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왕의 유혹에 넘어간 현자-31화 (31/47)

〈 31화 〉 제30 화 죄악으로 물든 여신의 그림자 (2)

* * *

만인에게 우러름을 받고 있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은 자신의 존재감으로 뒤덮인 세계에서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아스텔과 리노아등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비록 이 세계를 가둬두고 있는 억지력 때문에 극히 일부분밖에 현계 할 수 없었다지만 인간따위가 자신을 앞에 두고 약간의 동요만을 보였을 뿐 곧바로 평정을 되찾다니…

자신의 불완전한 상태와 세계에 걸려있는 ‘저주’를 감안한다 쳐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여인은 잠시 자신의 손을 쥐락펴락했다.

확실히 위화감이 있었다. 상당히 오랜만에 자신의 일부만이 그림자로써 현현해서 그런지 아직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인은 딱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쓸 만한 장난감들이 잔뜩 있었으니까.

“후후후……….”

여인은 웃었다.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단순히 그동안 ‘문’ 안쪽의 심연에 봉인당해서 영겁이라고 느껴질 만큼 지루한 시간을 꼼짝도 못 하고 보내다가 일부분이나마 해방되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버러지들이 자신을 향해 투지를 불태우며 바라보는 눈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우선은 생으로 팔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뽑아주자.

자신의 몸통에서 팔다리가 하나씩 떨어져 나갈 때마다 저 아름답게 빛나는 눈들이 고통과 절망감에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자신에게 자비를 구걸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 안쪽이 욱신거리며 뜨거워졌다.

여인이 나긋하게 한 손가락으로 지상에 있는 그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여인의 몸을 휘감고 있던 뱀이 입을 찢어질 정도로 크게 쩌억 벌리더니 그 안에서 한줄기 붉은 섬광이 지상으로 쏘아졌다.

동시에───, 레이윈이 하늘을 향해 실드를 전개했다.

하늘에 거대한 오망성이 그려지며 붉은 섬광을 막아보려 하지만 섬광이 실드에 닿는 그 순간 산산이 깨져버렸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이면 충분했다.

어느새 캐스팅을 끝낸 아스텔에 의해 지면으로부터 열두 겹의 얼음기둥이 올라와서 붉은 섬광을 막아섰다.

한 겹 두 겹 섬광에 닿는 순간 두꺼운 얼음기둥들이 유리 깨지듯이 산산조각이 났지만, 아스텔들을 향해 오던 섬광 또한 그 위력이 줄어들어 마지막 기둥을 깼을 때는 섬광 또한 소멸해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든 리노아와 프럼프 두 사람이 각각 서 있던 자리에서 사라져선 허공에 떠 있는 여인의 앞에 나타나 여인의 목을 양쪽에서 베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칼날은 여인의 목 바로 앞에서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여인을 휘감고 있던 뱀의 꼬리가 크게 휘둘러지며 두 사람의 몸을 강타한다.

두 사람의 앞에 어느새 레이윈이 전개한 오망성의 실드가 생성되어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산산이 부서지며 두 사람이 지면에 추락하며 검은 피를 한 웅큼 토했다.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을 본 레이윈이 아무렇게나 휘두른 뱀의 일격에 경악했다.

“위력을 흡수했는데도 저 정도 파괴력이라니!”

실드가 없었으면 즉사였을지도 모를 위력이었다.

그만큼 강력한 일격이었다.

땅에 처박힌 리노아와 프럼프 두 사람이 손에 쥐고 있는 검을 지팡이처럼 땅에 짚고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날 동안 여인의 시선을 그런 두 사람에게서 돌리기 위하여 레이윈과 아스텔의 마법이 여인에게로 향했다.

하늘에 다시 한번 오망성의 거대한 마법장이 펼쳐지고, 아스텔에게서 전개된 대폭살의 거대한 화염기둥이 오망성의 한가운데를 통과하자 크기가 커지는 동시에 속도 또한 몇 배로 가속되어 여인을 덮쳤다.

