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무림치매대응반 31
* * *
“강시는 단순하게 독만 가지고 처리해서 되는게 아니니까.”
“몸은 좀 괜찮아?”
“으응. 좀 나른한 거 빼면?”
나도 알몸 위에 대충 옷 한장 걸치고 있는 상태긴 한데 연이는 나체상태 그대로 내 양반다리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똘똘이가 엉덩이쪽에 닿아서 몽글몽글한 느낌이 난다.
“갑자기 새로운 방식을 찾지 못한 이상은 그런 방식으로 강시를 만들 수 없어. 그건 아닐거야.”
“그렇게까지 이야기 한다면….”
“관련이 아주 없진 않을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무림맹에서 관리하는 고수들의 시체는 거의 다 화장이었으니까 시체도…아닌가? 여기 화란이 처럼 맹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던 고수들은, 아. 화란이는 그렇게까지 고수는 또 아니라고 했지? 혈강시를 만들려면 고수가 필요하다고 했었으니까 그럼 또 앞뒤가 안 맞는데….
“오라버니? 중원 무림의 미래를 걱정하시느라 바쁘신건 알겠는데. 좀 안아줘.”
“어…. 어? 미안.”
가만히 있던 손을 둘러서 내 품안의 연이를 끌어 안았다. 본인은 옛날사람이라면서 뭐 이렇게 스킨십은 또 개방적이신지. 눈앞에 화란이도 검후도 있는데.
“그럼, 검후께서는….”
“린.”
“린님 께서는….”
“언니, 이 사람 원래 이래?”
“삼랑께서 좀 그런 편이지?”
“시키는대로 다 했는데 왜 자꾸 선을 그으려고 하실까?”
“제가 검후님을 어떻게 해 보려고 시킨게 아니니까요! 아니, 애초에 사과라는게 미안하고 그래서 하는거지 제가 시켰다고 사과를 하러 갑니까? 욕을 먹고?”
“그러라며.”
아, 인성 진짜.
“그래서 어쩔건데요? 예?”
“어쩌긴 뭘요. 상공께서 시키는대로 해야지. 강제로 취하셔놓고는. 필요 없으면 버리면 될 거 아닌가요?”
아니 앞으로의 거취를 어쩌실거냐고 물어봤더니 왜 즙을 짜!
“오라버니, 내가 아까 잘 보듬어주라고 했잖아….”
“맞아요 삼랑. 린이도 이제 오갈곳이 없고 마음 붙일데도 없는데.”
“그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즙을 짜다가 몸을 기울여 화란이에게 기댄다. 화란이는 검후가 자신에게 기대오는것이 퍽이나 기쁜지 어깨를 감싸안고 토닥거려주었다. 해라 해. 지가 알아서 나한테 몸을 던지겠다는데 내가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한들. 죄다 어디서 한가락 하던 인간들이라서 다른 사람 말은 들어 처먹지도 않고. 옘병.
“마음대로들 하세요.”
“…그럼 오늘부터 저를 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예. 그럴게요.”
“예가 아니라….”
“아, 그만좀 합시다. 그건 차차 하시죠. 연이나 화란이도 시간이 좀 걸렸으니까요.”
걸렸던가? 안 걸렸던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연이나 화란이는 인성문제는 없었는데, 검후는 좀 그렇다. 지 밑에 있던 사람들을 막 대한것도 그렇고. 사과하고 오랬더니 뒤집어 엎어버리고 온 것도 그렇고. 지 잘못한거 사과하라니까 내가 시켜서 했다고 떠 넘기질 않나.
“오라버니, 정말 싫어?”
연이가 내 목을 감싸 안은채로 날 올려다보며 물어왔다. 흐리멍덩하던 눈빛이 점점 또렷해지면서 묘한 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지금 연이와 몸을 붙이고 있으니까 알 수 있는거지만 말랑말랑하던 몸도 슬금슬금 긴장감이 어렸다.
“내가 잘 돌봐주라고 했던건, 동질감이 느껴지고 가족에게서 버림받은게 딱해서야. 오라버니가 원하지 않으면 안해도 돼.”
검후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화란이는 안절부절하고 토굴안이 싸한 분위기로 차올랐다.
“어, 그게 아니라….”
“오라버니, 내가 있는 이상 아무도 오라버니에게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할 수 없어.”
순간적으로 갈등이 생긴다. 그때, 부스럭 하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깨졌다. 살짝 놀라 고개를 들어서 누군지 확인해 봤다. 검후다. 검후는 천천히 옷을 벗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보고 있는데, 벗은 옷을 옆에다가 가지런히 정리하고는 검을 꺼내서 앞에다가 꽂아 놓고 그 자리에 바로 납작 엎드렸다.
“천녀가, 혹시 불쾌하게 해 드렸다면 사죄…드립니다.”
“그래도 영 눈치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네.”
“응?”
연이는 내 품에서 몸을 돌려 그대로 검후쪽을 보고 비스듬히 누웠다. 화란이를 봤더니 자기는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 처럼 이제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아…. 아무래도 연이가 뭔가 한 모양인데.
“…살려주세요. 제가 들떠서….”
“그만, 지금 오라버니를 협박하고 계시는건가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검후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근데 살려달라니. 우리끼리 있을때는 거의 사용할 일이 없었던 전음으로 연이에게 물었다.
[죽이려고?]
[오라버니가 필요 없으면. 화란이 처럼 내가 곁에서 어떤 사람인지를 오래 지켜본것도 아니고.]
