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무림치매대응반 47
* * *
“이건…. 확실히 시주께서 저희를 의심하는것도 무리는 아니겠습니다만….”
“니들 의심하는거 아니야. 내가 그럴 여력을 남겨두지도 않았고. 본론만 이야기 해.”
아마, 노승은 연이가 직접 소뢰음사를 박살낸 장본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갸우뚱거리다가 연이의 기세가 흉폭해지자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강시를 만들 때 사용하는 약물법이 있습니다. 뇌내에 약물을 고루 퍼지게 하면서도 뇌안에 약물이 달라붙게 하기 위해 혈기를 담아 처리하는 과정이 있는데, 그 수법이 들어가 있습니다.”
“비전은?”
“그게, 이전의 소뢰음사가 무너질 때 모두 실전되었습니다.”
“다시 적어 놓은게 있을거 아니야. 아니면 니가 알고 있거나.”
“제가 아는 부분은 많지가 않습니다. 정확한 내용을 배우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 치고는 단박에 알아 보는데? 순순히 알고 있는 내용을 토해놓는게 좋을 것 같은데. 여기도 싹 뒤집어 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정말…. 정말 모릅니다…. 젊을 때 일손을 거드느라 잠깐 봤던 기억이 있어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맞다 보면 기억 나겠지. 선택해. 본인이 맞을지 소뢰음사 땡중놈들이 맞을지.”
아무리그래도 노인한테 너무한거 아니냐고 말리려는데 또 연이는 암자가 우르렁거리고 서까래에서 흙먼지가 피어 오를 정도로 기운을 내뿜었다. 거 참….
“드…드리겠습니다….”
헐, 뭐야. 진짜 있었어?
“오라버니 지금 나 말리려고 했지? 다 봤어.”
“아, 아냐.”
“이놈들은 지금 약하니까, 어설프게 어금니를 드러냈다가는 순식간에 강자들에게 뜯어먹힐테니까 참고 있는거야. 눈 앞에 보이는 상대의 반응만 가지고 쉽게 사람을 속단해서는 안돼.”
일단은 내가 전생 기준으로 생각을 해서인지 사람을 쉽게 믿고 물렁하게 살았던건 맞다. 실제로 무림맹에서도 그러고 살았었고. 다들 고만고만한 하류인생이라 큰 문제는 없었…. 아. 그러다 독을 먹고 비명횡사할 뻔 했지만.
“딱, 일 다경의 시간을 주지. 네놈은 여기 남고 밖에 있는 어린놈을 시켜서 가져오게 해. 쓸데없는 궁리를 했다가는 소뢰음사를 한 번 더 세상에서 지워주겠다.”
“예...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화란이와 린이는 연이와 함께 세 방위에 서서 삼각형을 만들듯 나와 서령이를 둘러쌌다. 혹시나 있을 상황에 대비하는 것 같았다. 나와 서령이는 변해버린 연이의 기세에 눌려 찍소리도 못하고 가운데에 서서 아무것도 없는 방 안을 흝어봐야만 했다.
우당탕탕!
“여기, 가져왔습니다!”
“고작 이거야?”
“실전되었다는 말이 모두 거짓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비전은 실전되었고 얼마 남지 않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젊은 라마승이 들고 온 얇은 책자 두권을 받아들고 노승을 압박하자 노승은 벼락맞은 개구리처럼 바들바들 떨며 쉴새없이 변명을 토해냈다.
“지켜볼거야. 다시 한 번 중원을 넘봤다가는….”
“정말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요!”
“가자 오라버니.”
으잉? 정말? 너무 허술한거 아냐?
“괜찮아. 기어 나오면 다 죽일거니까.”
정말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해 버렸다. 심지어 건네 받은 비전이 확실한 비전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괜찮아. 확인할 것은 다 확인했으니까. 너희들은?”
“아…. 그거라면 하나 걸리는게 있어요.”
그대로 호쾌하게 소뢰음사의 경내를 벗어나려다가, 린이가 무언가 걸리는게 있다고 해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대체 뭐가 걸린다는…. 린이의 시선을 따라 가 보니 처음 라마승과의 통역을 맡았다가 우리를 여기까지 안내해 준 노인이었다. 우리가 나가는걸 제대로 확인하려는 심산인지 몇 발짝 뒤에 떨어져 따라오고 있었다.
“너, 누구지?”
“예...예?”
“누구냐고. 분명히 나 아는데.”
주인님 주인님 하고 졸졸 따라다니던 린이는 어디가고 검후 모용린의 기세가 드러났다. 근데 린아, 혹시나 아는 사람이라도 지금 니 모습이 옛날이랑은 아예 다를텐데….
“제…제가 소저처럼 아리따운 분을 알 리가….”
“아냐…. 그 썩은 눈깔이 눈에 익어…. 누구지….”
린이는 노인을 향해 한발짝씩 다가서며 연신 입으로 누구지를 읊어댔다.
“저는 나서 부터 이 근처에서….”
“아, 기억났다. 너 혈루색마(血?色?)구나?”
노인의 눈이 찢어질듯 커졌다. 별호에 색마가 들어가는걸 보면, 선한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때 다리만 잘랐는데 팔은 어디서 해먹었느냐?”
“커헉…컥…검…검후우….”
