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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유혹에 넘어간 현자-32화 (32/47)

〈 32화 〉 제31 화 세계 변혁의 빛

* * *

어둠의 숲 깊은 곳에 있는 새하얀 나무에 목을 매단 이들이 자아낸 탄식과 그들에게서 흘러내린 탁한 피에 의해 대지에 그려진 붉은 눈이 일순간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그 눈을 중심으로 무수한 시체의 잔해들이 모여 만들어진 인면룡이 레니스와 파미유들을 향해 포효했을 때,

그와 동시에 레니스는────, 이곳과는 떨어진 다른 장소에서 어둠의 장막 속에 자신을 숨긴 누군가에 의해 이 세상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겼다는 걸 감지했다.

그 균열은 레니스가 감지함과 동시에 곧바로 메워졌지만 아주 잠깐 이 세상에 구멍이 뚫렸을 때, 한순간이나마 대기를 떨리게 하며 세상에 갈라진 틈을 억지로 비집어 열고 마족과는 또 다른 어떠한 존재가 이 세상으로 들어왔음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장소는 레니스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장소였다.

레니스는 눈앞에서 리카, 유이, 레아가 한계 상황에서도 더욱 자신을 쥐어 짜내어 인면룡과의 전투에 돌입하는 걸 지켜보는 한편, 황금사과 상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도 주목했다.

상회의 상공에 생겨난 세상의 균열을 비집고 나온 것은 마에 물들어 마기를 사용하면서도 마족과는 그 차원이 다른 ‘무언가’의 편린.

그리고 그 존재에 의한 일방적인 유린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스텔, 리노아, 레이윈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레니스는 파미유가 인면룡에게 짓밟히는 모습과 황금사과 상회가 붉은 뱀을 두르고 있는 여인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장이라도 그녀들에게 가서 그녀들을 구해주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레니스는 아픈 게 싫었다.

무서운 것도 싫었다.

저러한 것들은 지금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 경험은 안 할 수만 있다면 안 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스텔이, 리노아가, 리카가, 유이가, 레아가 저렇게 무자비한 폭력 앞에 짓밟히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상냥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있다면 적의와 죽음일 것이기에…적의와 죽음 앞에선 남자와 여자도, 신분의 높고 낮음도, 나이의 많고 적음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들 같은 미모의 여성일 경우 죽는 것만도 못한 능욕을 살아서 끊임없이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진정으로 아프기 싫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아픔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아파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해보고 그것을 극복해야할 것이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그 무엇에도 꺾이지 않을 마음을 길러내야 한다.

이것만큼은 레니스가 그녀들에게 어찌해줄 수 없는 것이었고, 이것만이 그녀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길이었다.

동시에 레니스는 한편으로 안도했다.

이러한 일이 자신이 없을 때 일어나지 않고 지금 일어났음에.

자신의 손이 닿을 지금이라면 최악의 상황만큼은 반드시 피할 수 있기에.

레니스는 그렇게 인면룡에 의한 파미유들의 유린이 극에 달해 그녀들이 목숨을 잃기 직전 그녀들을 구해준 후, 인면룡을 찌부러뜨렸다.

그리고 그녀들을 치료해주다가 아스텔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파미유들과 함께 황금사과 상회로 전이하여 하늘로부터 빛의 창을 소환하여 붉은 뱀으로 자신을 휘감고 있는 핏빛 머리의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무언가’로부터 아스텔을 구해냈다.

아스텔은 며칠 전 처음 겪어보는 죽음의 공포에 마음이 꺾일뻔 했던 적이 있었다.

한번 꺾인 마음은 쉽게 복구되기 어려웠지만, 그걸 극복하고 다시 일으킬 수 있다면 그 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이전보다 쉽게 꺾이지 않는다.

한번 마음속에 각인된 공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 아스텔은 그보다 더한 공포와 무엇보다도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

비록 적을 이길 수는 없었지만, 끝까지 적에게 굴복하지도, 자신에게 지지도 않았다.

레니스는 눈앞의 적이 무슨 공격을 하더라도 막을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여인의 실로 근본부터 올곧게 삐뚤어진 성격으로 봤을 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쓰러뜨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절망감을 주려할 거라 생각되었기에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아스텔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머리를 대견하다는 듯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훌륭하게 극복하셨군요.”

“네….”

