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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치매대응반-42화 (42/122)

〈 42화 〉 무림치매대응반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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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두고 출발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여러번 하고서야 서령이를 배웅할 수 있었다. 올때는 경공으로 신속하게. 다시 방으로 돌아와 피곤한 정신을 추스르며 침상에 드러누웠다. 어제는 린이가 불침번을 섰으니 오늘은 화란이 차례인듯 린이가 침상에 누워 있는 내 품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런거 하면 연이는 늘 열외다. 그야말로 정실의 위엄. 이런것도 강자존이란 말인가.

서령이의 맹목적인 호의를 정면에서 확인하고, 더는 ‘대체 왜’ 같은 얼빠진 의문을 버리기로 했다. 아 살다보면 여자가 꼬일 수도 있지. 예전에 깔아놨던 지뢰가 터지듯이 이렇게 뜬금없이 소꿉친구가 터지기도 하는거고.

내가 연이와 엮여서 이렇게 상황이 흐르지 않았다면, 아마 제일매화 종리연을 사망처리 한 다음에 휴식 차 해남으로 돌아와서 춘절을 보내고 혼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거다. 나야 물 흐르듯이 사는 인생이고, 서령이나 나나 지금시대에는 꽉 찬 나이라 백 아저씨와 아버지가 혼사를 추진하셨으면 그냥 날 받았을거다. 거, 서령이 입장에서는 상황이 오지게 꼬인게 맞긴 하네.

“오라버니, 여기 좀 봐야겠는데?”

“내가 뭘 본다고 아냐.”

“보고 알아달라는게 아니라…. 아니 일단 봐 그냥.”

역시, 힘겹게 침상위에 늘어진 몸을 일으켜 탁자쪽으로 다가갔다. 연이가 손가락으로 짚은 부분을 보면, 책등이다. 이게 왜?

“여길 보면 표지도 낡았는데 안에 있는 본지는 더 낡았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그냥 표지를 다시 한 거 아닌가?

“그리고 여기하고, 여기.”

그 다음에 연이가 짚어준 곳은 제일 첫장의 첫줄. 한 세줄쯤 뒤. 그리고 그 다음 장. 대체 뭘 보라는건지 알 수가 없다.

“이 원본은 사람이 수기로 썼어. 필사를 했거나 직접 썼거나 상관없이 말이야. 그런데 여기 획을 잘 보면…. 알겠어?”

아, 그렇게 말을 듣고 보니까 알 거 같다. 붓에다가 먹물을 찍은 순간을 이야기 하는거다.

“상식적으로, 제일 첫장을 쓸 때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집중해서 붓을 놀리지. 당연히 붓에다가 먹을 듬뿍 먹여서.”

붓이 머금을 수 있는 먹물이라는게 쓰다보면 한 두글자 차이로 별 차이가 없는데, 첫 장의 첫 글자에서 부터 세어보면 이후에 나타나는 패턴 대비 먹을 새로 찍은 구간이 짧다. 천지음양 어쩌고에서 시작해서 열 두글자. 그 다음 부터는 서른자에서 서른두자 정도에 먹을 새로 찍은 흔적이 있다. 글자 자체가 차이가 난다. 먹을 새로 찍으면 획이 확 두꺼워 지니까.

“다행히 이 글씨를 쓴 고인(古人)은 서(書)에 그렇게 능했던 건 아닌것 같아. 그렇다면 이런 흔적을 남기지도 않았겠지.”

“결국 연이 네 말은….”

“음…. 이 무공은 ‘천지음양명암한온환원공’이 아닐거야.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 책이 원전의 끝맺음은 맞는 것 같지만.”

“앞 부분이 더 있다는거네?”

결국 책의 제일 첫줄에 쓰여진 ‘천지음양명암한온환원’은 책 제목을 한 번 더 적어 놓은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걸 알아챌 정도로 뭔가 앞 부분에서 이어지는 내용이 있었어야 할텐데….

“전체적으로 문장이 문사(文?)의 문장은 아니야. 글재주가 시원찮았던 거겠지. 내용적으로도 한 번 끊어진 부분이기도 한 것 같고.”

그 또한 우리 아버지 부터 시작해 우리 가문에서 그런걸 알아 볼 오성을 가진 사람이 없었던 것도 이걸 그냥 토납법이려니 하고 익히게 된 원인인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앞 부분을 어디서 찾을 단서가 있는것도 아니니까.”

“괜히 수수께끼만 생긴 셈이군.”

“오라버니에게 인연이 닿는다면 얻을 수 있겠지.”

“글쎄.”

“반쪽…이나 될지도 모르는 내용으로 그런 경지를 이뤘잖아?”

그렇게 따지자면 또 인연이 있는것도 같고.

“아, 내일은 어떻게 할거야?”

“뭐가?”

“해남을 나서면 어디로 갈거냐고.”

어쨌거나 별 다른 일이 없으면 우리 일행의 목적지는 연이가 정한다. 그래서 아직 이후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바가 없어서 연이에게 물었다.

“으으음…. 서장으로 가 볼까 해.”

“혈라마들한테?”

“응. 보자. 한 이십년쯤 됐나. 소뇌음사(小雪音?) 애들 주춧돌까지 뽑아버린게.”

“정확히 이십삼년이에요 언니.”

