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무림치매대응반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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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이 정해진 이상 여기서 더 뭉개는건 시간을 지체하는 일이었다. 토굴을 다시 파 묻고 공중수레에 올랐다.
“이제 토굴 만들어도 잘 처리해야겠네.”
“그러게. 추종술이 뛰어난 고수는 셀 수 없이 많으니까.”
꼭 살막이니, 은월문이니 유명한 문파를 주워섬기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찾는것에 특화된 사람들은 지금 시대에서 제법 중요한 인재였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는 확실하게 파 묻고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겠다. 왠지 쫓기는 심정이다. 실제로 쫓기는게 맞을거고.
우리는 국경선을 따라 이동하기로 했다. 군부의 영역이라 상대적으로 무림인들이 드나들지 않는 영역이었으니까. 다만 이 시대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주 해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하늘을 보니까 그런 부분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 고도를 좀 높이면 그냥 큰 새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안력이 좋은 사람이 본다면 충분히 발각될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발각이 되더라도 그게 우리 일행이라는 매칭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오라버니는 좀 쉬어. 서령아.”
“네 언니.”
나와 화란이가 남녕에 들어갔다 온 사이 서열 정리를 끝낸 것 같았다. 잠깐, 그런데 이건 무슨 개족보야.
“서령이는 나한테 삼이라고 부르는데, 연이한테는 언니라 그러고, 연이는 나한테 오라버니라 그러고. 뭐야 이게.”
“그치만 오라버니, 서령이는 서령이대로 오라버니와의 관계가 있는거니까. 그걸 꼭 틀에 맞춰서 호칭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듣고 보니 그런것도 같고. 애초에 내가 연이나 화란이, 린이를 편하게 부르고 있는것도 말이 안되는 상황이긴 하니까. 귀찮게 하나하나 따지지 않기로 했다. 본인들이 만족한다는데야.
“그래서, 소뢰음사 주춧돌까지 뒤집었다는게 무슨 소리야?”
“아…. 그거?”
나는 수레의 난간에 턱 기댔다. 지금 우리 공중수레는 높으신 분들이나 탈 만 한 좋은 마차의 벽을 터 놓은…음. 다리가 없는 원두막 처럼 생겼다. 비야 기막으로 어떻게 한다고 해도 햇빛은 그냥 위에 뭘 덮어 씌우는게 가장 좋아서.
“그냥 소싯적에 좀….”
“당주께서, 그러니까 연이언니가 무림맹 외당주 시절에 수라혈승을 비롯한 소뢰음사의 혈라마들이 대거 침공해왔어요.”
“야!”
“왜요. 어차피 언니 수틀리면 주먹부터 나가는 사람인거 삼랑도 아실텐데요 뭐.”
“그래도….”
아, 연이가 몸을 비비꼬면서 부끄러워하고 있다. 왜 대체 무슨 이야기인데.
“다행히 조기에 첩보를 입수해서 사천과 섬서의 경계에서 결전이 벌어졌어요. 절정고수 너댓이 달려들어야 간신히 감당이 되는 수라혈강시 스무구를 앞세우고, 그냥 청강시는 셀 수도 없었죠.”
“어디서 시체를 그렇게 구했대.”
“수라혈강시는, 곤륜과 공동의 장문인을 포함한 노도사들을 썼고, 청강시는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죽이면서 온 거에요.”
“관아에서 가만히 둬 그걸?”
“청해와 감숙의 산맥 깊은곳으로 야음을 틈타 움직이는데다, 발견을 한들 일개 현령 휘하의 병력이 상대하기에는 어림도 없었죠 뭐. 속수무책으로 뚫렸어요.”
묘하게 그런 큰 일 치고는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도 나름 무림맹 소속이라 오며가며 주워들은게 많은데. 내 기억에는 없는 내용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흠…. 언니가 무서우니까 둘 만 있을때 자세히 해 줄게요.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외당전력을 동원해서 사천의 끝까지 밀어내고 소뢰음사의 전력 대부분을 몰살시켰는데, 언니가 씨몰살을 시켜야 한다고 단독으로 뛰쳐나갔어요. 그리고는 문자 그대로 소뢰음사의 주춧돌까지 뒤집어버렸죠. 아직도 벽력문에서 이를 갈아요.”
“벽력문은 또 왜?”
“그때 언니가 벽력문의 비고를 털었거든요. 화탄이라는 화탄은 죄다 쏟아부었어요.”
“어처구니가 없긴 했죠 정말…. 그 곳에는 폐허밖에 없었어요.”
대체 혈라마들이 얼마나 날뛰었길래 동쪽끝에 있었을 린이까지 참여를 했던걸까.
“그거야…. 그놈들이 워낙, 사람 목숨 알기를 뭣 같이 하니까….”
별 것도 아닌 이야기구만 뭐 부끄럽다고. 그래도, 지금 이렇게 파리 한 마리도 못 잡을 것 처럼 다소곳이 앉아서 볼을 부풀리고 있는 연이가 아무리 혈라마들이라고는 해도 문파 하나를 몰살시켰다는 이야기는 좀 무섭긴 하다.
“오라버니, 그래도 그 후로는 조용히 살았어!”
“네. 네.”
“진짠데. 내가 얼마나 섬세하고 여린….”
“거기까지만 해요 언니.”
