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제32 화 막간(??) 더럽혀진 소녀 (1)
* * *
무대는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여기는 헤렉스 천년 제국의 외딴 마을.
이 마을의 뒤편에는 작은 동산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동산의 꼭대기에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이 마을에서는 이 나무 아래서 고백을 하여 맺어진 연인들은 평생을 함께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낭만적인 전설이 있어서………,
예전부터 마을의 많은 남자들은 마음에 둔 여성에게 이 장소에서 큰 용기를 내어 고백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러한 남녀의 인연을 맺어주는 축복의 나무 아래에 한 남성과 여성이 있었다.
남성의 이름은 레토 베스. 이 마을의 촌장 아들이었다.
대게의 시골 청년들은 농사나 사냥으로 단련된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와 햇빛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를 하고 있지만, 갈색 머리의 그는 다음의 촌장 자리를 물려받거나 그게 아니면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 공부를 해서 그런지 시골 남자답지 않은 하얀 피부에 전체적으로 여리여리한 서생 같은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몹시도 맑고 올곧아서 그가 상당히 절제된 인생을 살아왔고, 내면엔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을 강직함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있는 여성은 레라 제디.
그녀는 레토의 옆집에 살기에 어린 시절부터 레토와 함께 남매처럼 자란 레토보다 1살 연상의 소꿉친구였다.
본래라면 허리 중간까지 흘러내릴 것만 같은 탐스럽고 풍성한 금발에, 흰 눈과 같이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 때문에 귀족 영애 못지않은 기품 있는 외모로 자랐을 그녀였지만, 그녀의 집안은 레토와는 다르게 평범한 농민의 집안이었다.
그러다 보니 철이 들 무렵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뿐 아니라 집안 살림도 혼자 도맡아서 하다 보니 아침 햇살처럼 윤기 나는 금발도 색이 바래고 피부도 조금 푸석푸석해져 시골 처녀 같은 순박하고 생활력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비록 그녀가 본래 타고난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한 떨기 가련한 장미와도 같은 아름다움은 잃었지만, 대신 길가에 핀 들꽃 같은 순박하고 건강한 매력을 얻었다. 그녀의 그러한 매력은 취향의 차이지 결코 귀족 아가씨의 매력에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절벽 위의 도도한 꽃과 같아 많은 남정네들이 감히 다가갈 엄두도 못 낼 그러한 여성보다 바로 곁에서 누구에게나 격의 없는 미소로 대해주는 그녀가 더 마을의 남자들에겐 매력 있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말이 레토보다 1살 연상이지 엄밀히 말하면 고작 몇 개월 빨리 태어났을 뿐이지만, 레라는 레토에게 언제나 누나 행세를 하며 때로는 레토에게 짓궂은 장난도 쳤지만, 역시 그보다는 레토를 돌봐줄 때가 많았다.
그것은 언제였을까…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 그렇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지금도 빛바래지지 않고 똑똑히 기억나는……,
그래, 레토가 지금보다 한참은 어렸을 때 일어났던 일이었다.
비록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의 사정과는 상관없는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세계라고들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 속내를 파고들어 보면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 상세한 내막까지는 모르더라도 어른들의 사정에 누구보다 민감했다. 그래서 비록 작은 마을이라 마을주민 모두가 가족 같은 관계여도 촌장의 아들인 레토는 또래 애들이 조심스럽게 대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벽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레라는 달랐다.
그녀만큼은 달랐다.
바로 옆집이라는 특수한 관계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서 그런지 자신에게 그녀는 레토에게 허물이 없었다. 레토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꾸짖어줬고, 사과하면 밝게 웃으면서 용서해줬다.
때로는 그녀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일부러 그녀에게 잘못을 저지를까라고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레토는 그녀가 싫어할 일은 역시 할 수 없었다.
레라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그녀의 존재는 레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오히려 너무 과하게 좋은 영향을 줘서 두 사람의 관계에 문제를 줄 정도였다.
레토는 비록 어렸지만 생각했다.
레라에게 관심을 받고 싶다. 칭찬받고 싶다. 언제나 자신을 어린애 취급만 하고 누나 행세만 하지만 동등하게 인정받고 싶다.
아니, 레라가 자신에게 의지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거기에는 상당한 난관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레토에게는 레라 뿐이지만 레라의 주위에는 수많은 소년들이 몰려있었다.
