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무림치매대응반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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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부터 정해. 뭘 원하는거야? 무림평화? 공명심? 차라리 그냥 화란이와 계속 같이 다니고 싶어서라거나. 그런 이유도 괜찮아. 계속 흐리멍텅한채로 있는것 보단 나아.”
화란이 이야기는 왜 나오냐.
“지금 우리 정도의 전력이라면 오라버니를 안전한 곳에 두고 무림맹도 쓸어버릴 수 있어. 그놈들이 암중세력이라고 밝혀진다면 말이지. 하지만 의지가 없는 칼끝은 결국 나한테 돌아오게 되어있어.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야. 이제 중원으로 돌아가서 치료법을 밝히면 십중팔구는 그놈들이 우리를 노려올텐데 단호하게 멱을 딸 수 있겠냐는 말이야.”
“멱을 딴다니 야….”
“서로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는 정의라는건 존재하지 않아. 승자독식이야.”
냉정하게 말해서 연이가 하는 말이 다 맞다. 맞는 말이긴 한데. 연이는 여전히 갈피를 못잡는 나를 보며 돌벽에다가 구멍을 냈다. 답답해서 저러나 했더니 산자락에 앉을 만한 곳이 마땅찮아서 석굴을 만든거였다.
“오라버니에게 강요를 하는것도 아니고, 타박을 하는것도 아니야. 그들을 그냥 단순히 무림에 노망을 퍼뜨리는 나쁜놈들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돼.”
“엥? 나쁜놈들이 아니라고?”
그런짓을 하는 놈들이 나쁜놈들이 아니라니….
“그런걸로 가치관을 세웠다가는 사상누각이나 마찬가지야. 조금만 흔들려도 와르르.”
“그래도 그건….”
“오라버니. 우리가 방금 소뢰음사에서 저지르고 온 짓도, 선악의 기준에서 따지자면 판단할 수 없어. 그 암중세력이라고 뭔가 사정이 없을것 같아? 억울하게 공적으로 몰려서 멸문당한 문파의 후인이 무림을 말살시키려고 했다거나 잠깐만 생각해도 그럴싸한 이유가 수십가지는 떠오를텐데 그러면 어쩔거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거야? 그럴만 했다 용납할거야?”
“너무 극단적인 이야기 아닐까.”
“천만에. 세상천지 그런경우를 살아오면서 숱하게 봐 왔어. 뜻을 세운다는건 그런거야 오라버니. 그런 사정까지 짓밟고, 하다못해 그 놈들이 납득할 수 있는 대의를 가지고 실제로 선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놈들일지라도 쓸어버리겠다는 각오가 필요한거야. 안 그러면 결국 내 손에 있는걸 지키지 못하게 되거든.”
무슨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알겠어? 그런방식으로는 오라버니가 가진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 옳은 일을 오라버니가 하는게 아니라, 오라버니가 하는일이 옳은거야.”
옳은 일을 하는게 아니라, 내가 한 일이 옳은거다.
혈맥이 들끓어 오른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나는 왜 이 무림에 만연한, 아무도 신경 안쓰고 그냥 노환인가보다 하는 중독성 치매를 치료하고자 하는가.
“오라버니가 겁내는 그런거, 목숨이 노려진다? 아무것도 아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지금 오라버니 스스로 가진 힘과 부릴 수 있는 힘까지 합치면 소규모전력으로는 역대 최강이야. 어지간한 문파 한 두개는 덤벼봐야 멸문이지. 오라버니. 지금 오라버니의 사고방식은 약자의 사고 방식이야.”
연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붕붕 울린다.
“강자라면, 강해지고자 하는 자라면 스스로의 뜻을 세우고 그 뜻이 맞서 깨지더라도 부딪치는거야. 앉아서 받히기를 기다리는게 아니라 나서서 받아버리는거라고. 그게 강자의 뜻이야. 살아남은 자의 의지가 곧 선이 되는거야.”
“나를 전부 드러내고 몰려드는 도전에도 당당할 수 있을 때, 그게 강자야.”
“숨고 피해서 이룰 수 있는 뜻은 없어.”
의식이 수면아래로 깊이 침잠한다. 왜 그랬을까.
왜 왔는지는 모르지만 눈을 떠 보니 다섯살 꼬맹이의 몸이었다. 말은 대충 통했지만 모든것이 낯설었다. 세상속에서 감출 수 없는 불안감을 억누르고 최대한 마찰이 없이 살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전생의 문물을 그리워하고, 향수병에 걸린듯 눈을 뜨면 돌아가는 생각을 했다.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고, 무공에 대해서도 그런것이 있을리 없다고 선을 그어 생각했다.
왜 이걸 해결하려고 생각했을까. 왜?
의문. 나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전생에서 살던 것 처럼 물렁하게 살았다. 전생에서 했던 것 처럼,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상경하여 말단이나마 그럴듯한 직장을 잡았다. 회사 기숙사에 기거하며 돈을 모으고 적당히 주변에서 급이 맞는 여자를 물색했다. 부당한 것 같고, 남들 안 하는 일이라도 시키면 묵묵히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렇게 살면 이 세상에서도 있는듯 없는듯 가늘게 이 세계에 녹아들어 살 수 있을줄 알았다.
