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무림치매대응반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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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고향이라는 느낌이 확실히 난다. 진짜 내 고향은 화천 시골이지만. 지금까지 계속 해안선을 따라 남하했음에도 고향의 바다내음은 또 달랐다.
“여기가?”
“응. 내 고향이야.”
해남도로 들어와서 우리는 수레를 착륙시켰다. 이동할 때 또 쓸 것 같아서 수레를 적당히 길가의 수풀속에 짱박았다. 사람 일 모르는거니까. 토굴을 파고 적당히 자리를 깔아 쉬었다. 공중수레를 타고 날아 오면서 연이나 화란이가 말하는 소위 ‘잡기’에 제법 능해졌다. 이제는 나도 주변 온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고, 기막이라거나 기타 유용한 방식으로 내공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밤에 가는게 낫겠지?”
“무림맹 쪽에서 기별이 왔을지는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오라버니는 죽은사람이니까.”
“삼랑께서 집에 드나드는걸 남들이 보면 좋을 건 없겠죠.”
“주인님께서요…?”
“응? 아, 린이한테는 이야기 안 했었구나.”
린이는 날아오는 동안 나랑 열심히 푹작푹작 수련을 했더니 아직도 정신이 멍한 것 같았다. 하긴. 검각에서 나와서 기억을 찾은 후 다음날 바로 여기로 출발했으니까. 기회를 봐서 나중에 이야기 해 줘야지.
“제가 이야기 해 둘게요 삼랑.”
“그래 그럼.”
그나마 린이 입장에서는 화란이가 제일 편할테니 그게 낫겠지. 연이는 누워있질 않고 연신 부스럭거려서 뭘 하는지 쳐다봤더니 등짐에서 옷을 잔뜩 끄집어 내 이것저것 몸에다가 대 보고 있었다. 뭐하는거야 쟤는
“뭐해?”
“어떤 옷이 좋을까 해서요.”
“대충 입어. 뭘 입어도 예쁘니까.”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무림제일화의 위명은 고작 옷 쪼가리에 영향을 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다.
“그래도, 오라버니댁에 처음으로 인사드리는 거니까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여야지. 너희들도 이야기는 나중에하고 이리 와 봐.”
“네 언니!
아니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건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그냥 자리에 드러누웠다. 살짝 잠이 들었다가 주변이 어두워진 후 연이가 날 깨워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동. 밤이라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달빛 아래에 드러난 연이와 화란이, 린이의 미모는 보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흠. 좋네. 나는 린이의 엉덩이를 툭 쳐주고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담을 넘어야겠지?”
“…그러네요.”
의기양양하게 집 문 앞에 섰…는데 생각해보니까 죽은 사람이 당당하게 문 두드릴일은 아니지. 그럴려고 밤에 온거고. 멍청한 짓을 할 뻔 했다. 일단 넷이서 넓게 기운을 퍼뜨려 장천무관 주변으로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를 탐색했다. 예를 들면, 일정 이상의 내공을 가진 사람이라거나, 민가가아닌 수풀 같은 곳에 숨어 있는 사람이라거나.
“잠시만요 주인님.”
린이 가벼운 몸짓으로 툭 하고 담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가더니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이러면 되는걸, 넷이서 같이 담 넘을 생각을 하고 있었네.
“고마워.”
“…네.”
어째 공중수레를 타고 오면서 한층 더 고분고분해진 것 같은데 이게 그렇게 지랄난장을 피우던 검후가 맞나 싶을 정도다. 칭찬의 뜻을 담아서 또 엉덩이를 툭 쳐주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집은 장천무관의 후원에 있었다. 후원이라기는 애매한 크기의 장원이지만 어쨌거나 무관으로 사용하는 부분과 거주 공간이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작은 마당을 거쳐 평소 아버지가 기거하시는 전각 앞으로 갔다. 저녁 식사 시간은 지났지만 아직 잠 잘 시간은 아니어서인지 다행히 방 안에 불이 켜져 있는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
“밖에 누구냐?”
“아버지…. 소자 삼이옵니다.”
“…무어라?”
와당탕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황급히 뛰어나오셨다.
“삼아! 정녕 삼이란 말이냐!”
“예! 아버지! 접니다! 아버지 아들 삼입니다!”
“이놈아…. 이놈아….”
아버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나를 끌어 안았다. 나도 가슴에서 뜨거운게 울컥 올라와서 아버지를 마주 안았다. 연이와 화란이 린이에게서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 무슨 일입니까!”
"일아! 삼이가 돌아왔다 삼이가!”
“예에?”
처마에 달린 등롱이 켜지고 집안이 밝아진다. 어머니, 형님 내외, 둘째형님 내외에 조카들까지 우르르 몰려나온다. 아. 잠깐만.
“쉬이이잇! 형님. 불 다시 꺼주십시요.”
“어?”
“빨리요.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빨리.”
아마, 무림맹 동급 무사 하나 사라진걸로 이 오라질나게 먼 해남까지 사람을 보내 놓지는 않았을거다. 솔직히 표국을 통해서 여기까지 내가 죽었다는 통지가 온 것만 해도 무림맹으로서는 할 일을 다 했다고 퉁 칠 가능성이 높았지만 조심해서 나쁠것은 없다. 나한테 덤비는게 문제가 아니라, 혹시라도 우리 가족을 해칠까봐 문제인거지.
