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무림치매대응반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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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심한 연이를 달래는게 최우선이었으므로, 나는 그 뒤에도 최선을 다해 연이를 달랬다. 보듬어 안고 쓰다듬고. 톡 까놓고 이야기 해서 지금 나한테 중요한 사람은 서령이가 아니다. 우선순위로 따지자면 저 한참 끄트머리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기억하는 서령이는 그냥 나를 잘 따르고 언제나 포근하게 웃어주는 고향친구였을 뿐이다. 물론 진짜 이 시대의 ‘장삼’이 나에게 씌이지 않고 이 마을에서 평범하게 살았다면, 확실히 서령이와 장삼은 자연스럽게 혼담을 진행시키고 이른 나이에 일가를 이뤄 무관 일을 도우며 짬 날때 마다 농사도 짓고 그렇게 죽을때 까지 애 낳고 알콩달콩 살았을거다.
그러나 들어앉은건 나다. 같은 마을에서 어릴때 같이 자랐다고 무조건 결혼한다…는 인식은 솔직히 현대인에게는 무리였고, 이미 다른 여자들까지 있다. 어릴때 계속 같이 자란것도 아니고 꽤 빠른 시점에 해남검파로 들어갔다. 나와의 접점은 백씨 아저씨를 통해서 몇 번 편지를 주고 받은것이 전부. 그나마도 뭐 연애편지라거나 그런 건덕지가 느껴질 부분은 정말, 개미 눈물만큼도 없었다.
“지금 나한테는 너하고 다른 애들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 걱정하지마.”
“미안해서 그렇지. 일은 내가 벌렸는데.”
“다음부터는 무턱대고 삼처사첩이니 그런소리 안하는거다. 알았지?”
“으응….”
식당에서 이야기좀 하자고 나온지가 꽤 지났으니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 서령이와 이야기 하는 것은 차까지 모두 마시고 나서로 충분하다. 나는 연이의 손을 꼭 붙들고 다시 식당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와 함께 앉아서 밥을 먹고 있던 서령이의 시선이 내가 연이와 잡고 있는 손으로 날아드는걸 의식할 수 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가족들은 모두 서령이를 축하해 줬다. 대체 살아 돌아온건 난데, 왜 서령이가 축하를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로 피폐하게 살았던 듯 했다.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약간의 근황토크와 함께 식후 차를 마시고 다 같이 내 방으로 왔다. 촌구석에 있는 집이라 방은 제법 크지만, 나까지 포함해서 다섯명이 둘러 앉으니 이제 좀 복잡하다.
“이야기는…들었어?”
“어? 무슨?”
“우리 혼례….”
“아…. 응.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
어색한 침묵이 방안을 휘감는다. 서령이는 지금 연이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다. 연이는 자신이 서령이를 받아들여주겠다는 입장에서 린이를 통해 서령이를 불러온거지만, 이게 또 입장이 미묘하게 되어버리다 보니….
“어떻게 생각해?”
“나는…. 그, 무림맹에서 있다가 좀 귀찮은 일에 휘말려서.”
“어떻게 생각해?”
“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죽은 사람처럼 살아야 하거든.”
사실, 애들이랑 느긋하게 돌아다니던거 생각해보면, 이 시대에 무슨 전산 관리되는 신분증이 있는것도 아니고, 지명수배 명단이 있는것도 아니고. 적당히 무림맹이랑 거리를 두고 살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걸리는건 연이다. 정실은 무슨. 연이가 내 정실이지. 그렇다고 화란이나 린이가 첩이라는건 또 아니고.
“삼아, 나는…. 너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 돼도 좋다고 생각했어.”
“고마워.”
“널 지켜주고 싶어서 무공 수련도 엄청 열심히 했다?”
“그랬구나.”
“그렇게 남 이야기 하듯이 하지 말아줘….”
“미안.”
그 편지에 구구절절하게 녹아있던 감정을 못 읽은거 아니다. 차라리, 어제 오자 마자 바로 만났으면 그냥 어영부영 또 여자가 늘어났을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더 이상 떠넘겨지듯이 여자를 늘리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아까 식당에서 서령이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지만, 지금 이렇게 눈 앞에서 보자면 역시 약하다. 우리 집안의 천지음양 어쩌고를 오래 수련하고 있는것도 아니니까 덜렁 고수로 만들어주지도 못한다. 가끔 후기지수들 중에 천고의 기재가 나와서 노고수들을 다 씹어먹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지만 노고수도 어느정도껏이어야지. 연이나, 화란이, 린이. 셋 중에 린이가 손가락만 튕겨도 나가떨어질 아이다.
“누구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아. 내가 제일, 제일먼저 삼이를 좋아했어.”
고개를 푹 수그리고 독백처럼 내 뱉는 그 말에, 안타깝지만 나도 다른 사람들도 그저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다. 해줄 수 있는게 없으니까.
“그럼, 시험을 하나 낼게.”
“연아.”
“나 때문이야. 오라버니에게는 미안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잘못한거지만 한 번만 더 용서해줘 오라버니.”
끄응. 이런 흐름 좋지 못한데. 결국 마음약한 연이가 넘어가는건가 싶다.
“백 소저.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지금 오라버니는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에요.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봐도 좋아요.”
“…네.”
“그래서, 당신이 오라버니에게 어울리는 여자인지 오라버니를 모시고 있는 여자로서 확인하고 싶어요.”