동시에 넝마가 된 그녀의 몸에 마나를 흘려 보내주어 일시적으로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순식간에 탈골된 관절을 다시 돌려놓은 다음 치료했다.

단 하루!!!

고작 하루 동안 겪었던 경험이 때론 인간의 남은 인생을 결정할 때가 종종 있다. 레니스는 오늘 아스텔과 리노아, 그리고 파미유들이 겪은 고통이 그러한 경험이 되길 바랐다.

어느새 파미유들이 요령 있게 지면에 쓰러져 있는 자들을 부축하여 레니스와 붉은 뱀의 여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겨놓았다.

장내는 레니스와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사갈의 영혼을 지닌 여인의 승패에 따라 여기 있는 자들의 운명이 갈리기에 좌중의 인물들은 긴장하며 숨소리조차 못 내고 그 두 사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떻게 될 것 같소?”

칼 시즈의 질문에 아직 레니스의 실력을 직접 본적이 없고 붉은 뱀의 여인의 실력은 직접 몸으로 겪어본 레이윈이 조금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

“아무리 레니스 도령이 그 바닥의 끝을 알 수 없는 신비한 소년이라지만…저 여인 역시 여기 있는 모두가 달려들어도 손끝 하나 델 수 없던, 비록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지만 저것은 분명 세상 밖에서 온 마물. 역시 혼자선 힘들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런 레이윈의 말에 프럼프가 뒤를 이었다.

“마님의 말씀대로입니다. 허나 레니스군이라면 적어도 저희가 필사의 저항으로 저 마녀의 발을 묶어두는 동안 아가씨와 다른 소녀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키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레니스군에게 그 뜻을 전하여 직접대결을 피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편이…….”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아스텔이 다가와 확신을 담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에요. 레니스님는 반드시 이겨요….”

칼 시즈는 아스텔의 말에 딸이 한번 정한 남자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단순한 희망적인 관측은 독이 될 수 있기에 뭐라고 하려던 차였다.

그런 칼 시즈에게 리노아 또한 힘을 주어 말하였다.

“레니스님은 이기실 겁니다.”

그리고 그런 아스텔과 리노아의 뒤를 이어 파미유들도 확신을 담아 말했다. 특히 파미유들에게서는 단순한 바람이나 믿음이 아닌 좀 더 확고한 근거에 기인한 자신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맞아요! 레니스님은 상대가 누구여도 반드시 이기실 거예요!”

그리하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자와, 마왕의 유혹에 넘어가 마기에 물들었지만 인간인 자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여기는 제국의 수도 한 가운데에 있는 하늘까지 닿을 것만 같은 7개의 거대한 탑으로 둘러싸여 있는 황궁.

그 안쪽의 옥좌에 한 인영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양 옆으로 새하얀 로브에 새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두 명의 노인들이 공손한 자세로 옥좌에 앉아있는 인영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말하였다.

“폐하,희생의 검을.”

그러나 노인의 말에 옥좌 위의 인물은 잠시 허공을 쳐다보더니 노인에게 말하였다.

“아니, 조금 더 기다려보도록 하지.”

마찬가지로 두 노인 역시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수긍하며 대답했다.

“뜻을 받들겠나이다.”

그리고 다시 황금사과 상회.

붉은 뱀을 휘감은 여인이 레니스에게 말했다.

“저 소녀의 눈동자 안에 그 어떤 고통이나 절망의 눈물도 빛나는 용기로 바꿔주는 희망의 빛이 있음을 알았다. 그게 아무래도 너였나 보군.”

“유감이군. 그건 그녀 자신의 용기다.”

레니스의 말에 진실 여부 따윈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다는 죄악으로 물든 여신은 황홀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과 하복부를 주물럭거리며

“저들의 마지막 희망인 네가 처절한 모습으로 죽은 뒤 저들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 걸 생각만 해도 하반신이 축축하게 젖는군.”

여인의 그런 말에 레니스도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야말로 네가 저들의 마음속에 있는 등불이 더 밝아지는 모습을 심연 속에서 보면서 부들부들 떨 모습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는군.”

그렇게 서로 한마디씩 주고 받은 순간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그 자리서 사라진 후 서로의 위치를 바꾸어 서 있었다.

잠시 후 여인의 오른팔이 깔끔하게 잘려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여인은 자신의 한쪽 팔이 잘려나가 땅에 쓰레기처럼 떨어졌음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여인의 팔이 수십 마리의 작은 뱀으로 변하더니 다시 여인의 몸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인의 팔로 변했다.

