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토끼굴에서의 시간
* * *
분위기가 영 서늘했다. 머리에 달린 귀를 눕힌채로, 차갑게 엘라이아와 키르야를 노려보는 메르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탁자에 손을 얹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듯,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가만히 땅만 바라보고 있는 엘프 여왕님과, 공주님 이라니. 암만 여왕에 공주라고 해도, 주인 있는 남자를 건드리는건 금기인건가 싶었다.
솔직히 이 녀석들 하는 짓거리 보면, 여기서 날 윤간 해 버려도 이상하지 않지만.
이내, 메르는 손뼉을 짝 하고 치면서 섬뜩하게 까지 보이는 표정을 지은채 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하게 설명 해 주시겠어요? 지금, 당장.”
날선 목소리를 내뱉으며 탁자가 으스러져라 손을 내려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엘라이아과 키르야가 동시에 몸을 쭈뼛 세웠다.
“그, 그게... 실은 메르가 맡긴 아이일 거라곤 상상도 못해서어...”
어라? 둘이 알고 있는 사이였어?
“끼이잉...?”
메르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하고 있는데, 이내 그녀는 내 머리를 슬슬 쓰다듬어 주었다. 아, 이거 시원한게 은근히 좋은데...
그러면서 한마디를 툭 내뱉는 것이다.
“알 수밖에 없죠. 마물은 원래 한다리 건너 서로 연락하고 사는 사이니까요. 그래서 믿고 맡겼던 건데. 제 믿음을 이따위로 배신하다니 참 웃기는 일 이죠?”
이 녀석 내 개짖는 소리를 알아 듣는건가.
“메르? 저 아이 말을 알아 듣는건가?”
“짐승 계열 마물이니까요. 당연히 알아 듣는거 아니겠어요? 당신네들 같은 엘프는 전혀 모르겠지만요.”
약올리듯 방긋 웃으며, 그리 대꾸하는 모습은... 뭐랄까, 생각보다 서늘하게 보였다.
하지만, 키르야는 그 나름대로 억울한 듯 탁자를 한 대 치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솔직히 저 녀석 미노타우르스가 데려왔단 말이야! 그때부터 개 마물로 타락 해 있었는데 네가 맡기는 그 아이인줄 우리가 어떻게 알아!”
아, 이거... 보아하니 메르는 나를 이 마을에 맡길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가는 길에 내가 딴길로 새서 모유 먹고 타락하는 바람에...
설마하니, 멀쩡한 애가 마물로 타락해서는 미노타우르스 품에 안겨서 올 거라곤 예상 못 했던 거겠지.
그래서 포로 삼아 마구 따먹었던 거고.
뭐, 나한테는 나쁘지 않은데. 솔직히 메르 입장에서는 영 거시기 할 테니까. 이렇게 날선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건 아니었다.
콰앙!
그때, 누군가 문을 박차며 들이닥쳤다.
“야 이 버러지 새끼들아! 니들이 남의 남편 돌림빵 했냐 씨이발!”
아, 리리스다.
거세게 벽에 부딪히며, 벽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창 변명하고 있던 키르야와 엘라이아의 안색이 창백해 지는게 나름 볼만한 광경 이었다.
“리, 리, 리리스님? 아, 아니... 이게 무슨...”
“잠깐, 그럼 저 애... 설마 리리스님의 남편이야?”
그제서야 메르는 고개를 끄덕 거리며 누나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탁자에 얹고서, 깍지끼더니 입술을 가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벌벌 떠는 소리가 훤히 들리는 것 같았다. 다리를 미친 듯이 떨어 대면서, 서로를 꼭 끌어 안고는 두려움이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후후... 이제야 누굴 건드렸는지 알겠어요?”
그리 말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메르. 이내 비웃는듯한 웃음을 흘리면서 엘프 누나를 향해 손을 뻗더니 볼을 살며시 매만졌다.
마치, 유혹 하는 것처럼 당장이라도 자기가 말 하는 것을 받아 들인다면 용서 해 줄 것 마냥 빙긋이 웃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볼을 매만지고 있는 메르의 소매를 붙잡고서 살며시 흔들었다. 그러자, 메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이시죠? 뭐 부탁 할 거라고 있나요?”
