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무림치매대응반 11
* * *
익숙한 냄새가 난다. 아니 분위기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연아. 저 할머니 지금.]
[나도 알아.]
방금 탁자를 박차고 날아오르려다가 그만. 음. 저런.
“대모(大?)님!”
장르도 애매해지고 분위기도 애매해지는 상황에서 나랑 종리연이 멀뚱히 서 있는데 3층에서 한 번 더 와장창 소리와 함께 녹색계통의…. 쌈무색이네. 쌈무색의 무복을 입은 여자가 후루룩 뛰어내린다. 종리연을 견제하듯 대모라 칭한 노파와 종리연의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또 내 쪽을 올려다 본다.
[나 산공독 안 풀었음.]
[아니까 가만히 있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전음도 종리연에게 배웠다. 아주 속성으로. 내공이 후달려 한 호흡에 몇 마디 하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무림인이라 치면 어? 전음 정도는 넉넉하게 할 수 있어야지.
“돌아가 주시죠. 아프신 분입니다.”
목소리에 찐하게 묻어나는 피로감이 안쓰러웠다. 아마도, 그쪽으로 아프신거겠지.
“차후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아뇨, 근자에는 온전한 정신으로 계시는 것이 하루에 일다경도 못되니 소용 없으실 겁니다.”
“제가 찾아온다는건 그쪽입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대모님의 수발을 전담하고 있으므로 도움이 될 일은 없을 것 같군요. 장삼!”
“..예?”
나 부른건가? 저 분이 날 언제 보셨다고.
“아, 그쪽의 대협께서도…. 저희 점소이 말입니다.”
“그렇군요.”
갑자기 내 이름을 불러서 나도 종리연도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거봐 장삼이라는 이름은 안바꿔도 될 거라니까.
“손님들께 음식값을 다시 내 드리도록 하세요.”
“예 마님.”
뭔가 종리연이 더 말을 붙여보려고 했지만 점소이 장삼에게 마님이라고 불린 여성분은 바닥에 널부러져 끙끙앓고 있는 노파를 추슬러 정리하는 것에만 집중할 뿐, 더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와야겠네. 가자 오라버니.]
종리연이 나를 올려다보고는 전음을 날렸다. 이런 이야기는 그냥 입 밖으로 내도 될 것 같은데. 풀어놨던 등짐을 주섬주섬 짊어지고 1층으로 내려오니 점소이 장삼이 아까 우리가 냈던 음식값을 환불해 주었다. 사방이 고요해진 상태로 온통 종리연과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뒤로하며 진룡을 나섰다.
“그럼, 돈이나 찾으러 가자.”
“이렇게 그냥 돌아가도 되는거야?”
“목적은 달성을 못했지만, 다음에 다시 오면 되니까 괜찮아.”
“그래 그럼.”
그 목적이 뭔지는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내가 알아야 하면 말 해 주겠지. 종리연이 내쪽으로 내미는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종리연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다른 곳을 구경하는 척 하며 나에게 전음을 날렸다. 안궁금한데, 본인이 이야기 해 주고 싶은가보다.
[방금 그 대모, 진룡회주야.]
그게 뭔데?
[소주에 있는 하오문 세력 중에서 제일 큰 집단이지.]
으응? 하오문이라는건 단일문파가 아니었음?
[무슨 생각하는 줄 알겠으니까 설명해 줄게. 보면 오라버니는 도통 무림인 같지 않다니까.]
솔직히 내가 무림인은 무슨 무림인. 쥐똥만한 내공으로 일반인들 보다 약간 힘이 좋다고 해서 무림인입네 깝치고 다니다가는 엄한일에 말려서 칼맞아 죽기 좋지…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무림인이면 뭐, 무림맹 남경지부 구내식당 찬모 아주머니도 무림인이게? 그냥 관계자지 관계자. 민간인출신 군무원 같은 느낌으로.
[하오문의 하오(下)가 무슨 뜻이야? 낮고 더럽다는 뜻이잖아. 상식적으로 오라버니 같으면 우리는 낮고 더러운 사람들입니다! 하겠어?]
[그건 아니지.]
[그냥 정,사 할것 없이 배에 기름낀 놈들이 쟤들은 낮고 더럽다는 식으로 불러대는게 하오문이고 하오문도야. 대놓고 그렇게 부르면 힘이 없으니까 대거리는 못해도 속으로는 욕한다고. 오라버니도 직접적으로 하오문이라고 부르는건 조심하도록 해.]
좋은 정보다. 하기사. 돼지라고 부르는건 사실이니까 참을 수 있어도 돼지라고 놀리는건 못 참는 법이지.
[그래서, 여기 소주의 그런 세력 중 가장큰게 방금 만난 접화신녀(?花??) 초화란인데 음….]
“응?”
[물어볼 게 좀 있었는데. 노망이 났네. 아, 저기야. 금저전장.]
하오문쪽의 줄이 살아 있는지 본다고 하더니 그 줄이 아까 그 할머니였나보다.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니었는지 길을 걸어 가던 중 황금돼지가 크게 그려진 건물을 보고 반색을 했다.
[다행히 그대로 있었네.]