“방금 무슨 일이 있던 거였소?”

눈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두 눈으로 빤히 봤으면서도 너무 빨라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던 칼 시즈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옆에 있는 프럼프에게 물었다.

“저도 전부 보진 못했습니다만 적어도 서로가 스치는 그 짧은 순간에 20번 정도의 공수를 주고받은 것 같습니다.”

그런 프럼프의 말에 리노아가 말했다.

“아뇨. 그 2배 이상. 적어도 대략 50번 정도였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30번 이후의 공수변화는 따라가지 못했기에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만…”

“레니스 도령이 평범하지 않을 거라곤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 정도였을 줄은….”

레이윈이 전율하며 말했다.

여인으로부터 세 줄기의 붉은 기운이 뱀의 형상을 하고 레니스에게로 쏘아졌다. 하지만 쏘아지자마자 허공에서 소멸했다.

동시에 여인을 중심으로 대지로부터 레니스를 향해 거대한 붉은 기운이 퍼져나가더니 거기로부터 무수히 많은 뱀의 형상을 한 붉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레니스가 지면을 발끝으로 톡 하고 가볍게 차자 청량한 푸른 기운이 퍼져나가면서 대지를 붉게 물들였던 여인의 기운을 삽시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여인의 양팔이 깨끗하게 잘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금 여인의 잘려진 팔이 뱀으로 변하여 여인에게 돌아가서 여인의 팔로 변하려고 했지만, 레니스의 손에서 나온 대자연의 기운에 의해 소멸되었다.

여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팔이 잘려나간 부위에서 수많은 뱀이 튀어나온 후 서로 뒤엉키면서 팔로 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역시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동시에 여인의 두 다리 역시 잘려나가면서 강제로 바닥에 굴욕적인 자세로 무릎을 꿇게 된 채 레니스를 올려다보게 됐다.

여인이 이를 갈며 레니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걸로 이겼다고 착각하지 마라 인간. 이건 고작해야 내 편린에 불과할 뿐.”

하지만 레니스는 어디서 개가 짖냐는 식으로 그녀의 말을 무시하면서 아무 말 없이 발을 들어 올려 여인의 머리를 찍었다.

여인의 두개골이 산산이 박살난 순간이었다.

여인의 산산조각 난 머리와 여인의 육신이 붉은 기운으로 화하더니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온 세상을 붉게 물들였던 기운이 하늘의 한 점으로 모여든다.

이윽고 제국의 수도를 다 감쌀 정도의 거대한 붉은 뱀이 출현하게 되었다.

세상이 한순간 붉게 물들었다가 순식간에 원상태로 돌아가더니 허공에 갑자기 나타나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뱀에 의해 일시적으로 수도의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그들은 하고 있던 모든 일을 멈추고 혼란에 빠졌다.

거대한 뱀이 자신의 입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벌리자 그 입으로 붉은 기운이 모여들어 응축된 뒤 그 직선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소멸시켜 버릴 기세의 붉은 섬광이 쏘아졌을 때였다.

그것이 자신들을 향하는 것이 아님에도 수도의 모든 사람들은 수도의 멸망과 피할 수 없는 자신들의 죽음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 한 인영이 허공으로 빛과 같은 속도로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멀리서는 구분이 잘 안 가는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 인영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수도 전역을 파괴할 것 같은 어마어마한 섬광이 소멸하였고, 그 다음 순간 어두운 밤하늘인데도 뚜렷이 빛나는 푸른 구체안에 거대한 붉은 뱀이 갇혔다.

붉은 뱀이 어떻게든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구체를 깨뜨려보려고 그 거대한 몸을 꿈틀거리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지만, 구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인영이 구체를 향해 팔을 사선으로 긋자────,

구체와 함께 그 안의 공간이 거대한 뱀과 함께 통째로 사선으로 어긋나며 약간의 정적 후 수도 상공에서 지상에 있는 모두가 보는 가운데 이 세상 어떤 빛보다 밝은 눈부신 대폭발을 일으켰다.

그것은 새로운 절대자의 등장을 알리는 빛이었다.

13인의 절대자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이 미메시스 대륙의 균형을 깨뜨릴 새로운 절대자의 등장을 만민에게 고하는────,

세계 변혁의 빛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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