“무슨…. 무슨 권리로….”
방 안에서 연이가 기운을 끌어 올렸다. 내가 봐도 끝을 알 수 없는 경지의 파편을 조금 노출했다. 그것만으로도 서령이의 눈은 튀어나올듯 떠진다. 뒤이어 화란이와 린이도 경지를 드러내 보이며 방 안을 온통 광풍으로 채웠다. 이거 안 무너지나 모르겠다. 알아서 조절하겠지.
“강자존. 저를 비롯하여 오라버니를 모시고 있는 여자들은 누가 나서도 당신 하나쯤 손쉽게 지울 수 있어요. 납득이 되었나요?”
“…좋아. 내가 뭘 하면 되는거지?”
“잠깐만.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을….”
“그러면 그냥 죽여?”
연이의 눈이 또 예기를 띄운다. 그때 린이를 썰어버릴까 고민하던 그 눈빛이다. 으으음…. 아니, 아무리 감정이 없다고 해도 어릴때부터 얼굴보던 친구인데.
“그래요. 절 떼놓을거면 차라리 죽여요. 그 편이 삼이에게는 낫겠네요.”
“…간단해. 여기 린이와 검을 나누어보도록 해. 린이 너는 가급적 내공 쓰지말고.”
“네 언니.”
“가치가 없으면 죽여도 좋아.”
“야!”
이놈의 무림에서 가장 적응이 안되는게 바로 이런 상황이다. 무슨 술 먹다가 칼부림 나고, 이야기 하다가 칼부림 나고. 분위기가 너무 극단적이다. 고수들만 이러는게 아니라 무림맹 무사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왜 갑자기 서령이를 죽이냐 마냐 하는 이야기가 되는거냐고.
“저도 죽여도 되나요?”
“백 소저가 린이를요? 백 소저는 내공을 써도 좋아요. 그렇게 해서 린이에게 상처라도 하나 만들 수 있다면 이긴걸로 할게요.”
“치잇….”
그냥 봐도 그렇다. 내공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서령이가 린이에게 칼침을 먹인다? 불가능한 이야기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결국 서령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린이도 무뚝뚝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여기서 칼부림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장소가 협소해서 후원으로 나갔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보겠지만 연이가 기막을 둘러치면 소리때문에 누가 일부러 나와보진 않을 것 같았다.
“백 소저. 먼저 들어오세요.”
“그럼 사양 않고.”
밖으로 나와 자리를 잡고 서기 무섭게 린이의 신호로 비무…음. 이걸 비무라고 할 수 있나. 대련이라고 하자. 대련이 시작되었다. 린이는 평범한 철검을 꺼내들고 한 손을 뒷짐을 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서령이는 기합소리와 함께 달려들었다.
챙!
첫 손질은 무위로 돌아간다. 서령이는 린을 의식했는지 바로 물러섰지만 린이는 여전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칼을 내린 채 다시 들어오라는 듯 서령이를 바라볼 뿐.
“흐음…. 반수검(反手?)이네.”
해남반수검. 좌수검이라고도 불리우는 무공이다. 나도 실제로 보는건 처음이다. 옛날에 해남검파 소속이 된 서령이가 잠깐 집에 다니러 와서 보여준 적은 있지만 그때야 뭐 애들 장난 수준이었으니까.
반수검은 선천적으로 왼손잡이들만 익힐 수 있었다. 기행이 다르다나 뭐라나. 하여간 어릴 때 부터 왼손잡이였던 서령이는 장천무관에서 생활하며 양손잡이로 교정이 되었지만 해남검파로 입문하고 나서는 반수검을 사사받았다.
“응. 왼손잡이거든.”
“오라버니.”
“응?”
서령이는 왼손에 역수로 쥔 검을 숨기듯 등 뒤로 들고 린이에게 다시 덤벼들었다. 팽이 처럼 돌면서 왼손의 검이 뻗어나갔지만 린이는 몸 앞으로 검을 세우며 방어. 반탄력을 살려서 내공이 실린 움직임으로 오른손을 땅에 짚고 물구나무 서듯 몸을 뒤집으며 다시 서령이의 공격. 린이는 여전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몸만 살짝 비틀어 서령이의 검격을 흘러 낸 다음에 몸을 바로 잡고 있는 서령이의 목에 척 하고 검을 가져다 댔다.
“…치잇….”
“다시.”
린이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서령이의 목에서 검을 떼고 검 면으로 서령이를 뒤로 날려 보냈다.
“흠…. 린이가 조금 흥미가 생기나 봐?”
“그래? 방금은 왜 부른거야?”
연이가 부르는 말에 대답을 해 놓고도 린이와 서령이의 충돌을 보느라 깜빡했다.
“으응…. 아니야. 그냥.”
“싱겁기는.”
서령이의 재도전. 땅바닥이 푹 파이도록 발을 구르며 린이에게 달려들어 그대로 하단을 쓸었다. 린은 읽고 있었다는 듯 검면으로 서령이의 다리를 튕겨냈다. 서령이의 기색에서 살짝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튕겨나온 다리를 감아 반대로 회전하면서 왼손으로 칼질. 방금 전에는 허초도 섞여 있어 후기지수 수준이었다면 분명 통했을 공격이지만 안타깝게도 린은 검후다. 앞에 (전)을 붙여야 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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