가끔 나도 종리연의 말투때문에 착각 할 때가 있지만, 종리연이 무림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과 지금은 그렇게까지 간격이 크지 않다. 그만큼 치매를 확인한 뒤 무림맹 남경지부에 때려놓고 말려죽이는 타이밍이 빠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상한 것을 느끼고 칩거에 들어간 시간까지 포함하더라도 잘해야 5년? 21세기 현대사회처럼 미칠듯한 속도로 흘러가는 시대가 아니기때문에 그 정도면 거의 변한게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 이거 받아.]
“뭔데?”
[비밀금고 증서.]
이걸 날 주는걸 보면 나더러 찾으라는 것 같다. 음. 본인이 노출될 만한 일에 온통 나를 내세우는걸 보면 종리연은 딱히 나한테 뭐 호감을 느꼈다기 보다 그냥 딱가리가 필요했던게 아닐까?
“계십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금방 초로의 남자가 걸어나왔다. 시간대가 딱히 돈을 맡기고 찾을 시간대는 아닌듯 전장 안은 아무도 없었다.
[비밀금고의 내용물을 찾으러 왔다고 해.]
“비밀금고의 내용물을 찾으러 왔소.”
“증서를 주시겠습니까?”
[증서를 건네주면 안돼. 오라버니의 가슴앞에다가 펼쳐서 보여줘.]
내미는 손에 그대로 돌돌 말린 증서를 올려줄 뻔 했다. 실수 할 수도 있으니 종리연의 지시가 있고 나서 움직여야겠다. 내 가슴 앞쪽에 증서를 펼쳐서 세워들었다. 손을 내밀었던 적이 없었던 것 처럼 뻔뻔한 얼굴로 남자가 뒤로돌아서 안경같은 뭔가를 꺼냈다.
[수은과 경면주사를 섞은 암호문을 확인하는 과정이니까 가만히 있다가 이 다음에 저 남자가 무슨말을 하든 칠이라고 대답하면 끝이야.]
“흐음…이건 저희 전장에서 발행한 증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칠이라고 대답해.]
“칠.”
“잠시만 기다리십시요.”
내 입에서 칠 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뭔가 허공에 손을 휘젓듯이 계산을 하는 것 같았다. 음. 아마 기초적인 수준의 해시코드 같은 계산을 하는게 아닐까 싶다.
[다 끝났으니까 이제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돼.]
기다리면서 안쪽을 둘러봤다. 근데 무슨 비밀금고 어쩌고 하더니 상당히 허술한 느낌인데. 나름의 확인절차는 있는 것 같지만. 이러면 솔직히 내가 여기서 비밀금고 내용물을 받아서 나가다가 칼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
“여기 있습니다.”
[그냥 말 없이 받아서 나가자.]
종리연의 지시에 따라 남자가 내어주는 보자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종리연의 손을 잡은 채 전장을 나섰다. 뭔가 전체적으로 어설픈 프로세스네.
“나한테 조금 더 붙어.”
“이렇게?”
자기쪽으로 당겨 팔짱을 끼는 종리연과 바짝 붙었더니 눈앞의 풍경이 휙 하고 바뀌었다. 보이는건 푸른 하늘. 허미 엄청 높이 올라온거 아닌가 이거.
“이러면 못 찾을거야.”
“왜? 미행이라도 붙었어?”
“아니, 그냥. 찜찜하니까. 오늘은 성문 밖으로 나가서 자고 내일 들어와서 장원이라도 빌리자.”
“장원을?”
“조금 오래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일정이야 전적으로 종리연의 판단에 달린거니까. 장원을 빌려 놓으면 아무래도 객잔에서 이리저리 사람들하고 마주치는 거 보다야 훨씬 낫겠네.
“저쪽으로 가자.”
높은곳에서 좋은 안력으로 천막을 펼칠 만한 곳을 찾았는지 하강을 시작했다. 이렇게 상식을 넘은 수준으로 피해버리면 비밀금고 내용물이 궁금해 덤빈다고 해도 전장에 소속된 무인들 수준으로는 아무래도 추적이 불가능하겠지.
“여기 괜찮네.”
나무도 적당히 우거져 있고 가도에서도 제법 거리가 있었다. 들짐승같은건 애초에 논할 필요도 없고 종리연이 잠깐 기운을 뿜어낸걸로 바닥은 잔자갈 하나 없이 평탄화. 나는 그간 제법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우리가 머물 천막을 펼쳤다. 배가 살짝 고프긴 했지만 건량으로 대충 한끼 치워도 되고 이 정도 거리면 종리연에게 안겨 안쪽으로 들어가서 먹고 와도 괜찮다. 최 외곽이긴 하지만 가도 쪽으로 가면 노점같은것도 있으니까.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뭐야?”
“오호, 오라버니 눈치챘어?”
어차피 누가 따라 붙는다고 해도 나 하나 정도는 능히 달고 몸을 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진룡회주라는 초화란을 만나고 와서는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전장에서도 급하게 나오고. 요 며칠 겪은 종리연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찾은 돈으로 뭘 질러댔을텐데.
“그렇게 서두르는데야.”
“흠. 그럼 여기로 들어와봐.”
갑자기 불끈거리기라도 한걸까? 아니면 진룡객잔에서 보여준 나의 찐따같은 모습에….
“아무래도, 초화란. 치료할 수 있을것 같아.”
“뭘?”
설마 그걸 말하는건 아니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