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무림치매대응반 18
* * *
“끄응….”
나도 어제는 피곤했던 모양이다. 초화란과 한바탕 뒹굴고 남은 치료를 마저 끝낸다음 종리연까지 끼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흠. 잠들기 전에 종리연에게 사과했던 기억도 난다. 아마, 나도 급변한 일상에 쫄았던 거겠지.
근데 종리연과 초화란은 어딜간거지? 하나는 옆에서, 하나는 내 위에서 잤는데 분명히. 일어나서 다시 말랑한 여체를 주물거릴 생각에 눈 뜨면서 살짝 기대했건만. 내 몸에 남아있을 어젯밤 정사의 흔적도 깔끔하게 지워져 있고 옷도 입혀져 있다. 뭐지?
“하아압!”
챙!
“흐앗!”
파앙!
뭔가 천막 밖에서 날카로운 기합소리와 함께 금속성의 충돌음이 들려온다. 대충 그림자를 보니 벌써 해가 중천이다. 오래 자긴 했다.
“이게!”
콰앙!
“왕년의 제일매화는 허명이었던가요 당주?”
퍼엉!
천막 밖으로 빠져 나온 나를 맞이한 광경은 언제 울창한 숲이었냐 싶게 피폐해진 풍경이었다. 바위는 깨졌고, 바닥은 푹 패였으며, 나무는 모조리 반토막이 났다. 천막 안쪽으로는 소리가 제대로 안 들어오게 해 놓았었는지, 천막 앞에서 한 발자국 떼어 놓으니 제대로 소리가 들렸다.
“앗! 오라버니, 일어났어?”
“히얏!”
“아야! 야이 미ㅊ…. 앗 따거. 오라버니랑 이야기하고 있는데 찌르면 어떡해?”
“그거 맞는다고 아플리도 없는 사람이….”
“옷에 구멍 날 뻔 했잖아!”
와…. 나는 앞으로 얘들이 뭐 말하면 그냥 잘 들어야 겠다. 이건 뭐. 인간 흉기네 흉기. 아니지. 흉기라는 표현은 너무 미지근한것 같다. 소형전술핵? 개 뻘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종리연이 내 옆으로 날아내려 나를 끌어 안았다. 주변을 이지경을 만들어 놓고도 땀 한방울 안 흘리는건 좀 자연에게 미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
“몸은 좀 어때?”
“누구. 나?”
내가 어제 몸 상할일을, 아! 마님한테 칼로 썰렸었지. 혹시 싶어서 어제 상처입었던 곳을 만져봤더니 느낌도 없다. 소매를 걷어 팔뚝을 봐도 상처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내공으로 힐도 하는건가? 그러고 보면 여기 와서부터 이미 아픈 느낌은 없었던 것 같은데. 초화란도 뛰어와 종리연의 반대편에 섰다.
“삼랑. 배고파요. 뭐라도 먹으러 가요.”
“아, 그럴까?”
“몸 괜찮냐니까?”
“괜찮아. 괜찮아.”
일행에 딱 한 명 늘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정신이 없다. 양쪽에서 서로 자기 말 부터 들어달라고 재잘거리니 원.
“초매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본인한테 물어야지.”
“치료는 연이 네가 했으니까?”
“엄청나게 강해져서 힘 조절이 큰일이네요.”
아, 그래서 아침부터 쑥대밭을 만들어 놓은 거구나.
“진룡객잔으로 가요. 맛있는 음식이 많아요.”
“그럼 그럴까? 연이 너는?”
“나야 오라버니가 좋다면 따라 가는거지.”
“그러자. 너희들도 얼른 씻고…갈 필요는 없겠네. 천막만 정리하고 바로 가자.”
“네!”
좋기도 하겠다. 어제 거기서 나올때는 다시 못 돌아오는 사람처럼 온갖 궁상을 다 떨었으면서. 잠자리를 정리하고 천막과 야영에 필요해서 펼쳐놨던 집기들을 챙겨 등짐으로 쌌다. 그리고 성 안으로의 이동은 종리연의 품에 안기어 하늘로 슝.