그대로 혈루색마가 뒤로 발라당 넘어져 바들거리는 팔다리로 멀어지려고 안간힘을 쓴다. 흙바닥에 박아놓은 디딤돌을 가느다란 의족으로 달그락거리며 긁어대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멀어지는 만큼 린이가 앞으로 가고 있으니까.
“유명한놈이야?”
“린이가 소검후시절에 춘약을 먹이려고 했던 놈이에요. 아, 불발로 끝났어요 걱정말아요.”
아니 이미 린이가 눈앞에 잘 살아 있으니까 딱히 걱정하는건 아닌데. 아, 물론 그쪽도 걱정은 안 한다. 아다 개봉은 내가 했으니까. 화란이는 린이를 오래 알고 지냈으니 알고 있을것 같아서 물어봤다.
“여자를 하나 잡았다 하면 뼛골까지 빨아먹는걸로 유명했던 놈이에요. 패물 털리고, 애 들어서고, 몸 버리고 오죽하면 당한 여자들이 피눈물을 흘린다고 혈루색마였겠어요.”
“린이가 다리를 잘랐어?”
“두 다리를 잘랐죠.”
“응? 의족은 하나만…. 아, 그 다리.”
나도 모르게 절로 가랑이가 따끔거리는 느낌이다.
“말해 봐. 니가 왜 여기에 있어? 꼴에 별호에 혈(血)이 들어간다고 혈라마들이랑 노냐?”
“소.. 소거,검후…. 왜…. 어째서 여기…. 컥!”
“묻는말에 대답이나 해. 남은 팔 다리도 잘라주기 전에.”
이 정도의 기세면, 아까 연이는 정말 부드럽게 말 한 거구나. 바닥을 구르는 혈루색마의 가랑이가 점점 젖어든다. 지리고 있나보다. 하긴. 나같아도 내 다리를 두 개나 자른 적을 몇십년만에 다시 만나면 오금이 저릴 것 같았다. 거기다 극적인 효과를 주려는지 린이가 면사까지 벗어버려서…. 혈루색마가 보기에는 그때의 린이가 그대로 돌아온 것 같은, 어우 내가 저 상황이면 정신착란걸렸을거다.
“무공을 폐한것도 린이에요. 두 다리를 잘라놓고 피해자들의 부모들을 모아 던져줘 버렸죠.”
화란이의 말에 따르면, 당시 검각에서도 피해자가 나와버려서 인근의 고수들이 힘을 모아 수사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린이만 추적에 성공해서 잡으러 갔다가 춘약을 먹을 뻔 했단다. 분기탱천한 린이는 앞뒤 잴 거 없이 무공을 폐한 다음 단전을 박살내고 다리를 썰어서 피해자의 가족에게 던졌고.
“여기 숨어서 후인이라도 키우고 있었나? 아니면 혈라마 놈들과 뭘 도모하고 있었거나….”
“흐응…. 냄새가 나는데. 혈루색마라….”
“그런일…없, 없습니다….”
“한 번 물어봐서 답이 나오면 세상에 폭력이라는 것이 존재할 이유가 없겠지.”
린이는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하고 울리는 쇳소리가 쨍하게 가슴을 때린다.
“입에서 바른 말이 나올때까지…. 어디보자….”
칼을 완전히 빼들고 천천히 혈루색마의 온 몸을 흝어 본다. 그 모습이 마치 눈어림으로 고깃근을 재는 백정같아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손가락을 마디단위로 끊으면 딱 좋겠네.”
“으아아악! 왜…왜이러는거요!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거요!.”
“넌 여자들한테 왜 그랬냐? 그때 죽으라고 다리를 잘라놨는데 명줄도 기네? 자, 빨리 말하지 않으면 네놈의 그 한치도 못되게 남은 하물에 용두질 해 주기도 힘들것이야.”
“살려…살려주십시요…. 살려주십시요.”
“알고 있는것만 제대로 읊으면 안 죽인다니까?”
아마도 혈루색마는 알고 있을것이다. 이런 고수라는 것들은 일단 검을 한 번 뽑았다하면 거침없이 썰어대는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나처럼 뭘 이걸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최대한 죽인다는 선택지는 피한다거나 그런게 없다. 연이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보고있고, 화란이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령이는 뭔가 반짝거리며 동경하는 눈이 되었다.
“넌 저런거 배우지 말아라.”
“왜 삼아? 나도 색마같은 놈들을 벌하는 당당한 고수가 되고 싶은데.”
“그…그래.”
서령이의 장래희망은 그렇다고 치고. 린이를 말려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혈루색마의 손가락 한 마디가 하늘로 날았다.
“끄아아아악!”
“야, 니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한놈도 안 내다 볼거야.”
"끄으으흐으…. 아는게…. 아는게 없소…. 그냥 굶어죽을까봐 의탁했을…뿐…입니다….”
“뭐가 있을까…. 네놈이 여기 있어서 땡중놈들이 이득을 볼 게. 언니는 뭐 생각나는 거 있어요?”
또 한 마디 손가락이 날았다. 아까는 검지끝, 이번에는 중지 끝이다. 한 번 자른 손가락을 차례로 자를 줄 알았는데 다른 손가락을 잘랐다. 또 한번 비명이 울리는 와중에 린이와 연이, 화란이는 머리를 맞대고 추론에 들어갔다.
“저 음마놈이 여기 있는걸 보면, 뭔가를 꾸미긴 하는 것 같은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