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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치매대응반-35화 (35/122)

〈 35화 〉 무림치매대응반 35

* * *

“왜요!”

그거 원본좀 보겠다고 이 먼 길을…. 아니 공중수레로 느긋하게 와서 일주일도 채 안걸렸지만, 없다니까 맥이 탁 풀렸다. 원본을 불지필때 아궁이에 넣기라도 하셨을까.

“아니, 마을 사람들이 죄다 한 부씩 달라지 뭐냐. 필사를 해 놓긴 했었는데 그걸 그만 다 나눠줘 버려서 이번에 여러부를 만들려고 보냈다.”

아니, 인쇄를 보내실거면 깔끔하게 필사를 해서 보내시지 그걸또 홀랑 원본을….

“끄으응…. 그럼 사본이라도 주세요.”

“지금은 없다.”

“왜요!”

“다 떨어졌다니까. 내일 마을에 수소문 해서 찾아다 주마.”

“우리집 물건인데 집에 하나도 없다는게 말이 됩니까?”

“안될건 또 무어냐.”

원래 이런 집구석이었지. 젠장. 바로 원본을 보고 연이가 뭔가를 알아내 주기를 기대했는데 이러면 나가리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이만 쉬고, 내일 내가 구해다 주마.”

“그래 첫째 말대로 해라. 하아…. 잠이 올지 모르겠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일이형이 내일 구해다 준다니 그거나 믿고 있어야 겠다. 아, 혹시라도 원본을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뭔가 이, 그런거 있지 않나. 촛불에 그을려 보면 글자가 나타난다거나.

“원본도 좀 가져다 주십시요.”

“사본과 똑같은데?”

“혹시 뭐가 숨겨져 있을지도 몰라서 그렇습니다.”

“없을게다 아마. 그건 이 애비가 남경 저자에서 몇 냥 안주고 사 온 물건이야.”

으음…. 그렇다면.

“으으음?”

“헉! 삼아!”

“이게 무슨…!”

무력시위 삼아 기운을 조금 끌어 올렸다. 온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맹한 기운이 발밑의 먼지를 일으키고 실내를 가득 채웠다. 어머니와 같이 있던 연이들도 무슨일인가 싶어 이쪽을 쳐다본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을 흔들어 주고 동공 지진을 일으킨 아버지와 형님들을 다시 쳐다봤다.

“저는 제법 높은 경지를 이루었습니다. 구결 하나 모르는 상태로요. 그거, 뭔가 있습니다.”

“허어….”

“혹시 사 오실때 뭔가 이상한 것은 없었습니까?”

“전혀.”

“어떻게 된 것이냐 삼아?”

“작은 성취가 있었습니다 형님.”

구라다. 작은 성취는 아니지. 심지어는 내가 스스로 이룬 성취도 아니다. 하지만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밖에 나가 있는 원본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버지나 형님들도 어쨌든 무공을 수련하는 무인들이니 경지를 올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면 최대한 빨리 움직여주실거다.

“…알겠다. 쉽게 생각할 상황이 아닌 것 같구나. 원본을 가져다 주마.”

“부탁좀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다시 침중해졌다. 무림맹에 계시다가 세파가 싫어 해남까지 내려오신 분이니 생각만해도 골이 지끈거리는 상황이긴 하실거다.

“부인, 삼이와 소저들의 잠자리를 좀 봐 주시오. 오늘은 일단 쉬어라.”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와 형님들은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나를 다시 한번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이거 괜히 우환을 가져다 드린 것 같아서….

“잘 돌아왔다 삼아.”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은 쓸모 없다는 듯 아버지도 형님들도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두들겨 준다. 괜히 코가 찡해져서 멋쩍게 웃었다.

“네 방은 아직 그대로 두었단다.”

“예 어머니.”

“소저들은….”

“저희도 같이 쓰면 돼요.”

“신경쓰지 마세요 어머님.”

“끄으응….”

어머니도 머리가 아픈 모양이다. 죽은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온 건 좋지만 여자를 셋이나 끼고 돌아오다니. 애초에 내가 얘들을 왜 데리고 온거지? 그냥 숲속이나 토굴에서 쉬고 있으라고 하고 원본만 구해다가 같이 봐도 되는 거였는데! 이걸 이제야 눈치챘다. 연이와 같이 움직이는게 고작 두달남짓만에 숨쉬듯 자연스러워진 덕택에 골치아플 필요 없는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본체의 한 구석에 있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저번에 집을 나섰을 때 그대로였다. 좀 더 빨리 살아 있다는 기별을 알릴 걸 그랬다. 원본 확인 겸 직접 와서 보려는 생각 때문에 안 그러셔도 되었을 한달의 마음고생을 더 하게 만든 것 같아 괜히 죄송스러웠다.

“침상이 부족한데, 어쩌지?”

“우린 바닥에서 자도 괜찮아.”

“너희 셋이 위에서 자라. 내가 이불을 가져다가 바닥에서 자면 되니까.”

“아냐 오라버니. 우리는 어차피 잠을 거의 안자도 상관 없으니까.”

“맞아요 삼랑.”

“제가 바닥에서 잘게요 주인님.”

“내 말대로 해. 그냥. 내가 그게 편해.”