싫다. 싫다. 싫다. 싫다.
레라가 다른 소년들과 같이 웃는 게 싫다. 다른 소년들에게도 자신에게 그렇듯이 상냥하게 대해주는 것이 싫다.
자신에게 레라는 이렇게나 특별한데 레라에게 자신은 수많은 또래의 남자애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질투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어린아이였기에…오히려 어린아이였기에 자신의 감정에 순수하고 솔직했던 만큼 레토의 레라를 향한 감정은 그만큼 깊고 진실했다.
그래서 레토는 레라에게 사랑받기 위하여, 먼저 자신이 납득할 만큼 레라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로 했다.
자신의 장점을 갈고 닦기로 했다.
비록 몬스터를 멋지게 해치운다든가 싸움을 잘한다든가 그러지는 못하지만, 아버지 뒤를 이어 촌장이 되거나, 관직에 진출을 하든 마을 사람이나 나아가 제국 사람들을 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모두가 의지할 수 있는 훌륭한 남자가 되자.
물론 레토가 가장 기대받고 싶은 게 레라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레라를 위하여…….
이렇게 소년은 자신을 변화시켰다.
그러자 소년을 둘러싼 소년 주변의 세상도 바뀌었다. 제일 처음 변한 것은 물론 레라였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자신의 남동생 같았던, 자신이 보살펴줘야만 할 거 같은 레토가 남자의 얼굴을 하게 됐단 걸 깨달았다.
마을 어른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할 상상 속의 남주인공들이 큰 각오를 품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런 큰 뜻을 실천하기 위해 실제로 열심히 자신을 갈고닦는 레토를 보며 소녀도 자신이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치거나 힘들 때 곁에서 지탱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레토의 곁에 있을 자격이 있을까라는 걱정도 하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레토는 분명 큰 인물이 될 거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그것은 어쩌면 사랑에 빠지게 된 소녀가 자신이 연모하게 된 소년을 과대평가하는 걸 수도 있지만, 적어도 레라에게는 그것이 진실이었다.
‘분명 레토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지.’
그러나 그때 레토의 옆에 있을 여자로 과연 자신이 어울릴까. 좀 더 레토에게 도움이 될 여자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점점 레토에게 끌리는 자신을 레라는 막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이 생겨 자연스레 태도에서 늠름함이 묻어나는 레토가 가끔씩 자신을 그윽한 눈길로 볼 때, 레라는 낯선 레토의 모습에 당혹하면서도 그의 품에 격렬하게 안기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건 레토역시 마찬가지였다. 점점 여성스러워지는 레라와 그런 레라에게 구애하려는 수많은 남자들을 보며 당장이라도 누군가에게 그녀를 빼앗길 것만 같아 조바심으로 마음이 타들어갔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원하면서도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기에 가끔씩 레토가 머리 식힐 겸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레라가 다가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든가 하는 오붓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 이상의 선은 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마음이라는 것은 억누른다고 억눌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억누르려 하면 억누를수록 더 커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러한 감정이 차고 넘쳐서 더 이상 상대에게 표현하지 못하고는 스스로가 버틸 수 없게 되어, 레토는 오늘 레라에게 이곳 인연의 나무 아래에서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이곳으로 걸어오는 동안 어린 시절 그녀와의 수많은 따스한 추억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자신을 남자애가 여자애처럼 군다고 놀리던 소녀, 그러나 그 후에는 상냥하게 손을 내밀어 자신을 이끌어주던 소녀.
언젠가 마을에 사나운 늑대가 들어와 레토를 덮치려했을 때, 자신이 상처 입는 것도 개의치 않고, 레토를 감싸주었던 소녀. 다행히 그때 지나가던 한 모험가에게 늑대가 초살 당해 위기를 넘겼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레라는 몸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큰 상처를 입을 뻔했다.
그때 레토는 레라에게 처음 진심으로 화를 냈다. 다쳤으면 어쩔 뻔했냐고. 좀 더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고 나 따위를 위해서 자신을 다시는 위험에 처하게 하지 말라고.
“여자애인데 몸에 큰 상처라도 나면 어쩔 뻔했어?”
그런 마음을 담아 레라에게 말하자, 레라는 레토에게 미소 지으며
“그땐 레토가 신부로 맞아줄래?”
