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제33 화 막간(??) 더럽혀진 소녀 (2)
* * *
레라는 몽롱한 의식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눈에 안개가 낀 것마냥 흐릿했다.
고통 때문인가 팔다리가 마치 사라진 것처럼 감각이 없다. 허나 점점 의식이 회복되며 뿌옇던 시야가 조금씩 맑아지자 동시에 손발에 감각이 돌아왔다.
어두운 방이었다. 쾌쾌한 공기가 불쾌하다.
“콜록….”
자신도 모르게 마른기침이 나왔다.
‘나는 얼마나 의식을 잃었던 걸까…, 레토는…, 레토는 어떻게 됐지?’
그 순간 의식을 잃기 전 상황이 떠올랐다. 무심코 두 팔로 자신을 방어하듯이 감싼다. 곧이어 자신에게 닥칠 불길한 미래를 예감하곤 두려움 때문에 이가 딱딱 부딪혔다.
무서웠다.
남자의 비열한 웃음이 너무도 무서웠다.
자신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억지로 들어 올려 혀로 목을 핥았을 때의 온몸에 지네가 기어가는 것만 같은 징그러운 감촉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레라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레토의 모습을 찾았다.
그리고 시야가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지자 구석의 의자에 여전히 의식을 잃곤 축 늘어진 채 팔과 다리가 의자에 묶여있는 레토를 발견했다.
레라가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을 때, 그동안 기척을 숨기고 있었는지 존재감을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던 예의 남자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 일어났나? 뭐…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일어났군.”
“읏…!!!”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 동화되어있던 남자의 모습을 본다. 남자의 모습을 보자마자 저주의 말이라도 한마디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그 한순간에 몸에 각인된 압도적인 폭력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저 억눌린 작은 비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온몸에 짙은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비열한 웃음을 계속 입가에 달고 있으며 사람을 깔보는 듯이 내려다보는 남자.
그 시선에 이 남자는 자신을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만 레라는 무의식중에 두 팔로 가슴을 가리고, 허벅지를 오므렸다.
남자는 그런 레라를 그저 지그시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자신이 완벽하게 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겠지.
레라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간신히, 정말 간신히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운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 레토만큼은…,’
그 필사적인 마음이,
레라의 덧없지만 더 없이 소중한 단 하나의 소망이 그저 숨죽인 채 태풍이 지나가길 바라기만 하는 공포로 움츠러든 그녀를 질타하여 남자에게 묻게 했다.
물론 최선을 다해 용기를 쥐어 짜냈지만,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목소리가 떨리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레토는…레토는 어떻게 된 거죠?”
“지금은 그저 의식만을 잃었을 뿐. 아무 이상 없다. 그래, 지금은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레라에게 보여주듯이 천천히 그녀 앞에서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러자 남자의 손에는 어두운 방안에서도 그 존재감을 발하는 짙은 어둠으로 이루어진 단검 형태의 무언가가 있었다.
남자가 자신의 손안에 있는 그것을 천천히 기절해있는 레토에게 던졌다. 레라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단검은 레토의 목을 아주 살짝 스치고 지나간 후 벽에 부딪히더니 부딪힌 벽의 일부가 모래로 쌓은 성이 사르륵 흩어지듯이 소멸되었다. 벽의 소멸된 부분에서 들어온 빛이 레토의 목을 비춘다.
레토의 목에선 살짝 몇 방울의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싫어도 알 수 있었다.
분했다.
서러웠다.
왜 하필 자신과 레토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운명이 저주스러웠다.
남자에게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자 레라는 구토감에 벌써부터 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이런 남자 앞에서 우는 건 너무나도 분하고, 죽을 만큼 싫었지만,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남자는 어느새 방 중앙에 의자를 가져와 그 위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레라는 일어나 남자에게 가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앞으로 고꾸라진 채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남자에게 묻는다.
“약속은…확실히…지켜주시는 거죠?”
