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역간 모험의 시작
* * *
등에서 폭신폭신하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눈꺼풀 너머로 햇살이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시야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묘하게 푸근한 냄새가 나는 장소, 거기다 생전 처음듣는 숨소리 까지 곁에서 들려왔다.
“으으응... 여긴 또 어디야...”
겨우 정신을 차리는 척 하며 고개를 저어 주변을 살펴 보았다. 푸근해 보이는 큼지막한 방에는 침대가 여럿 놓여 있었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촛대와 나무로 되어 있는 방.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까지.
여기는 아무래도 여관의 2층인 것 같다.
“얘! 괜찮니? 어디 아픈데 없어?”
그때 곁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그리로 돌리니, 익숙한 여인이 서 있었다.
길게 자라있는 금발에, 등에는 방패와 검을 매고 있는 소녀. 일명 특수직업 : ‘용사‘ 앨리스.
물론 이 게임은 다른 여자 마물들에게 강간 당하는 것이 주요 컨텐츠인 게임이므로 앨리스는 사실상 다회차 캐릭터나 다름없다.
확실히, 이 게임의 몇 없는 인간 여자가 그런지 가까이서 봤을때는 예쁘게 생겼다. 마물이 없다면 아마 미녀로는 1위를 다투지 않았을까.
하필 마물이 있어서 그 미모가 바래 버렸지만.
그런데 왜 앨리스가 여기에 있지? 저 녀석은 다회차 전용 동료 캐릭터인데?
설마, 내가 다회차 주인공이라 앨리스 까지 따라 온 건가?
아... 그럼 재미 없는데.
그야, 앨리스는 너무 강캐라서 마법 한번만 써버리면 마물들이 죄다 경험치로 산화해 버리니까.
내 목표는 마물들에게 강간 당하는 거지, 앨리스를 데리고 초고속으로 엔딩을 보는게 아니다. 저 녀석이 끼어 버리면 괜히 나만 귀찮게 되는 것이다.
일단 떨쳐 내야 하나... 근데 무슨수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채로 나를 바라보는 앨리스를 보고 있자니, 차마 강간 당하고 싶으니 떠나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일단은... 그럴듯한 변명을 해야 하는데.
으음... 그러고 보니 난 문명권 바같에서 자라났다는 설정 이었지? 그러면 좀 버릇없이 대해도 상관 없지 않으려나?
그래! 그러면 되겠네! 어차피 원시인이나 다름 없는 녀석이니, 임무가 있다는 핑계로 손을 쳐 내면 될 터였다.
“슬라임한테 범해져서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 했어. 조금만 늦었어도 녀석들의 둥지로 끌려 갔을거야. 도대체 얼마나 약하길래 그런 녀석한테...”
손을 꼭 부여 잡은채로 걱정해 주는 앨리스를 있는 힘껏 쳐냈다. 그러자 그녀는 놀란 듯 뒤로 물러렀다.
“나, 나는... 너 따위에게 구해 달라고 한 적 없다! 그런 녀석 따위는 얼마든지 처치 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끼어 들어서... 부족의 명예를 더럽혀 버리지 않았느냐!”
“부족? 명예? 마물한테 잡혀갈 뻔한 널 구해줬는데 그게 할 소리니?”
버럭 성을 내며 내게 따지는 앨리스. 옳지, 제대로 먹히는 구만! 하긴 나 같아도 다짜고자 은인한테 명예 같은 소리나 하는 애송인 싫을 수 밖에 없지.
“네가 알 바 아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선조님들의 혼이 나를 지켜봐 주고 계신다. 그분들의 땅에 네년 따위가 설 곳은 없다!”
그렇게 외치며 냅다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그러자, 갑자기 앨리스가 제 눈을 가리며 샛된 비명을 내질렀다.
“꺄악!”
응? 갑자기 왜...
“아, 이런.”
아래를 내려다 보니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나는 유일하게 입었던 옷이 녹아 사라진 상태였으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알몸이었다.
“읏...”