“그렇구나. 옛날 일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냥 카운트가 안된거겠지. 옛날일도 기억이 또렷하다고 자랑해 놓고서는.

“지금 우리가 가진 단서라고는 화란이가 느낀 혈라마의 기운밖에 없으니까. 일단 가 보고 생각하자.”

“일단 가 본다니….”

“달리 할 일이 있는것도 아니잖아?”

“그야 그렇긴 하지.”

“거길 걷고 뛰고 말타고 이동하려면 한 세월이겠지만, 공중수레가 있으니까 금방 가.”

해남까지 온 것은 어디까지나 겸사겸사다. ‘천지음양명암한온환원공’의 원본을 확인하면서도 큰 기대는 없었던 것 같다. 근 50여년간 원인은 고사하고 이것이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된 일이라는 것 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천적처럼 치료해 버리는 기운이 비정상적인 치매의 원인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세상 일이라는게 그렇게 형편 좋게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알리는 것이 목표였고, 혹시나 무언가의 다른 이유로. 그러니까 목숨이 노려진 주체가 연이가 아닌 나일 가능성까지 확인하기 위해서 해남까지 왔던 거니까. 일단 소기의 목표는 달성했다고 봐도 되겠지.

남은 단서라면 이제 화란이가 느꼈던 혈라마들의 기운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연이는 못을 박았다.

“화란이가 느낀 혈라마의 기운이 강시를 다루던 놈들의 수법과 비슷하다고 해도, 아마 이게 주가 되는 수작은 아닐 가능성이 커. 근거는 없지만 느낌은 그래. 해남검파쪽에 노망이 난 사람이 없다는걸 보면 세외까지는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인데…. 일단은 소뢰음사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지, 노망이 난 라마승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지.”

“확인이 되면?”

“그건 그때가서. 없을 수도 있으니까. 만약 거기 없으면 사천으로 가서 당문의 힘을 빌릴거야. 일단 독이라는게 밝혀졌으니까, 밝혀진 독의 분석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당가에 노망난 고수가 있을까 하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행보가 주류세력을 비껴와서 그런거지 거대문파나 세가의 경우는 무림맹에 수용할 수 없을정도로 노망난 고수가 넘쳐나니까. 물론 처음에 우리가 나설때도 생각했던거지만, 가서 대뜸 노망난 어르신좀 아무나 봅시다. 이거 독이요. 했다가는 최소 문전박대, 자칫 잘못하면 의심을 넘어 무림공적으로 몰리는 수도 생긴다. 평화가 오래된 만큼 다들 예민한 시절이다.

“그래. 그렇게 하자.”

“원본은…. 나중에 혹시라도 연이 닿아서 앞 부분을 발견했을 때 필요할 수 있으니까 우리가 가져가는게 어떨까. 물론, 아버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건 내일 아침에 내가 여쭤볼게. 집안에서도 크게 가치있게 다루던 물건은 아니라서 별 상관 없을거야.”

다만, 앞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언질은 드려야겠다. 누차 말하지만 이게 혹시라도 뭔가 엄청난 신공의 일부분이다 뭐 이런식으로 풀려버리면 뭐가 터져도 이상할게 없는 세상이니까. 거기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장보도 한장에도 소문이 살을 붙이면 문파단위로 혈겁이 터지는게 바로 여기 중원 무림이다.

“화란이 너는 하오문쪽과 연락할 수 있어?”

“하오문이 아니에요 언니….”

“하나로 묶으면 하오문이잖아. 따지지말고 넘어가.”

“광서로 들어갈거라면 남녕에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있어요.”

“그럼, 무영신투(無??)에게 연락해. 반쪽짜리 비급을 있는대로 다 삼월 보름까지 성도로 가져오라고.”

삼월 보름이면 넉넉잡고 두달반이다. 그때까지는 중원으로 복귀해서 사천에 있겠다는 이야기인데….

“노출해도 괜찮을까요?”

“무영신투 본인이 직접 온다면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으니까.”

하기사, 무영신투가 아니라 무영신투 할애비가 온다고 해도 지금 우리 전력을 감당한다는건 불가능에 가까울거다. 연이의 자신감에 화란이도 별 말 없이 수긍하고 그러겠노라 했다.

“그런데 꼭 앞 부분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까지 감수해가면서.

“지금은 글쎄, 뭐라고 말로 잘 설명할 수는 없는데. 뒷부분의 내용만으로도 이 노망증을 치료하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앞 부분이 있다면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

“근본적인 대책이라…. 이를테면 보편적인 치료법 같은?”

“그게 된다면 더 바랄게 없겠지.”

그렇게 된다면 지난 수십년간 무림을 좀먹어왔던 세력에 대항할 우리측 전력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건 나중의 일이니까. 오라버니는 졸린 표정 그만 하고 얼른 주무세요.”

“무슨 애 재우듯이.”

“애는 맞잖아?”

그거야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연이는 원본을 좀 더 살펴보겠다고 했고 화란이는 불침번. 두 사람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고 린이가 기다리는 침상에 다시 누웠다. 화란이만 봐도 그렇고, 고수들은 잠을 자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고 하던데 나는 습관 때문인건지, 수련하면서 익숙해지는 과정이 없이 야매로 경지가 올라서 그런건지, 아니면 쟤들이 나이가 들어서 잠이 없는건지….

“오라버니? 쓸데없는 생각말고 그냥 자.”

하여간 귀신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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