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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용사님은 패배 중독자-17화 (17/94)

〈 17화 〉 앨리스의 심정

* * *

“우으응...”

왠지 낮과 밤이 바뀌어 버린 것 같은 느낌. 몸에 스며드는 냉기에 나도 모르게 잠에서 깨어 버리고 말았다.

코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고서 미적지근한 무언가를 꼭 끌어 안았다.

내 품에 안겨있는 부드러운 무언가에서 나는 희미한 향기. 마치, 조그만 동물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뭐지? 뭔가 이상한데.

뭔가 잘못됐지만 애써 그걸 알아채지 않으려고 하는 것만 같다.

새근 새근 들려오는 숨소리는 몹시도 달게 느껴졌다. 숨을 들이 쉴 때마다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는 머리를 어질어질 하게 만들었다.

그 냄새에 깃들어 있는 가슴을 찌르는 감정은... 오래전에 느껴 본 적이 있다. 뭔가 잘못을 지었을 때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바깥에서 발을 동동 구를 때 느꼈던 따끔거림.

어머니는 이걸 양심의 가책이라고 했었지. 내가 뭘 잘못했었지?

사실 잘못은 차고 넘쳤는데.

집에서 붙들려 있기 싫어서 멋대로 빠져 나와 버리고. 그렇게 바깥에 나돌아다니다 멋대로 모험가가 돼서는, 살해를 반복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돈을 탐 하고, 보수를 더 내놓으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멋대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면서 문제 덩어리로 살다가 겨우 자리잡았다.

요즘 갑자기 마물이 날뛰기 시작했으니까.

내가 한 짓에 대해서 그분이 나름의 심판을 내리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 전쟁은, 그분이 내게 내리는 시험이리라.

이 순간을 넘긴다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한때 신을 모시면서 그분에게 바치는 춤을 췄던 무희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짓 이었다.

돌아간 탕아가 된다고 해 봐야, 환영 받지도 못할텐데. 그저 희미한 희망을 붙들고 싶어서 애써 무시해 버리고 만 것이다.

지금은 그런 것 과는 비교도 하기 힘든 따뜸거림이 느껴졌다. 마치,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처럼.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날숨. 들이쉬고 내쉬면서, 미적지근한 숨이 계속 불어왔다.

손을 아래로 내려 보았다. 부드러운 인간형의 무언가는 딱딱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손을 내려 놓을 때 마다, 달뜬 한숨을 내뱉는다.

대체 뭐지? 내가 뭔가 살아있는걸 안고 잤던가?

집에 들어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 그래... 그 아이.

숲에서 처음 봤던 그 약해빠진 아이.

아마 제국 외곽에 있는 정령을 섬기는 원시 부족에게서 추방 당했을 것이 분명한 녀석 이었다.

슬라임에게 겁탈 당하고 있어서, 내가 급히 달려서가 구해 줬었지.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슬라임 굴에 끌려 들어가 착정 당했을 터 였다.

두 번다시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고, 마물들에게 겁탈당하며 마물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구출하는 의뢰도 종종 맡았었고.

내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갔으면, 슬라임 따위에게 겁탈 당하지는 않았을텐데.

‘꼴에 부족의 명예라고 하지만... 암만 그래도 너무 약하니까.’

외곽의 원시 부족들은 오로지 정령과 힘의 논리만을 섬긴다. 그렇기에, 그 아이... 에스더라는 아이는 쫒겨나 버린 것 이리라.

솔직히 말 하자면, 너무 귀여워서 도와 줄 수밖에 없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척 하려고 빽빽 거리지만, 그래봤자 아이에 불과 할 뿐이다.

거기다 슬라임 따위에게 겁탈 당할 정도로 약한 아이니, 보살핌 받아야 하는데 괜찮다고 떼 쓰는것에 불과할 터 였다.

그래서 돌봐 주려고 했는데...

‘나한테 손 떼라! 나, 나는... 부족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선택 받은거니까!’