슬쩍 고간을 가리며 그녀를 훔쳐 보았다. 설마 발기한걸 들키진 않았겠지.
마물에게는 강간 당할거니까 상관 없지만, 암만 그래도 인간한테 풀발기 자지 따위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 일단... 옷부터 입어.”
그녀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가벼운 옷을 가져다 주었다.
휴우... 그래도, 바깥에서 알몸으로 다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나라는 희한하게도 여관과 술집, 길드가 한 건물에 뭉쳐 있는곳 같다. 요컨대, 한 건물에 모험가와 술꾼, 의뢰를 맡기러 오는 사람들이 죄다 몰려 온다는 뜻이다.
“아니, 그러니까! 이번에 준 의뢰가 왜 아직도 완료 되질 않았냐구요!”
“제가 몇 번을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너무 값이 짜서 하려는 모험가가 없다니까요!”
사무원으로 보이는 엘프와, 왠 이름도 모를 의뢰인이 옥신각신 싸우는 광경이나.
“느어얽... 우에에에에에엑!”
“그러게 작작 좀 퍼 마시라니까 이 양반아!”
술을 너무 퍼 먹어서 바닥에 토하고 있는 마법사와, 그 마법사의 등을 두들겨 주고 있는 전사.
“.....”
왠지 ’도적이 될 자는 나에게로.’ 같은 말을 할 것 같은 검은 옷을 입은 도적이 천장에 매달려 있거나.
“저기요. 하루 묵는데 돈이 얼마라구요?”
“그럼 값을 좀 올리세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1실버 가져온것도 겨우 챙겨 온 건데!”
옥신각신 하는 둘 사이에 끼어, 무시 당하고 있는 투숙객 까지.
한마디로 말 해서 개판 이었다.
그런 곳에 가만히 서 있으려니 왠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슬쩍 고개를 바닥에 내려 버리고 만다.
이거, 의뢰나 제대로 받을 수 있으려나...
너무 제멋대로 돌아가는 개판이라서, 소리좀 질러야 할 것 같은데. 거기다 이름모를 의뢰인은 한참을 씩씩대고 있으니, 끼어 들기도 좀 애매했다.
“그으으... 그럼 더 들고 올테니까 딱 기다리고 있어! 알겠냐?”
“알겠으니까 빨리 꺼져요!”
“말 본새 하고는!”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일이 끝나 버린건 우연이련지. 그 이름모를 남자는 성큼성큼 성이 난 듯 걸어서는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자 마자 엘프는 책상에 늘어져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진상 민원인을 상대하는게 심하게 힘든 모양이다.
“후우... 그냥 그만둘까.”
“거기 너!”
“응?”
크게 그 엘프를 향해 외치니, 그는 고개를 저어가며 나를 찾아 댔다.
아니, 나 아래에 있는데? 키 작아서 안보이는 거야?
”너! 나를 무시하는거냐!“
“이상하네... 이젠 환청까지 들리는 건가...”
뭐야? 이젠 키 작아서 안보인다고 환청으로 치는거야? 너무한거 아냐?
“너 이 귀쟁이 새끼! 누가 환청이라는 거냐!”
“귀쟁이? 후우... 진짜 그만 줘야하나.”
저기요...? 저 아래를 좀...
“아메스씨. 아래에 있잖아요. 아래에.”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땅이 갑작스럽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라?
“아... 키가 작아서. 죄송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엘프는 끝까지 키가 작아서 못봤다는 핑계를 댔다. 정말이지, 암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거 아닌가?
“그건 됐다. 너! 내게 임무를 다오!”
“임무요?”
“아메스씨, 이 꼬마아이... 아무래도 모험가인거 같은데요.”
“이 녀석이? 앨리스 너 정신 나갔니?”
갑작스럽게 미쳤다고 묻는 아메스라고 불린 엘프는, 곧 나를 날카롭게 째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위아래로 꼼꼼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 하며 이리 말 하는 게다.
“너, 그러고보니 그 슬라임한테 겁탈당한 녀석 아니냐?”
