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제45 화
* * *
상쾌한 아침 공기도 쐬고, 카렐렌과 훈훈한 시간을 보내는 둥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제 레니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어젯밤의 여운을 되새김질하면서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황금사과 상회로 돌아가는 것뿐일 터였다.
그러나…아침부터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려 더 없이 기분이 좋았어야할 그에게 루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꽤나 표정이 어두워 보이네. 뭘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거야?’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말이지.’
‘흐음…좀 전의 여자 때문이야?’
‘뭐…. 그렇지.’
‘확실히 예사롭지 않은 살기였지. 하지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아무리 세상이 평화로워졌다지만 사람 사는 곳인 이상 누구나 진심으로 죽이고 싶은 상대방 하나 정돈 있는 법이겠지.’
‘그런 거겠지….’
레니스는 루아에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굴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렇게 치부하고 단순히 넘어가기엔 카렐렌의 눈에 한순간 스치고 지나갔던 살기가 너무도 서늘했다.
그것은───, 이미 단순히 누군가를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살기가 아니라 그걸 위해서라면 자신의 파멸마저도 염두에 두지 않겠다는 귀기의 영역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본인이 들으면 화내겠지만 평소에는 조금 덤벙거리는 구석이 있지만 검술 실력만큼은 몹시 뛰어난 카렐렌 정도의 소녀가 저 정도의 한을 가슴에 품게 된 것일까.
레니스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사람은 결국 혼자다. 정말로 본인에게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는 타인이 도저히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자기 자신은 자기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
(…라고 어제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겠지.)
(물론 지금도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허나 레니스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그가 만났던 소녀들을 떠올려봤다.
황금사과 상회의 아스텔과 그녀의 호위역인 리노아.
파미유의 리카, 유이, 레아.
그리고───, 과거 마치 친누나처럼 이것저것 자신을 보살펴주던 검후를 떠올리게 만드는 카렐렌.
덤으로 소녀라고하기에는 다소 미묘한 감이 없지 않지만 루아까지.
어쨌든 결론적으로 레니스는 그녀들 덕에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게 되고, 또 과거를 마주 보며 좀 더 나은 삶도 있지 않았을까, 그때 이런 선택을 했으면 어떠했을까와 같은 미련과 소박한 행복 속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끝내 150살 동정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보다 긍정적으로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감정의 정화였다.
그 결과 세상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조금 변했다.
그것은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고 해결하는 과거와는 달리 남들에게 의지도 하는 삶이었다. 언제나 강한 상태로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도 보이고 응석도 부리는 삶이었다.
그러한 삶은 그에게 있어서는 나약해졌다고도 할 수 있는, 너무 오래 잊고 있어서 이제는 낯설게만 느껴지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의 자신이 나쁜 기분은 아니란 점이었다.
(그래…마치 용사파티에 처음으로 들어갔을 때 같군. 이렇게나 마음이 가득 차는 감각을 나는 그동안 왜 잊고 있었을까.)
그리고 동시에 레니스는 그가 왜 이렇게 카렐렌에게 신경쓰게 됐는지도 깨달았다.
(과연…과거의 날 보는 것 같아서였는가.)
어느 순간부터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 하는 과거 자신의 모습이 그녀 위에 겹쳐 보였다.
그것은 보는 이들에게 이렇게나 위태로움을 느끼게 했음인가. 그렇다면 그때 날 바라보던 용자와 동료들은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동료들을 배려한답시고 역시 상당히 미안한 짓을 한 것만 같아 레니스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제는 그들에게 속죄할 방법 따위 남아있지 않겠지만………,)
그 대신이라고는 뭐하지만 그래, 카렐렌에게 의지가 되어주도록 하자. 그녀가 가진 어둠을 직접적으로 해결해준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다만 다른 소녀들이 날 받아들여준 것만으로도 내가 변한 것처럼…그녀들이 내게 준 것을 이번에는 내가 카렐렌에게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레니스는 진심으로 바랐다.
이렇게 레니스가 어느 정도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였을 때였다.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그를 보더니 서툴게 인사를 해왔다.
“여…여어.”
“안녕하세요. 에안씨.”
연갈색 머리에 살짝 찢어진 눈이 특징인 에안 제이너다. 인상 때문에 비열하다거나 안 좋은 성격으로 오해받기 쉬워 보이지만 생각 외로 선한 사람이라고 레니스는 그에 대한 평가를 고쳤다.
레니스와는 그가 모험가 길드에 가입하는 날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지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도 의식을 되찾은 다음날 곧바로 그쪽에서 먼저 레니스에게 사과해오며 서로 감정을 해소했다.
“너 정도 되는 녀석도 아침 훈련이냐?”
“훈련이라고 할 정돈 아니고 그냥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주변을 걷고 있었습니다.”
“흠…잘은 모르겠지만 너에겐 그걸로도 충분하겠지. 그나저나…”
“네?”
그는 잠시 말끝을 줄이다가 레니스에게 물었다.
“호…혹시 모든 마(?)를 멸하는 자가 너냐?”
“네…?”
꽤나 거창한 칭호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와 레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얼빠지게 반문했다. 그러자 그는 그런 레니스의 반응을 보고 뭔가를 눈치챘는지 다시 물었다.