사실 고향을 떠나온건, 계속해서 내 정체성이 위협당한다고 느꼈기 때문인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가 아닌데, 나는 형제가 없는데. 해남에서 계속 있다보면 지금 내가 나로 느끼는 나를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전생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거다.
소소. 정소소.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에게 이상한 부분이 상당히 있었다. 그녀는 최종단계의 고수들을 남녀 가릴 것 없이 담당했다. 죽음을 확인하는 빈도도 높았다. 나는 그런 소소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언젠가 사내부부가 될 수도 있는, 내 소망을 덮어씌운 존재로 규정했던것 같다. 나에게 자주 말을 걸어온 것도, 나에게 관심이 있었던것이 아니라 동향파악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에대해서는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연이. 여전히 대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긴 하지만 나 역시 연이가 그 닭꼬치를 먹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 팔자다. 그 직후에 느꼈던 강력한 분노. 내가 못이기는 척 연이에게 들러붙어 여기까지 온 것은 새로 구성된 그녀의 처녀를 가졌기 때문도 아니요,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도 아마 아닐것이다.
살고 싶었다. 생존. 그렇다. 그 독발린 닭꼬치는 내가 이 세계에서 직접적으로 마주한 사람의 살의였다.
나는 이 개새끼들에게, 내가 고수들을 끌고가서 너희놈들의 머리통을 싹 날려버리겠노라 선언해주고 싶었다. 이 씨발놈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막상 따지고 보면 굴곡이 있던 삶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 놈들이 수십년간 이룩한 성과들을 하나 하나 깨 부시면서, 좆밥같은 새끼들 면전에다가 너희들의 계획은 바로 무림맹 동급 무사 나부랭이에게 개박살이 났노라 던져주고 싶었다. 그 대의가 뭐건 간에 나를 건드렸으니까 다 뒤졌다고 무차별 폭력을 가하고 싶었다.
내가 아닌 연이와 화란이, 린이 같은 고수들의 손으로 그 뒤에 숨어서 나는 인명을 경시하지 않는 천부인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왔으니까. 내가 직접 그런게 아니다, 나는 여전히 너희들처럼 미개하게 칼들고 설치는 놈들과는 다르다는 뽕도 잔뜩 곁들여서. 그야말로 나 좋을대로 생각했던 욕망이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걸 알았으니 내 여자들에게 기대는건 그만둬야겠다.
내가 어떻게 강해졌는지는 관계가 없다. 과정의 순수함. 뭐 딱히 내가 인신공양을 하고 채음보양을 해서 강해진것도 아니지 않나. 나 정도면 충분히 정도를 걸어온거지. 나는 그동안 내가 가지게 된 이 힘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별 다른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데 토납법 하나 운좋게 얻어 걸려서 떡좀 쳤다고 이런 힘을 갖게 되었다니.
내가 강해진 과정은 반칙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받을거라 생각했다. 심지어 내 옆에 있는 여자들까지도 그럴거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이 역시 전생의 사고 방식이다.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는데. 내가 강하면 알아서 머리를 숙일텐데. 연이가 소뢰음사에서 했던 말 처럼, 말이 안 통하면 그놈들이 걱정을 할 일이다. 안 그럼 죽을테니까.
쳐죽일것이다. 내가 손수, 저잣거리에 굴비 널듯이 널어놓고 남자라면 돌을 던지고 여자라면 돌림빵을 시킬거다. 다 뒤졌다 이 씹쌔끼들. 그 동안 이뤘던 것 하나 하나 개박살을 내서 멘탈부터 털어 놓고 발끝부터 시작해서 꼼꼼하게 조질거다. 살려달라고 빌었다가 죽여달라고 빌게 만들거다. 내 목숨을 위협했으니까.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오라버니?”
“그동안 갈팡질팡해서 미안하다.”
“뭔가 좀 얻은게 있어?”
“응. 그 새끼들 다 쓸어버리려고.”
“왜?”
“하는짓도 음험하고. 거슬리잖아?”
“그리고?”
“몰라, 알게 뭐야. 내 마음에 안들어.”
그제서야 연이의 표정이 화사한 웃음으로 물들었다. 마치 장성한 자식을 보는것같…. 아니 그 이상을 생각하면 박을 수 없게 되니까 그만 두자.
이런걸 깨달음이라고 표현해야 하는걸까. 몸은 날아갈듯 가볍고, 노곤한듯 만사가 귀찮았던 정신도 안개가 개인 산 정상에 선 것 마냥 모든것이 또렷하고 명확했다. 이게 고수가 보는 세계인 것인가. 그리고 그 명확한 시선으로 연이를 봤더니 연이가 나에게 품고있는 호의와, 지금 당장이라도 나에게 달려들고 싶어 하는 암컷 본연의 욕구가 보인다.
“연아.”
“응?”
“벗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