원으로 밀고 왔을때도 조용히 잠자코 있었다고. 그만큼 안깝치니까 최근의 마교는 무림인들에게 그렇게까지 이미지가 나쁘지도 않았다. 정확히 말해서 관심이 없는거지. 나쁜놈들이라고는 하는데 나쁜짓이 눈에 보여야 까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겠는가.
“삼랑, 우린 신경쓰지 말아요. 어차피 덤으로 사는 인생, 삼랑에게 도움이 된다면 충분하니까.”
“덤이라니. 충분히 도움이 되고,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우리가 오라버니에게 도움이 안되면?”
“그럼 임신해야지. 그렇게 임신에 최적화된 몸을 안쓰면 손해지.”
도움이 안되면 육아휴직을 시키면 된다. 연이가 바로 경력있는 신입아니냐. 그럼 화란이와 린이는 뭐지? 만년 인턴?
“방금 삼랑 표정이 굉장히 저희를 깔보는….”
“어허, 그런거 아냐.”
귀신같기는. 하여간 얘들을 놔줄 생각은 전혀 없다. 남이 가지면 배아파 죽을거다.
“어지간 하면 책임질 일을 안 만들고 싶긴 했는데 여자가 넷이나 다섯이나 크게 차이가 있는것도 아니고, 다른방법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느니 그게 제일 깔끔할 것 같아.”
“으으으음…. 역시 질투는 나지만, 나는 오라버니의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까 뭐. 정실이 너그럽게 봐 줘야지.”
“언니, 대체 누가 정실이라는 거에요?”
“내가 다 너희들 치료했다는거 잊지마. 내가 안 받아 줬으면 너 아직도 벽에 똥칠하고 있었어.”
“악! 정말! 그 이야기는 왜 꺼내요. 언니도 삼랑 아니면 똑같았을 거면서.”
제발 훈훈한 분위기 다 잡아놨는데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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