라던가

‘네가 도와주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었다!’

같은 소리나 해 대니. 너무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란게 문제였다.

‘정말이지... 그런 괴상한 성격만 아니면 괜찮게 생긴 녀석인데.’

하긴, 그렇게 떽떽 거리는 아이같은 면 때문에 귀여움이 더 붙어 버리는 거려나?

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갈색 피부에, 외곽 출신 소년답게 몸이 꽤 다부진 편 이었다.

처음 봤을때는 놀랐었지. 왠 미소년이 슬라임에게 겁탈 당하고 있었으니까.

급히 달려들어서 떼어 냈었는데, 내가 생전 보도 못했던 아름다운 미소년 인데다가 아이 답지 않게 복근까지 있어서, 살짝 가슴이 두근 거려 버렸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겉보기에는 건강해 보이지만 마물에게는 이길 수 없는 아이.

그런데도 부족의 명예를 위해서 선택받았다는 거짓말 따위를 철썩 같이 믿으면서 망치 두 개만 꼬나쥐고 거침없이 달려들어 버린다.

잠시라도 눈을 놓아 버렸다간, 어느새 마물에게 겁탈 당해 버릴 것 같아서 도저히 놓고 다닐수가 없었다.

이번에 마을 바깥에 일이 있어 나갔을 때 별 일이 없었던건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왠 고위 마물에게 강간 당하기도 했는데, 그 녀석은 이상한 소리나 하면서 떠나 버리고...

대체 누가 연적이라는 거야? 암만 그래도 이런 아이를 사랑 할 리가 없잖아...

조금은... 조금은 좋아 할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꽤 괜찮게 생긴 미소년이니까. 나중에 크면 꽤 훤칠한 미청년이 될게 분명했다.

우후후... 그때쯤이 되어서, 나한테 청혼이라도 하면 이 누나는 너무 좋아서 꼴까닥 죽어 버릴지도 몰라.

물론, 망상은 망상일 뿐이지만.

이런 아이들은 자기 자존심만 중요시 여기곤 해서, 제멋대로 날뛰곤 하니까.

나도 모르는 새에 아메스 언니한테 의뢰를 받아서, 하피들을 처리하러 갔다는 소릴 들었을때는 놀라 나자빠 질뻔 했었지.

슬라임도 못 이겨서 겁탈 당하는 아이가, 하피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급히 달려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하피들에게 안겨서 겁탈을 당하고 있었던 게다.

그래서 한바탕 따졌더니 언니는 알겠다고 하면서, 다시 책상에 고개만 처박아 버리고...

그래도 출장 갔을 때 아메스 언니한테 좀 봐달라고 부탁한 게 나름대로 먹힌 것 같다. 그 귀차니즘 환자도 제 나름대로 할 일은 한다는 건지...

그런데... 왜 불안하지? 뭔가... 하면 안될 짓을 저지른거 같은데.

오늘 그 아이를 집에 데려 오기로 했다. 언니한테는 미리 언급을 해 놓은 터였다. 그렇게나 바깥으로 나가고 싶으면 차라리 내가 훈련을 시켜 줄 생각 이었는데.

집에 와서 구경을 시켜 주고... 무슨 일이 있었지?

오랜만에 고기나 먹으려고 근처 가게에 들러서 스테이크를 좀 샀었다. 튀긴 감자도 같이. 이 집에는 부엌이 없으니까.

그리고 집에 들어왔을 때, 왠 시원스러운 향기가 느껴졌다.

킁킁 거리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 거려서...

그리고, 그리고...

무슨 일이...

순간, 정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눈을 번쩍 뜨고서, 내 품에 안겨있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그날 숲길에서 봤던 갈색 피부의 아이. 희한하게도 에스더라는 여자가 쓸 법한 이름을 가지고 있더란다.

도저히 떠나 보낼수가 없어서, 우리 집에 데려다 놓고 돌봐 주려고 했는데.