“개새끼들! 있는대로 다 뜯어 버려! 저새끼들 옷 존나 비싸니까, 그것도 좀 달라고 하고!”
“리리스 님은 입좀 다무세요. 이런건 저희 전문이니까.”
와아... 메르 원래 저런 성격 이었나. 차갑게 대꾸하고서, 바로 엘프 누나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까놓고 말 해서, 이 상황도 미리 계산 해 두고 있던게 아닐까. 메르가 맡겼던 나를, 저 엘프 누나들이 멋대로 돌림빵 한 것만 해도 큰일인데.
한낱 래빗에 불과한 메르만 있으면 대충 넘겨 버릴지도 모르니까, 딱 적당한 때에 오게끔 미리 짜고 친 거겠지.
솔직히 리리스도 너무 적절하게 들이 닥치기도 했고.
근데 난 따먹히지 못해서 아쉬울 뿐 이었는데. 그런것도 모르고 메르는 열심히 내 머리를 쓰다듬고만 있을 뿐 이었다.
“이, 일단 보상은 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대체 뭘 드려야 할지...”
리리스의 등장에 벌벌 떨고 있는 엘라이아에게, 그녀는 오만한 표정을 지은채 손가락을 까딱 거렸다.
약간 기분나쁜 표정을 보인 그녀는 곧, 뒤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리리스를 발견하곤 도로 다시 안색이 차게 식어 버렸다.
“자, 잠시...”
그대로 메르에게 고개를 들이미는 엘라이아 누나. 메르는 곧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뭔가를 작게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소곤소곤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틈새와 관련된 마법을 쓴 건지, 이 정신나간 청력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뭔가를 요구하는 듯 수군수군 거리는 것 같은데, 점점 엘라이아의 표정이 밝아지는게 보였다.
“정말... 그거면 되는가?”
“그거면 충분해요. 어차피, 서방님은 지금 제정신도 아닌거 같으니까요.”
으윽... 조금 찔리는데. 솔직히 말 해서, 지금 짐승의 정신을 갖고 있어 말 한마디 못하는 척 해야 하는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기에 끼어 들어서 좀 더 떡칠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둘의 협상이 끝난 듯, 여왕이 고개를 끄덕 거렸다. 내 성노예로 알아서 들어와 버린 주제에, 혼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참 대단도 하다 싶었다.
이내, 그녀가 옆에 있는 공주에게 뭔가를 속닥 거렸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그녀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메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도 뭘 좀 아는 것 같군. 자네가 제안한건 모두 내어 주겠네. 그러니 이번 일은 누구에게도 소문 내지 말고 넘어 가 줄수 있겠지?”
“물론이죠. 저는 가혹한 마물일 뿐, 거짓말 쟁이는 아니니까요.”
후훗 하고 웃으면서 그리 대꾸하는 메르는 어째 일이 쉽게 풀린 것이 썩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정작 그 협상의 장본인인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모르는게 안타까울 따름 이었지만.
“야, 너 저녀석이랑 뭐 한거냐?”
리리스도 못내 궁금한 건지 허리에 달린 날개를 파닥 거리면서, 메르에게 물어 보았다. 그런데, 메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리 답할 뿐 이었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에요. 일단... 서방님 먼저 데리고 가죠.”
“너네 집으로? 우우... 거기 다시 가는건 별론데.”
“그럼 딱히 지낼곳은 있나요? 또 누구 꿈에 들러붙어서 무단점거나 하실 생각인가요?”
“아으으... 알았어, 무슨 말이 그렇게 심한거냐구...”
툴툴 거리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는 나를 제 품에 꼭 끌어 안는 리리스는, 이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메르가 리리스의 손을 마주잡았다. 낑낑 거리고 있는 나를 제 품에 안아 든 채로, 메르는 말 없이 손가락을 한번 딱 하고 튕길 뿐 이었다.
엄마한테 안겨있는 애 같은 풍경일텐데, 왠지 모르게 허덕이는 것 같은 시선은 어째서려나...
그렇게, 스르르 어둠 속으로 시야가 가려가고 있을 때. 엘라이아와 키르야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려왔다.