반론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연이가 말을 안 들어 먹는다.

“오라버니가 주무세요. 우린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설테니까.”

“응? 우리집인데? 왜?”

이미 집에 들어오기 전에 다 살펴봐놓고서는

“혹시라도 특정 시간에 살피러 오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으니까.”

“맞아요 삼랑. 무림맹 외당에 있을 때 그런 경우도 있었어요. 크게 중요도가 높지 않은 목표는 말이죠.”

아, 그러니까 상시 관찰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순찰하는놈들이 있을지 확인하겠다는거지? 뭔가 지금 막 가져다 붙인 것 같은 느낌이지만, 본인들이 그렇게까지 이야기 한다면 나도 모르겠다.

“알았다 알았어. 이불 좀 챙겨 올테니 기다리고 있어.”

내가 말한다고 듣는 애들도 아니고, 나도 내공의 수발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 지고 난 다음에는 크게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애들이 부득불 재웠다. 주기적으로 조금씩은 자 두는게 훨씬 몸 상태가 좋다고. 어머니께 들러 이불을 두어채 받아다가 방으로 들어왔는데, 애들이 협탁 주변에 서서 뭔가 쑥덕거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서령이 누구야?”

“엥? 니가 서령이를 어떻게 알아?”

“여기, 서령이라는 분께서 오라버니께 남긴 편지가 있네요.”

“주인님을 깊이 연모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으엉?”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걔가? 왜?

“어릴때 부터 알고지내던 사이기는 한데, 걔가 나한테 무슨 편지를 남겨?”

“우리가 펼처본 게 죄송할 정도로 오라버니에 대한 마음이 절절한 편지야.”

“문장이나 글씨가 뛰어난 편은 아니십니다만, 그 이상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군요.”

“이 나이를 먹고 이런걸로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일단은 그렇게 이야기 하니 나도 궁금해서 받아온 이불을 의자에다가 쓰러지지 않도록 잘 올려놓고 연이가 넘겨주는 편지를 받았다. 어디 보자아….

‘삼아. 나 서령이야. 그곳은 어때? 잘 지내고 있니?’

호. 제법 상투적인 인사로 시작하는 편지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쓰여져 있었다. 이건 뭐야. 편지를 쓰면서 눈물이라도 흘린건지 질이 별로 좋지 못한 종이가 여기저기 울퉁불퉁 울어버린 흔적까지 있다.

내용은 하나같이 애절하고, 아련하고. 음. 거의 일대기를 써 놨는데. 뭐가 이렇게 많아.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어땠고, 뭐 개울에 빠졌을때 내가 손을 잡아 줘서 따뜻했다는 둥, 날마다 넓어져가는 내 가슴에 안기고 싶었다는 둥….

“얘…왜 이러지?”

“오라버니, 이걸 읽고도 그런 반응이라니. 너무하네.”

“아니 정말 내가 이해를 못 할 이야기라서 그래.”

서령이. 백서령. 어릴때 부터 같은 마을에 있었다. 나야 장천무관의 자식이니까 그렇다 치고. 어릴때 부터 마을 아이들은 죄다 우리 무관에 와서 놀았던지라 그때부터 아는 사이긴 하다. 딱히 특별하게 더 친했나? 나를 잘 따르긴 했지. 무림에 떨어지고 나서는 대한민국 말년병장의 정신연령이었으니까 나이에 맞지 않는 어른스러움으로 동네 또래들을 죄다 끌고 다니긴 했다.

“정실이 없다고 하더니.”

“정실은 무슨. 스물하나? 마지막으로 본 게 그쯤이려나. 걘 어릴 때 부터 검에 재능이 있어서 해남검파로 갔거든.”

중간 중간 편지가 오면 적당히 격려의 말을 담아서 답장을 하기도 하고, 가끔 여모봉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같이 산책을 가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눴다. 그런데 정말 그 외에는 접점이 없었다. 그렇게 자주 본 것도 아니었고. 무림맹에 들어가기전에도 따로 인사를 하고 갔다거나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해남검파에서 잘 나가고 있다고 했으니까. 직전제자도 아니면서 동 항렬 중에서는 최고라고 들었다. 백아저씨가 우리아버지한테 와서 자랑을 했거든.

정작 검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해남검파 속가로 들여보내는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한 것도 아버지인데, 아버지한테 와서 나를 힐끔거리며 자랑을 해서 좀 꼴보기 싫었던 기억이 있었다. 어쨌든, 그 선머슴이 나한테 이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의외네.”

“뭐가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줄은 몰랐거든.”

“데려가시는게 어때요 주인님?”

음. 잠깐 고민을 해 봤지만 글쎄. 지금 이 할머니들이야 젊은 처자의 절절한 연서에 꽂혀서 지들끼리 데리고 가자는 둥, 역시 정실이 있었다는둥 주절거리고 있지만…. 딱히?

“그럴 필요가 있을까?”

“삼랑, 이 편지를 읽고도 지금 ‘필요’라고 하셨나요?”

으으음…. 무슨 심금을 울리는 예술작품이라도 본 것처럼 그러시는데 이보쇼 들.

“왜 나한테 여자를 더 못 붙여서 안달들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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