“아이고…내새끼….”
실내로 들어오고 나서도 어머니는 내 손을 놓지 못하고 하염없이 쓰다듬고 계신다. 나도 손을 꼭 마주잡아 드렸다. 여기, 무림에 와서 생긴 가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생의 가족보다 소중하지 않은것은 아니다. 똑같은 가족이지 뭐.
“…그래서, 어떻게 된거냐?”
“무림맹에서 기별이 왔습니까?”
“기별뿐이냐. 네 골분까지 왔다.”
연이가 구해온 시신에게 잠시 묵념. 그렇게 했으면 감시의 눈길이 있을것 같진 않지만. 음.
“일단은 제가 살아 있는것을 주변 누구에게도 말씀하지 마십시요.”
“…그러마.”
과연, 무림맹 근무 경력이 있으신 분 답게 뭔가 일이 꼬였다는걸 먼저 눈치채신 아버지가 이유도 묻지 않고 그러마 대답을 하셨다.
“아가…. 그게 무슨 소리냐. 그게 무슨 소리야아….”
“어머니, 저는 당분간 죽은 사람으로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인, 삼이에게도 말 못할 사정이 있을테니 자꾸 묻지 마시오.”
“그래도….”
“그래, 살아있다 기별만 하자고 여기 해남까지 오진 않았을것이고, 뭔가 필요한 것이 있느냐?”
아버지가 용건을 재촉하셨다. 아, 혹시.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닙니다. 며칠정도 쉬었다가 갈 거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그러냐. 그거 다행이구나.”
아무래도 구체적인 이유를 말씀드리지 않은게 아버지 상상속에서 커다란 음모로 재탄생한 것 같았다. 엄. 그래도 괜히 휘말리게 해 드리고 싶진 않았다.
“아가, 이 소저들은 어떻게…?”
“아, 소개가 늦었네요.”
“상공을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종리연입니다.”
“초화란입니다 어머님.”
“모용린입니다.”
마침 기다렸다는 듯 연이와 화란이 린이가 셋이 주르륵 옆으로 서서 절을 한다. 어머니는 당황스러운 듯 손을 뻗어 연이 부터 차례로 일으켰다. 실내의 어두침침한 조명아래에서도 도통 숨겨지지 않는 세 사람의 미모에 처음 제대로 주목을 한 아버지와 일이형 이형이 넋이 나갔다.
“이…이게 어떻게 된거냐 삼아?”
“그러게….”
“그렇게 놀라시면 민망합니다 형님들. 저와 강호행을 같이 해 주고 있는 소저들입니다.”
“그…그러냐. 아, 앉으시지요.”
척 봐도 귀티가 좔좔 흐르는 여자들이라 아버지도 당황하신 모양이다. 어음…. 그러고 보니 이거 어떻게 소개를 할지 정하지를 않고 그냥 왔네. 대놓고 며느리들입니다 하기도 참….
“강호행만 같이 하나요 상공?”
“제대로 소개 안 해 주시면 서운한데요.”
“저희가 부끄러우신가봐요.”
아니 잠깐만,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연아, 그….”
“못본 사이에 난봉꾼이 되었구나 삼아….”
“아뇨 아버지 그게 아니구요….”
세 사람의 얼굴에 어린 장난기를 보니 골탕을 먹이기로 작정을 했나보다. 나 참.
“어흠…. 그냥, 예. 뭐…좋은 관계로.”
“그럼 못쓴다. 귀한 집 처자들 같은데.”
“아우 아파요!”
어머니에게 등짝을 한 대 얻어 맞았다. 그러면서도 연이의 손을 놓지 않고 계시는걸 보면 마음에는 드시는 모양이다.
“아무튼, 기별이 언제쯤 왔나요?”
“한 달쯤 되었을거다.”
“말 돌리는 것 좀 봐.”
알면 그냥 좀 넘어가라 연아. 아버지도 일단은 그쪽 이야기가 좀 더 관심이 가는지 형님들과 같이 내 쪽에 집중해 주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형수님들과 조카들은 세명의 호구조사에 돌입했고.
“그 이후로 마을에 외지인이 들어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까?”
“글쎄다….”
“수상한 사람이 장원을 기웃거린다던가.”
물어 놓고도 사실 그럴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작정하고 숨어서 살피려면 적어도 우리집 사람들 수준으로는 잡아낼 수 없었을 테니까. 집에 들어오기 전에도 한 번 체크했지만 일단 마을 전체를 봐도 크게 수상한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천지음양…그, 뭐였죠?”
사실 내가 익히고 있는 심공의 이름도 잘 모른다.
“그거? 천지음양…. 뭐였더라 첫째야?”
“저도 잘….”
“에잉, 장천무관의 관주가 될 놈이. 둘째 너는 기억 나느냐?”
“아버지도 형도 모르는걸 제가 어떻게 기억합니까?”
우리집에서 취급이 이렇다. 내가 구결이고 나발이고 기억을 못 하고 있어도 무리가 아니다.
“하여간 뭐 이름이 중요한건 아니니까, 그거 원본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아 씨. 불길한데, 아버지는 일이형을 보고, 일이형은 이형을 본다.
“지금은 없다.”
“예에?”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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