“정말로 그걸 얻을 수 있는겁니까? 태닝 쇼타의... 집사복 사진을?”
“계약이니까. 어겨 버리면 우리가 직접 받으러 가야겠지? 후훗...”
역시나, 메르 이년... 그냥 받은게 아니었어.
아래로 떨어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바람이 위로 나부끼면서, 리리스에게 안긴채 어딘가를 향해 계속 추락하고 있었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면서. 의외로 폭신하고 편안한 느낌이어서, 그녀의 품에 안긴채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찬찬히 그녀는 추락하면서도 나를 쓰다듬고 있다. 언제까지나 이 쓰다듬이 계속 될 것만 같은 편안함에. 그대로 몸을 맡기고서 나는...
갑자기 눈꺼풀 너머로 붉은 빛이 스며들어 왔다.
“꺄우웅!”
갑작스러운 불빛에 놀라서 괴상한 울음 소리를 내질렀을때도, 그녀는 오히려 귀엽다는 시선만 보내 올 뿐이었다.
뭔가 부드러운 것에 떨어진 듯 통 통 거리며 폭신폭신한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매트릭스가 하나 토끼굴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리리스가 나를 안아준 채로, 매트리스 위에 일어섰다. 그리고는 여전히 와웅 거리며 짖는 소리를 내는 나를 바닥에 내려다 놓았다.
왠지 모르게 자꾸 귀가 쫑긋 거리고, 꼬리가 미친 듯이 흔들리는데.
아마 감정이 귀와 꼬리의 움직임에 관여 하는거 아닌가 싶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멈출 수 있지만... 굳이?
그렇게 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나를, 리리스는 말 없이 차분히 쓰다듬어 주었다.
어째 졸리기까지 한데...
“하아암”
하고 하품을 한번 쩍 했을 때, 메르가 나를 내려다 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은채로 말 했다.
“서방님? 이상한 흉내는 그만 내시죠.”
“뭐?”
리리스가 놀란 듯 메르를 바라보았다. 어라...? 언제 알아 차린거지?
“읏... 어, 어떻게 안 거야?”
아무래도 메르는 내가 일부러 개 짖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는걸 알아 차린 모양이다. 그래서, 언제 알았나 싶어 물어 봤는데, 그녀의 대답이 가관 이었다.
“타락 했다고 머리까지 띨띨해 지는 인간은 없거든요? 자지는 좀 커질지 몰라도, 서방님은 무슨 개 마냥 계속 짖어댔잖아요.”
후훗 하고 뒷짐을 지면서, 그녀는 살며시 허리를 숙여 내게 고개를 가까이 붙였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는게 보였다. 왠지 모르게 발랄하다 못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는 광경 이어서,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 시켰을 때.
메르는 그 어느때 보다도 요망하게, 토끼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 이마에 제 손가락을 얹었다.
손 끝에서 부드러운 체온이 스며들어 오는 것 같았다. 그대로 살며시 이마를 뒤로 밀어내며 장난스럽게 내게 물어 보았다.
“후훗... 한방 먹었죠?”
발랄하게까지 들리는 한마디에 내가 해 줄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게, 한방 먹었네.”
정말이지, 괜히 토끼는 아닌 모양이야. 저렇게까지...
그때, 뒤에서 그 꼴을 가만히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있던 리리스가 끼어들었다.
“둘이서 꽁냥 댈 거면 침대 위에서 하지?”
“여전히, 말이 직설적이시네요.”
“말은 그따위로 하면서, 씹물 질질 흘리고 있는 년이 뭐라는거야.”
순간, 방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내려가 버린 것 같았다.
이내, 메르가 내게 말 했다.
“서방님... 저기... 시, 실은... 토끼는 항상 발정기라서요. 후후...”
살그머니 고개를 가까이 붙이고는 곧, 속삭였다.
“잘 부탁드릴게요...♥”
덜덜 떨리면서 정욕을 흠뻑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게 굽은 눈을 내게 보여주면서, 메르는 젖은 한숨을 흘렸다.
역시, 마물은 마물인 듯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내 자지로 진정 시켜 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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