놀랍게도 초화란은 이제 종리연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여유롭게 경신술을 펼쳤다. 내공을 사용하는 데 지장이 없나보다.
“들어가요.”
그렇게 진룡객잔 앞. 두 사람은 얼굴의 절반이상을 가린 면사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길에 보이면 온갖 파리가 다 꼬일 미인들이었으니까. 귀찮은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점검을 마친 후 점심시간 직후의 진룡객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이 많이 빠져서인지 아니면 삼시 세끼를 다 챙겨 먹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가게는 제법 한산했고 2층의 전망 좋은 자리에 짐을 내려 놓았다.
“음식은 제가 시킬게요?”
“편한대로 하렴.”
종리연이 메뉴 선정을 초화란에게 넘겼고, 나는 옆에서 팔짱을 낀 상태로 자리에 앉아 고개만 끄덕거려 주었다. 여기 주인이 사실상 화란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여기, 잉어찜하고 죽순볶음주고, 술은 진짜 죽엽청으로 한 병 부탁드려요.”
“네. 다른것 필요하시면 또 불러 주십시요.”
“아, 그리고 미안하지만 마님을 좀 뵙자고 청해주세요. 진룡회주님의 전언이 있다고.”
그리고는 손 위에 은자를 하나 턱 쥐어준다. 장삼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1층으로 내려갔다.
“전언이라니?”
“그대로 떠나면, 큰일날 아이에요.”
“…떠나게?”
“지금 제가 이대로 여기에 남아 있으면, 그 아이도 오히려 괴로울거에요.”
으음…. 어떤 의미인지는 대충 알겠지만. 너무 극단적인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어제, 그 아이가 삼랑과 드잡이질을 할 때 다 듣고 말았어요. 바보같이 착하기만 해서는, 그럴땐 제가 죽거나 말거나 노망난 노인네 잘 죽었다고 도망을 쳐야지.”
“확실히, 그런 사람은 아니었지….”
“응. 오라버니가 그때 어떻게 하지 못했으면 정말 위험했을 정도로, 의지는 대단했어.”
“제가 죽은줄 알고 끝내 내 비쳤던 잠깐의 안도감 만으로도, 지금쯤 엄청 괴로워 하고 있을거에요.”
초화란은 뭔가 생각할 것이 많은지 창밖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찜요리를 주문했으니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탁자 앞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설마 마님이 벌써 온건가?
“왜 다시 왔습니까?”
어제 밤에 제대로 해혈을 해주지 않아서인지 마님의 목소리는 많이 답답해보였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종리연이 힐끔 마님을 보고 손짓으로만 어제 짚어 두었던 점혈을 완전히 풀었다. 눌렸던 혈맥이 풀어지면서 제법 편해졌는지 몸 여기저기를만져 보며 몸을 풀고 있는 마님에게 여전히 시선은 창 밖에 둔 채로 초화란이 입을 열었다.
“대모님으로부터 전언이 있습니다.”
“대모님은 어디 계십니까.”
“‘이제 나는 신경쓰지 말고, 네 인생을 살아라 현아.’ 이 말만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대모님은 어디 계십니까.”
“아, 또 있네요. ‘회주실 바닥을 뜯으면 회의 운영자금 중 네 몫으로 따로 떼어둔 것이 있다.’ 이상입니다.”
“대모님은…. 대모님은 어디 계십니까?”
그제서야 초화란의 눈이 현 이라고 했던 마님쪽을 향했다.
“그런건 몰라도 괜찮습니다. 아무튼 나는 그분….께 받은 말을 전해드렸으니 이걸로 끝입니다.”
마님은 한참동안 초화란을 노려보다가, 또 종리연을 노려보다가. 초화란의 입이 열리지 않을 것 같았는지 탁자에서 일어나 쌩하니 가버렸다.
“지금이라도 스스로 인생을 찾으면 좋으련만.”
“화란이 네가 이렇게 빠져준 것만 해도 충분할거야.”
“그렇다면 다행일텐데요.”
그리고 다시 창밖을 보며 사색에 빠지…는가 했는데 음식이 나왔다. 식탁에 따끈한 김을 뿜어내는 잉어찜과 맛깔나게 생긴 죽순볶음. 대나무 통에 들어있는 차가운 죽엽청.