“음…의외로 이런 소문은 정작 당사자는 둔감한 법일지도 모르지. 어제 수도 상공에 나타난 몹시도 불길하고 거대한 붉은 뱀을 일격에 베어 버린 게 혹시 자네였나?”
“모든 마를 멸하는 자라는 가창한 칭호에 대해선 짐작가는 바가 없습니다만, 일단 어제 붉은 뱀을 처리한 건 제가 맞습니다.”
“여…역시 내 예상대로였군. 뭐 이 몸을 가뿐하게 이긴 너 외에 그게 가능할 실력자는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그리고…사실 이쪽이 본론인데…”
에안은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간절히 묻고 싶은 게 있지만 쉽사리 꺼내지 못하고 주저하는 거 같았다. 레니스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이내 그는 결심했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물었다.
“호……호…호호…혹시 이미 했냐?”
“네?”
너무도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레니스는 영문을 몰라서 아까보다도 더 얼빠진 대답을 했다. 그러자 오히려 그가 더 당황하며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그러니까 파…파미유 멤버들과 키…키스라든가…”
“…”
도대체 지금 뭘 묻고 있는 걸까? 이 남자는. 아니, 것보다 이런 질문에는 뭐라고 답해야하지. 뭐…딱히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녀들의 명예 같은 것도 걸려있으니, 굳이 정직하게 답할 필요는 없겠다만. 그렇다고 거짓을 입에 담는 거도 찝찝했다.
그래서 뭐라고 답해야할지 레니스가 신중하게 답변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그는 레니스의 침묵으로부터 스스로 결론을 도출해냈는지 어느샌가 이성을 잃고 있었다. 두 눈이 충혈되더니 눈물과 콧물을 콸콸 쏟으며 이성을 잃은 채 내 목덜미를 붙잡고 흔들면서 물었다.
“그…그럼 서…서서서서서서서서서서서서서서 설마 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 그 이상도 한 거냐?”
“…”
키스 이상이라…분명 파미유 멤버들과 키스 이상을 하긴 했다. 다만 미묘하게 에안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그래서 레니스가 이번에도 대답을 못하자 이번에는 에안이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해냈다.
그의 눈에서는 이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잠깐 이거 꽤 위험한 상황인 게.)
레니스는 그가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저기 괜찮으세요?”
그러자 그는 레니스의 대답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절규했다.
“으…으아아아아!!!! 역시 네놈 따위와는 결코 친하게 지낼 수는 없어!”
…
그렇게 혼자 무언가 단단히 착각을 하곤 울면서 그 자리에서 달아나 버린 에안 제이너.
그러나 그는 그렇게 너무도 커다란 충격을 받고 피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서 서둘러 벗어나는 와중에도 오늘 저녁 반찬(?)은 레니스와 파미유 멤버들이 그동안 했을 행위다! 라고 결정한 게 그답다면 그다웠다.
…
레니스와 루아는 너무도 어처구니없어서 에안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굉장히 심한 오해를 산 것 같은데…)
레니스가 자조석인 어조로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하자 루아가 처음에는 그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떨떠름해하면서도 이내 재밌다는 듯이 유쾌한 어조로 답했다.
‘뭐…괜찮지 않아? 재밌으니까 말이지. 그나저나 남자의 눈물이란 건 꽤나 숭고할거라 생각했는데 방금 그건 차마 눈뜨고 못 볼 정도로 꼴사납더라.’
‘…신랄하네.’
레니스는 루아의 너무도 잔인한 평에 전율하며 답했다. 그러자 루아가 콧대를 위로 세우며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당차게 답했다.
‘흐흥! 이 몸의 무서움을 이제 알겠어?’
‘…’
(뭐, 무섭다기 보단 그리운 기분이 든단 말이지. 아니면 귀엽거나.)
하지만 굳이 루아에게 말하진 않았다.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레니스와 루아는 에안을 배웅한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동안 걷다가 어느 순간 온몸에 오싹하고 소름이 돋아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방금 이건?)
팔을 내려다보자 방금 전 전신을 꿰뚫고 지나간 소름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는 듯이 닭살이 우둘투둘 돋아나 있었다. 그리고 루아 역시 전율하며 그녀에게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뭐야…방금 이것은. 순간적으로 심령이 흔들릴 정도였다.)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이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길래…??
마법뿐 아니라 각종 무술과 학문들은 각각 추구하는 바가 있다. 가령 마법이나 연금술 그리고 그 외의 각종 다양한 학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진리를 추구하며, 무술은 몸과 마음의 단련을 통한 자기극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근본을 파고들면 방식만 다를 뿐 결국 추구하는 것은 같다. ‘앎’을 통한 자기보호다.
즉, 모든 것은 미지의 위험에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그것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위인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의 자기보호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지금…자신뿐만 아니라 루아의 본능까지 미친 듯이 위험의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만큼 이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가공할 정도로 위험하다는 것이겠지.
괜한 호기심은 명을 단축시킨다. 레니스는 자신뿐 아니라 루아까지 전율시킬 정도의 이 앞에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와 루아는 서로 암묵적으로 동의하여 본능에 순응하여 이 자리를 피하여 황금사과상회로 우회하여 가기로 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늦었다. 그것은 이미 그들 앞에 그 전율스런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레니스와 루아는 그것이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둘 다 공포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야말로 의식이 바닥없는 어두운 무저갱에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끼며 순간 몸을 휘청이며 비틀거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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