이럴때는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된다.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무림인이구나. 어쨌거나 검각도 정파로 분류되는 무리고 딱히 검각이 무림에서 혈겁을 일으켰다거나 그런 성향이 아닌걸 보면 검후도 그냥 사람이 좀 치졸할 뿐이지 악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텐데. 막상 또 내 결정으로 죽인다고 하니 거부감이 생기기도 하고.
[오라버니, 미안.]
[뭐가?]
[나도 오라버니한테 선택을 강요하는 것 처럼 되었네.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렇지. 지금 연이도 나한테 자기 가치관에 따른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거니까. 그런식으로 따지면 이것도 일종의 협박…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건 아니고!
“그만!”
“흐윽….”
“언니!”
급하게 소리를 쳐서 연이를 멈춰 세웠다. 사실 연이가 멈춰준거다. 애초에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 소리겠지. 연이정도의 경지라면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검후의 모가지만 깔끔하게 따서 바닥을 뒹굴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충분히.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건 나한테 선택의 여지를 남겨 준 것일수도 있고, 지가 내 말에 절대 복종한다는 걸 티내는 걸 수도 있고.
도망이라도 치려고 했던건지, 검후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몸을 일으켜 반쯤 뒤로 튀어나가는 자세였고, 화란이는 그걸 막으려 했는지 토굴의 출구쪽으로 이동 해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검후를 죽게하고 싶진 않았는지 연이를 불렀고. 연이의 칼은 정확하게 검후의 목덜미에 가로로 걸쳐져 피부를 살짝 벤 상태. 저것도 위협이겠지. 볼썽사납게 홀딱 벗은 검후는 아래로 소변까지 주룩주룩 흘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됐어. 그만들 해. 린이는 옷 입고.”
“예…. 예에….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저게 오늘 낮에 봤던 미친 인성파탄 검후와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딱 봐도 그냥 멘탈이 탈탈 털렸다는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애가 맛이 갔는데. 내가 옷을 입으라고 했다고 옷을 주워 들긴 했지만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어서 허공에 옷자락을 마구 펄럭거리고 있었다. 저걸…으으음….
“연이 너는 나하고 잠깐 이야기좀 하자.”
“응. 오라버니.”
내가 뭐라고 이야기 해 봐야 상황 수습에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혀를 한 번 차고 토굴 밖으로 나왔다. 하아…. 담배라도 피울 수 있으면 좋겠는데. 지금 시기면 저 유럽이나 가야 구할 수 있으려나.
“저쪽으로 좀 가자.”
내 뒤를 금방 따라나온 연이에게 대충 방향을 짚어줬다. 혹시나 알몸으로 나올까 싶었는데 뭐라도 걸치고 나온 모양이었다. 연이는 나를 안아 들고 경공을 펼쳐 우리가 파 놓은 토굴에서 멀리 이동했다.
“이쯤 하면 안들리겠지?”
“어? 그거라면 애들 바로 옆에서도 안 들리게 할 수 있었는데….”
“됐어. 하여간. 왜 그런거야?”
“뭘?”
“검후말야. 낮에는 뭐 객사할 팔자라느니 해놓고….”
“오라버니를 짜증나게 했으니까?”
짜증이 난건 맞지만, 아니 그렇다고 사람 모가지에 칼을….
“오라버니는, 스스로의 강함에 대해서 좀 더 자각할 필요가 있어.”
“내가?”
“이 나를 손 끝으로 부릴 수 있는것만 해도 고금제일인이라기에 부족함이 없다는걸 알아야 해.”
“그건 결국 내가 강한게 아니잖아.”
“아니! 오라버니가 강한거야. 나는 맹목적으로 오라버니를 따르고 있으니까. 당장 황제의 목을 따 오라고 해도 떠날거야.”
“그…그래, 진정해.”
어휴. 저 극단적인 눈빛좀 보소.
“히…. 나 아까전에 또 깨달음을 얻어서 더 강해졌다?”
왠지 칭찬을 해 달라고 강요당하는 느낌이라서 머뭇머뭇 손을 올려서 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니, 나이도 많고, 경지도 엄청나신 분이 왜 이렇게 나사가 수십개는 빠진쪽으로 사고를 전개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네.
“오라버니가 내공을 본격적으로 다루려면, 오라버니 스스로가 얼마나 강한지를 느껴야 해.”
“니가 있어서 강하다는….”
“아니, 그건 농담이야. 아, 물론 말 자체는 맞는 말이지만 오라버니의 공부와는 별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
“흐으음….”
“오라버니는 전반적으로, 약자의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어. 그냥 단순히 하류무사들의 그런것 보다 더.”
으으음…. 그건 아마도 내가 현대인의 자아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알아, 오라버니가 말해주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내가 나이가 있는데 사람은 잘 보거든. 그리고 그게 신뢰나, 애정의 문제를 넘어선 무언가일 것이라는걸 잘 알고 있어.”
“...어떻게?”
“오라버니는 날 아껴주고 있는걸. 나 뿐만이 아니라 화란이도. 아마 린이도 그렇게 아껴주겠지. 사람 잘 본다니까? 오라버니가 우리를 보는 눈빛에 애정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쉽지!”
“그래….”
거 말 안해도 된다니 참 편하긴 하네.
“그래도 언젠가는 꼭, 오라버니가 이야기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잊지 마.”
“알았다. 알았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