“전 우리 가게의 잉어찜을 가장 좋아했어요.”
“그래서, 초매는 이제 어쩔거야?”
방금 마님한테 하는 이야기를 보니 진짜 여기서 더 머무를 생각은 없는것 같아서 슬쩍 운을 띄워봤다.
“두 분 따라가야죠. 딱히 뭐 할 것도 없고. 아, 설마 버리고 가려구요? 세상에. 몸도 마음도 다 가져가 놓고서는.”
“아니, 그건 아닌데. 여기 없어도 되겠냐는 거지.”
“제가 지금 면사 벗고 가서 진룡회주입네 하고 자리지키고 앉아 있어봐야 쓸모없는 짓이에요. 새 술은 새 부대에. 자꾸 제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일이 있을 때 마다 찾아대면 이도저도 아닌꼴이지요. 꼭 현이뿐만이 아니더라도. 이미 저희는 전대도 아니고 전전전대쯤 되는 사람들인걸요.”
어제 이야기 했던 것 처럼, 종리연도 과거의 연들은 깔끔하게 정리하고 내 옆에서 새로운 삶을 선택했다. 아마 아침에 둘이 대련을 하면서 이야기 한 것이 이런 내용이겠지. 더 이상 말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 초화란만이 가끔 진룡객잔과 진룡회의 추억을 이야기 했을 뿐.
많이 시키지도 않은 음식은 결국 금방 동이났다.
“다 먹었으면 일어 나자.”
“네. 그래요 삼랑.”
배는 적당히 찼고, 느긋하게 일어나 가게를 빠져나가려는데, 객잔 문 앞에 마님이 계신다. 무슨 일이실까. 마님의 목표는 초화란이었다. 마님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초화란의 앞을 가로막고 다시 질문을 던져댔다.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에 울기라도 했는지 눈이 온통 충혈되어 있었다.
“정녕, 대모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단 말입니까?”
“예 토씨한자도 빠짐없이요.”
“정녕, 정녕 그리….”
“몇 번을 물어보셔도 대답은 같아요.”
“알…겠습니다.”
마님이 문 앞에서 한 발 물러섰다. 초화란은 문을 나서기 전 다시 한 번 진룡객잔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나와 종리연은 기다렸다가, 초화란이 울것 같은 표정이 되어 발을 다시 움직였을 때, 그녀의 손을 잡고 같이 진룡객잔을 나섰다.
“…꼭…다시….”
마님이 뭔가 말을 하는데, 초화란은 듣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버렸다. 우리도 초화란을 따라서 진룡객잔을 벗어났고. 그렇게 걸어 가다가 왠지 뒷통수가 간질간질 해서 뒤를 돌아보니 마님이 오체투지를 하듯 진룡객잔 문 앞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저거….
“그냥 두어요 삼랑.”
“아니…. 저 현이라는 분도 알고 있는거 아냐 그럼?”
“모를리가 없지요. 내가 저를 거의 키우다시피 하였는데.”
초화란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난다.
“그래도, 진룡회주 초화란은 이제 죽은거에요. 그걸 현이에게 납득시켜주지 않으면 저 아이는 죽을때 까지 저를 찾을거에요.”
종리연은 손을 뻗어서 초화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종리연의 표정도 뭔가 씁쓸하다.
하긴. 종리연은 친자식한테도 외면받다시피 무림맹에 박혀 있었는데. 친자식도 아니라는 마님, 현이라는 사람은 죽을 위기에서도 초화란을 위해 달려들었으니까.
“그러니까, 돌아보면 안돼요. 저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에요. 제가 있으면 견디다 못해 언성 높였던 기억 하나에도 자책하고 괴로워 할 거에요.”
그거야…. 뭐. 간병 하다보면 인성 밑 바닥까지 득득 긁어서 개판나는게 사실이긴 한데.
“이제 없는걸로 해야. 현이도 홀가분하게 누군가를 이끌고 책임지는 사람으로 설 수 있을거에요.”
나와 종리연은 그저 말없이 초화란의 어깨를 토닥이는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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