라고 말하기에 레토는 수줍어하면서도 확실하게
“응…….”
이라고 답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후 레라의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언제나 씩씩하던 그녀가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자신 앞에서도 눈물을 꾹 참고 모두가 없는 곳에서 혼자 슬픔에 젖어 숨죽여 우는 모습을 보았을 때, 다음에는 그녀가 슬플 때 기댈 수 있는 남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인연의 나무 아래에서 눈앞에 있는 레라를 보며 레토는 하고 싶은 말이 자신의 안에서 수없이 많이 떠올랐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자신에겐 레라 뿐이라는 마음. 레라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 왜 그런지 이유를 설명하라면 수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막상 답할 수 없는 이 복잡한 마음. 말로는 어떻게 하더라도 표현할 수 없는 마음.
아마도 그렇기에…말로는 표현하기 어렵기에 설령 그렇더라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사람은 서로의 몸과 몸이 닿는 것을 원하는 걸지도 몰랐다.
레토와 레라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를 애틋한 시선으로 말없이 한동안 보다가 서로 동시에 ‘쿡’하고 웃었다. 어린 시절과는 서로가 많은 것이 변했지만 지금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져 레라가 눈을 감으며 레토의 입맞춤을 받아들이려 했을 때 그녀는 레토의 등 뒤에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손으로 레토의 뒷목을 내려치며 레토가 그 자리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아…아…”
레라는 공포로 이가 덜덜 떨렸다. 자신의 몸을 훑어보는 남자의 음란한 시선에 본능적으로 두 팔로 가슴을 가리면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남자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발로 레토의 얼굴을 지그시 짓밟기 시작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큰소리를 질러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을 때였다.
둔탁한 충격이 그녀의 뺨을 휩쓸고 지나갔다. 고개가 팍 돌아가고 태어나 처음 맞보는 고통과 공포에 레라는 자신과 레토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과 비극을 예감했을 때, 남자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너무 큰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평소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 할 실금을 하며 자신의 허벅지와 치마를 더럽힌 채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고통과 공포로 의식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와중에도 자신보다도 레토를 걱정했다.
자기 자신보다도 소중한 사람.
나아가 아무것도 아닌 자기 자신과는 다르게 마을 사람들이나 제국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사람.
비록 그의 곁에 더 이상 자신은 없어지더라도 그를 지킬 수만 있다면 그녀는 그녀가 어떻게 된다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참으려고 해도 참지 못하고 결국 흘러내리는 눈물을 흘리며 고통과 공포로 덜덜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를 향해, 자신의 운명을 한순간에 박살 낸 증오스러운 남자를 향해 그러한 모든 것을 억누르고 남자에게 공손하게 엎드려 절하며 애원했다.
“부디…저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으니 그만은…”
레라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레라를 걷어찬 뒤 다시 레토의 얼굴을 짓밟고 있던 발을 치우고 레라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레라에게 다가와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들어 올려 강제로 고개를 들게 하더니 그녀의 새하얀 목을 혀로 핥으며 가슴을 거칠게 주물렀다.
레라는 피부에 지네가 기어가는 듯 온몸에 소름이 끼쳤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억울하고 서러움에 눈물이 흐르는 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을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말귀가 잘 통하는 여자는 이래서 좋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레라의 가슴을 거칠게 주무르던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레라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의 손을 보며 레토를 잠시 바라보고 레토가 이 슬픔을 극복해내길 바라며 옛날 일을 회상했다. 레토가 늑대에게 덮쳐질 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이미 레토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레토는 자신을 걱정하며 자신이 몸에 큰 상처라도 입으면 어쩔 거냐고 물었었다.
그때 레토에게 ‘그땐 레토가 날 신부로 맞아줄래?’라고 물었었고 레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응….’이라고 답했었지.
레토는 과연 내가 더럽혀지더라도 날 사랑해줄까?
레토라면 어쩐지 그런 자신을 보다듬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볼 때마다 그는 괴롭겠지.
레라는 그것이 가장 슬펐다.
그러니까……, 그녀는 결심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바랐다.
그리고 남자가 레라의 얼굴을 꽉 쥐자 그녀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의식을 잃었다.
남자는 의식을 잃은 레토와 레라를 데리고 그 자리서 사라졌다.
‘부디 레토가 이 비극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레토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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