집 안에 들어오자 낯선 향기가 풍겨왔다. 순간 정신이 나가 버려서...

‘앨리스... 그만 둬엇...’

풀어 버린 표정을 보며, 가슴의 두근거림이... 이런 아이를 내가 안고 있으면서, 지배하고 있다는 음습한 욕망을 느껴 버리고 말았다.

그대로 이 아이를 나는...

슬쩍 이불을 들추고 속을 들여다 보았다.

부디 이게 평범한 꿈이기를 바라면서, 제발 내 생각이 들어맞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제발...

그리고, 이부자리 안에는...

천천히 그 소년이 눈을 떴다. 그리고는 몽롱하니 죽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나를 꼭 끌어 안으면서, 숨을 내뱉으며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누, 누나아... 깼어?”

마치, 망가져 버린 것처럼.

나,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천천히 잊어 버리려고 했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왔을 때 갑자기 그 아이를 보고서 가슴이 두근 거려 버려서, 덮쳐 버린 것. 그리고는 마구 유린하면서 못할 말 까지 내뱉어 버리고서...

“나, 나, 나는... 그, 그게...”

목소리가 떨리는게 느껴졌다. 이 아이에게 해서는 안될 짓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 버렸다.

죽어 버린 눈으로 내게 안긴채 그 아이는 젖은 숨을 내뱉는다. 마치, 나한테 푹 빠져 버린 것처럼.

완전히 망가져 버린게 분명했다.

“나아... 시, 실은 인간이랑 하는건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었는데... 누, 누나앗...”

그리 말 하며 내 가슴에 입을 대고는 혀를 굴려 댄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속이 차갑게 식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내게 겁탈 당해서 제 마음 따위는 포기 해 버리고, 내게 의지하게 된 것이 틀림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치만 난 왜 이 아이를 덮쳐 버린건데?

“누나? 괜찮아? 어디 아파?”

그렇게나 당해 버린 주제에 나를 더 걱정해주는 꼴이라니. 대체 왜? 어째서?

“미, 미, 미안... 나는, 그게... 대체 왜, 그랬는지...”

그렇게 애써 사과하려고 했지만 그걸 받아 들여 줄 리가 없다.

그렇게나 돌봐 주겠다고 한 주제에 갑자기 강간 해 버렸는데, 용서 해 주는게 오히려 정신 나간 일 이니까.

그러자 소년은 고개를 저어댔다. 그리고는 차게 죽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냐, 괘, 괜찮아... 그리고 솔직히... 조, 좋았는걸...”

아무리 봐도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며 나를 꼭 끌어안는 에스더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 지는것만 같았다.

대체 난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돌이 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영혼에 내어 버린 상처는 두 번다시 되돌릴 수 없다.

나은 것 같다 해도 어렴풋하게 보이지 않는 흉터가 남아 버리는 법이다.

아마 죽을때까지 낫지 않겠지. 남은 흉터는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고통을 안기리라.

“미안, 미안해... 정말로.”

내가 해 줄수 있는건 하나밖에 없었다.

그 아이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내가 지은 죗값이니, 달게 받아야만 했다.

“누나?”

떨리는 목소리로 내 품에 안긴채 그 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희미한 공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누나가... 책임 져 줄테니까.”

최소한 이 아이를 책임져야 했다. 멋대로 일을 저질러 버린건 나니까. 놓아 버릴수는 없다. 비록 신도 버리고, 무희로서의 일도 그만둔채 고향을 떠나 버렸지만. 그렇다고 최소한의 도리마저 저 버릴수는 없었다.

“채, 책임?”

“응... 누나가 잘못했으니까... 절대로 떠나지 않고 지켜줄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려무나.

뒷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강간 해 버린 녀석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해 봤자 들을 리가 없으니까.

그때, 어렴풋하게 울음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게 안긴채로 뒤늦게 공포와 서러움을 흘려 내는게 분명했다.

근데 그 사이에 욕지거리가 들린 것 같은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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