뭐, 뭐가 문제야! 게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임무 줘 놓고선!
그건 게임이고, 이건 현실이라서 이러는 건가. 암만 그래도 애라고 무시하는건 좀 너무한다 싶다.
“그, 그건... 녀석이 너무 물렁 거려서!”
“아하... 처음이라서 그랬다 이거구만. 그래도, 너 같은 애한테 마물 퇴치를 맡기는건 좀 그런데... 거기다 너 무기도 없잖니.”
“무기가 없어?”
어? 내 무기 어디갔어?
아... 그러고보니 그 슬라임 한테...
“그, 그건 상관 없다! 일단 나는 마법을 쓸 수 있으니, 그런 적 따위는...”
“마법 쓸 수 있는 녀석이 슬라임한테 졌니?”
방긋 웃으며 차갑게 대꾸하는 엘프의 말에, 차마 대답 할 수가 없었다.
제길, 시작부터 이게...
“그 무기, 저한테 있어요.”
“응? 앨리스 네가?”
“그 슬라임이 무기는 놓고 갔더라구요.”
라고 하면서, 갑자기 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총총히 위층으로 올라가더니, 무언가를 들고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는 양손에 메이스 하나씩을 들고 온 게다.
“이거에요.”
그러자, 엘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 같은 애가 이런걸 들 수 있다고? 라고 생각 하는 것 마냥.
“이걸 네가 들 수 있다고? 그럼 한번 해 보렴.”
그리곤 내게 턱짓으로 무기를 가리켰다.
“당연하지! 나는 부족의 선택 받은 이니까! 그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라고 당당하게 외치면서, 그녀가 가져 온 무기를 양손에 쥐었다. 의외로 그리 무겁지는 않은데... 역시, 힘스탯이 잔뜩 쌓여서 그런가.
“흐으음... 힘은 어느정도 있는거 같네. 뭐, 원칙상으로는 무기까지 있으면 의뢰를 맡아도 상관 없는데... 그래도, 애한테는 좀...”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
아니 빨리 강간 당하고 싶다고요!
도대체 이 엘프는 왜 이리 눈치가 없는건지. 아니, 그래도 걱정 하는게 당연한 건가? 어쨌든 나는 슬라임에게 강간 당한 녀석이었던 것이다.
최약체 슬라임에게 당할 정도면 다른 녀석에게도 질 수 있으니, 영 마뜩찮은 거겠지.
한참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노려보던 엘프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 저으려 했다. 그때, 앨리스가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제, 제가... 보증할게요!”
“앨리스 네가? 그치만, 이 녀석 정말로?”
아니 내 말은 씹으면서 앨리스는 왜!
“어쨌든, 정말로 실수 일수도 있잖아요. 거기다 제가 구해줬으니가. 제가 책임지는게 맞아요.”
그렇게 말 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앨리스, 뒤늦게나마 고마움이 샘솟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간 당하는게 목적이지만.
“흐으으으으음.... 네가 그렇게까지 말 한다면, 뭐... 상관 없겠지.”
엘프가 곧 종이를 하나 가져왔다.
“난 책임 못 지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알겠지?”
지극히 공무원적인 마인드로, 내게 그 종이를 건네는 엘프. 종이에는 하피 둥지를 정리 해 줄 모험가를 구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하피?”
“그래, 날아다니는 마물이지만... 머리가 나쁘니까. 슬라임 다음으로 약해 빠졌거든. 둥지 하나 처리하는데 그렇게 큰 힘도 필요 없을거다. 설마 그것도 못 하지는 않겠지?”
“당연하지! 나를 뭘로 보는가!”
물론 강간 당할겁니다. 죄송합니다 엘프 아조씨.
그대로 종이를 들고서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허리춤에 둔기 두 개를 맨 뒤 바깥으로 나섰다.
문득,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노려 보는 것 같았는데...
설마 착각이겠지.
좋아! 그럼 강간 여행 시작이다!
그렇게, 내 역간 여행은 꽤나 순조롭게 시작하는 듯 싶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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