그러나 여인은 어느새 그 자리서 사라져 아스텔의 코앞에 나타나 있었다.

무릎으로 아스텔의 배를 찍으려 한다.

그 앞을 어느새 리노아가 자신의 검에 투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기의 검을 덧씌운 후 여인을 향해 휘두르며, 여인이 아스텔에게 가하는 일격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여인의 무릎 찍기와 리노아의 투기가 맞닿는 순간 리노아의 검이 산산이 부서지며 리노아와 카렌의 몸이 포개어진 채 날아가 뒤에 있는 나무에 등을 세게 부딪치더니 두 사람 모두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스텔 역시 리노아와 마찬가지로 내장을 다쳤는지 입에서 검은 피를 주륵주륵 토하였다.

연이은 공격을 받은 리노아의 상태는 특히 더 심각했다.

“커헉!!”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분노하여 여인에게 덮쳐든 레이윈과 프럼프.

두 사람의 한계 이상의 분전 덕에 시간을 벌어 어느새 태세를 정비한 아스텔과 리노아도 가까스로 전투에 합류했지만 결국 역부족이었다.

잠시 후 장내에 자신의 두 발로 멀쩡히 서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고통 때문에 제대로 몸도 못 가누고 지면에 내팽개쳐져 있는 자들을 바라보면서 여인은 의아해했다.

이 정도면 슬슬 자신과의 격차를 충분히 깨닫고 울면서 자신에게 자비를 구걸할 때도 됐는데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애걸복걸하며 자비를 구걸한다고 그걸 들어줄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들어줄 것처럼 해서 상대방에게 잠시 희망을 심어준 뒤 더욱 철저하게 짓밟을 때 보여주는 상대방의 다양하고 격한 반응이 진미인데 그걸 맛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일까…아직 고통이 덜한 건가. 여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 중에서 아직까지도 자신을 향해 가장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은발의 소녀, 아스텔에게로 다가갔다.

쓰러져있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여인에게 우악스럽게 목이 쥐어진 채 허공에 몸이 떴다 보니 아스텔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서 몹시 괴로워했다. 하지만 아스텔은 저항의 의지를 꺼뜨리지 않고 끝까지 여인을 노려보며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손가락 끝으로 마법진을 연성하려 하고 있었다.

히쭉

여인이 아스텔과 눈을 마주친 뒤 보는 사람이 불길할 정도로 히쭉하고 한번 웃어 보인 뒤에 아무렇지 않게 아스텔의 손가락을 부러뜨렸다.

“아아아아악!!!!!!!!!!!!!!!!!”

아스텔의 커다란 비명이 장내에 울렸다.

그러나 역시나 아스텔은 전의를 잃지 않았다.

여인은 그런 아스텔을 바라보며 흥겨워졌다.

과연 이 소녀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우선은 손가락부터다.

여인은 아스텔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정성스럽게 분지르기 시작했다. 너무나 큰 고통에 아스텔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눈에선 눈물이. 그리고 입에서는 위액이 섞인 침이 게걸스레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머. 이런 여자애가 칠칠치 못하게 침을 흘리면 안 되지. 그러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미움 받을라.”

그렇게 말하며 여인은 아스텔의 턱을 잡은 뒤에 턱관절을 빼버렸다.

아스텔뿐 아니라 그 참담한 모습을 바라보는 모두의 비명이 울렸다. 이미 아스텔은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아직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녀의 눈을 보건대 아직 끝나려면 한참 부족했다.

여인은 콧노래를 부르며 히쭉히쭉 웃으며 아스텔의 관절을 하나씩 빼기 시작했다.

어깨와 팔의 관절이 전부 빠지자 허공에 아스텔의 팔이 덜렁덜렁 흔들린다.