“씨이….”
조금은 일부러 그러는것도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부터는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도 초조한 기색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런데 옆에서 보기에는 더 그렇겠지. 흠.
지금 내가 여기서 조바심을 낸다고 상황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 한숨을 크게 내쉬고 의식적으로 여유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한쪽 모서리에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린이가 자기 허벅지를 툭툭 친다.
“으으….”
“오라버니, 내 허벅지도 있는데 왜 린이한테 가지?”
“린이가 먼저 오라고 손짓했으니까?”
할 말 없지?
“다음엔 내 차례야.”
폭신하고, 부드럽고, 좋은냄새까지 나는 허벅지를 베고 눕는건 내가 이득인 것 같은데. 다음에는 원하는대로 연이한테 드러누워줘야겠다. 린이는 시선을 수레 밖으로 돌려 혹시 모를 위험을 경계하면서도 손을 내려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보니 그때 이례적으로 황명이 내려왔었죠?”
“아, 맞아. 토벌에 참여한 무림인들을 죄다 황성으로 불러들여 황제께서 크게 치하하셨지.”
“오, 황제께서요?”
별 일이다. 명 초에 백련교와 마찰이 있을때 이후로는 황제를 위시한 조정은 무림에 크게 개입하지 않는 기조였는데. 물론 일반 백성들을 학살한다거나, 오랑캐들과의 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우거나 하는 경우는 다르지만. 이 경우는 서장의 라마승들을 오랑캐로 치부한 결과인가?
“그때 진짜 맛있었는데.”
“그 생각밖에 안나요?”
“황제폐하는 먼발치에서, 그것도 가려진 상태에서만 알현할 수 있었고, 그 뒤는 계속 잔치였잖아 몇날 며칠동안. 실로 대연회라고 할 만 했지.”
그건 좀 보고 싶다. 자금성이라고는 교과서에서 사진으로 밖에 못 봤으니까. 황권이 절정에 달한 명대의 자금성은 또 어떤 분위기일지 굉장히 궁금하다.
“그때만 해도 관과 무림이 다시 화합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어.”
“그러게요.”
“지금은 관리라는 작자들이 하나같이 무림인이라면 도끼눈을 뜨고 보니.”
확실히 그런 분위기가 좀 있다. 관아 소속의 무인이나, 과거를 준비하는 문인들이 무림인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슬슬 총포의 시대가 오고 있기도 하고. 왜구나 해적들을 상대하는 남병들은 불랑기포를 운용한지 오십년이…넘었나? 하여간 이제 어지간한 경지의 무인들은 총알 앞에서 평등하게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거다.
“그럼 연아, 소뢰음사를 그렇게 철저하게 박살내 버렸다면, 가는 의미가 있어?”
“그런 놈들은 원래 명줄이 긴 법이지 오라버니. 지금은 대뢰음사로 먼저 갈거야. 거기가서 물어보면 소뢰음사의 잔당들이 지금 뭘 하고 사는지 알 수 있겠지.”
대뢰음사는 소뢰음사와 다르게 제법 공명정대하고 중생을 보살피는데 치중하는 멀쩡한 사찰이라고 했다. 무공도 정심한 불가계열의 무공이고. 그런데, 원래 뇌음사라고 하면 천축, 그러니까 인도쪽이 아니었나?
“그건 정말 예전 이야기. 천축에서 떨려나서 넘어온지가 언젠데. 서장에도 부처를 모시는 땡중놈들이 많으니까 포달랍궁에서 너그럽게 포용한거지. 그 안에서도 혈불을 모시는 놈들이 소뢰음사로 갈라져 나온거고.”
“그렇구나….”
어딜 가든 살기 힘든 세상이다.
“린이한테 그만 치대고 여기로 와 오라버니.”
“그럴까?”
손을 올려서 린이의 엉덩이를 토닥거려주고 몸을 일으켜서 엉금엉금 연이에게로 가 또 드러누웠다. 연이는 무릎을 모으고 꿇어 앉는 자세로 양쪽 허벅지 사이에 내 머리를 두게 했다. 연이가 몸을 숙일 때 마다 머리에 꾹꾹 눌리는 가슴이 기분 좋다.
이동하는 중에는 계속 내공을 다루는 연습을 했다. 연이도 화란이도 일전에 내가 지금 기본적인 초식에서 부터 시작해 무를 새로 익히기에는 늦었으니, 무력을 원한다면 형을 버리고 의기상인을 추구하는 것이 맞는 방향이라고 해서. 간단하게는 기탄을 날리거나, 가늘게 기운을 뽑아내 사람을 구속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내공을 유용하게 써먹는 방식을 연구하고 연습했다.
서령이는 수레 위에서 초식을 수련할 수는 없으니, 해남검파의 자하공을 수련하거나 린이와 논검을 했다. 린이는 과연 검후답게 옆에서 듣기에도 핵심만을 짚어 극도의 실전성에 치중한 서령이의 수를 파훼했다. 그러다 둘이 마주 앉아서 쎄쎄쎼 하듯이 금나수법을 연습하기도 하고, 지루해지면 검을 꺼내 닦으며 검에 대한 이야기룰 나눈다던가. 린이가 그렇게 박살을 내놨는데도 서령이는 연이나 화란이를 더 어려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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