“아아…이래 봬도 신을 모시는 신관…아니, 남들에게 소개할 땐 사제라고 하랬던가? 나는 그게 그거 같아서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유독 이런 거에 깐깐한 친구가 있어서 말이지. 뭐, 어쨌든 네가 성의만 보인다면 나 역시 저 녀석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농담도 이런 지독한 농담이 없었다. 저런 자가 스스로를 신을 모시는 사제라고 하다니. 그야말로 신성모독이다.
허나 애초에 레라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남자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도 그녀에겐 상관 없었다.
남자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칼자루는 결국 남자가 쥐고 있었으니까.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의식을 잃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런 남자에게 더럽혀지느니 혀를 깨물고 죽고 싶단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의자에 의식을 잃고 있는 레토를 보고 이를 악문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거만하게 앉아있는 남자를 향해 한걸음…한걸음 도저히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긴다.
남자에게 조금씩 가까워질 때마다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이제는 눈물을 참을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반쯤 체념에 가까운 감정.
어느덧 영원 같은 긴 시간이 끝나고 레라는 어느새 남자의 코앞에 있었다.
각오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렸다.
굴욕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수치심,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뜨거움이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눈물이 이렇게 뜨겁다는 걸 지금 처음 깨달았다.
눈물 때문에 세상이 일그러져 보이는 와중에도 눈앞의 남자가 여전히 비열한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느긋하게 그런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며 즐기고 있는 건 또 선명히 보였다.
“흑…”
증오스러운 남자.
단검으로 수천 번 찔러 죽인다 해도 풀리지 않을 증오스러운 남자의 발 아래로
정중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공손한 몸짓으로 예를 표하며 남자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오른발에 손을 가져가 검은 가죽으로 된 신발과 양말을 천천히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물건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벗겼다.
“흡….”
맨발이 된 남자의 발에서 짐승과도 같은 역한 냄새가 풍겨져 무심코 숨을 삼켰다. 그렇게 눈물을 흘렸건만 또다시 눈에서 그렁그렁 눈물이 흘렀다.
남자의 발가락과 발등에는 길다란 털이 아무렇게나 징그럽게 자라있었다. 역한 냄새와 함께 헛구역질이 다시금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위액을 토할 것만 같았다.
무릎을 꿇은 채 남자의 발을 양손으로 공손히 잡은 후 굴욕감과 수치심에 눈물을 흘리고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간신히 참고 남자의 발등으로 입술을 가져가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쪽….”
“쪽…….”
한번…두 번…그렇게 남자의 발등에 입을 맞춘 후 남자의 새끼발가락을 입에 머금고 혀를 굴려 깨끗하게 한다.
“츄릅…”
천박한 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울려 퍼졌다.
“웁…우웁….”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잠시 입술을 떼자 결국엔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위액을 토한 후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흐윽…”
스스로가 너무도 처량하여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이번에는 혀를 내밀고 남자의 발가락 사이사이를 정성스럽게 핥았다.
그렇게 레라는 구역질을 반복하며 남자의 오른쪽 발가락 다섯 개를 차례차례 입에 머금고 서툰 혀놀림으로 핥은 다음 발가락 사이사이도 정성스럽게 혀로 핥기를 반복했다.
너무 역겨워 차마 삼키지 못한 침이 입에서 흘러내려 턱을 타고 흘러 목과 옷을 더럽혔지만 그것을 닦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을까…. 남자가 만족했는지 오른발을 빼고 이번엔 왼발을 내밀었다.
절망과 눈물로 범벅이 된 엉망인 얼굴로 다시 좀 전에 했던 일을 반복한다. 그렇게 남자의 왼쪽 발등에도 입을 몇 번이고 맞춘 후 모든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사이를 정성스럽게 입에 물거나 깨끗하게 구석구석 핥은 후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덜덜 떨면서 스스로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조용한 방안에 사락사락 레라가 옷 벗는 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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