양쪽 사타구니를 찢어질만큼 벌린뒤 허벅지 관절을 빼버리자 아스텔이 실금하여 그녀의 하반신을 더럽히며 새하얀 허벅지를 타고 노란 액체가 땅으로 뚝뚝 떨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역시나 아스텔의 눈은 절망감에 휩싸이지 않았다.

(흐음…꽤 하네. 과연. ‘사제’가 눈여겨 볼만해.)

(황금의 의지라……….)

팔다리의 관절을 다 뽑아버린 후, 양쪽 허벅지와 다리 관절 역시 마저 뽑아버렸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진 채 소녀의 얼굴과 상반신은 눈물과 토사물로 더럽혀져 있었고, 몇 번이고 실금하여 소녀의 아래에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너무나도 비명을 많이 질러서 소녀의 목에서는 이제 제대로 된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눈앞의 소녀는 절망감에 빠지지 않은 채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것만이 아니네.)

여인은 소녀의 눈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이 소녀는 누군가를 믿고 있는 거다. 반드시 이 소녀가 믿고 있는 자가 소녀를 구해주리라고.

설령 여기 있는 모두가 자신에게 더없이 참혹하게 죽는다고 해도 이 소녀가 믿고 있는 누군가가 반드시 그 이상으로 비참하게 자신을 죽여 복수해줄 것이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는 거다.

여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온몸이 생으로 찢겨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단 하나의 믿음으로 의지를 꺾지 않은 소녀다.

이 소녀의 이러한 믿음이 산산 조각나는 순간이 여인은 몹시 보고 싶었다.

이 소녀가 보는 앞에서 소녀가 믿고 있는 녀석을 박살 냈을 때, 소녀가 맛볼 절망감은 자신이 지금껏 맛보지 못한 극상의 쾌감을 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여인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격차와 고통을 직접 몸으로 겪고도 이렇다는 것은 눈앞의 소녀가 판단했을 때, 소녀의 마음의 지주인 녀석이 자신을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소녀의 바람일 뿐이라 생각하지만, 이 정도로 누군가를 심취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매우 하찮지만, 가끔가다 기적을 일으키는 자들이 존재했다.

그러한 이질적인 자들의 칼끝은 자신들에도 닿음을 잘 알게 됐다.

만약 이 소녀가 의지하는 자가 그러한 존재라면 최악의 경우 불완전하게 현계 하여 제약이 많은 이 몸 때문에 소녀는 멀쩡히 구출되고 모처럼 현계한 자신의 그림자는 소멸할 수도 있었다.

(그림자가 소멸되는 건 상관없지만, 이 소녀가 멀쩡해지는 건 참을 수가 없군.)

자신의 믿음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며, 이 소녀가 의기양양할 생각을 하니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조금 성에 차지 않지만 확실한 차선책을 선택하기로 할까.)

여인은 우선 소녀의 건방진 두 눈을 뽑아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부디 이 소녀가 믿고 있는 자가 소녀가 그자를 의지하는 만큼 그자 역시도 소녀를 소중히 여기길 바라면서.

자신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한 소녀의 모습을 보며 그자가 절망에 빠지길 바라며 소녀의 두 눈을 찔렀다.

그리고…자신의 눈을 뽑으려 다가오는 손을 보면서도 아스텔은 눈을 감지 않았다.

대신 움직이지 않게 된 지 한참이 된 입술을 어떻게든 벌린 다음 떠듬 거리며 한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레………니스님……………………………………………………………………”

동시에────, 아스텔 눈앞으로 여인의 무자비한 손가락이 다가왔을 때 소녀의 목에 걸려있는 에메랄드 목걸이가 빛을 발하였다.

여인의 손가락 끝이 아스텔의 두눈을 후벼파기 바로 직전이었다.

여인은 자신이 거대한 창날에 정수리부터 온몸이 꿰뚫리는 감각에 간담이 서늘해져 여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아스텔에게 향하던 공격을 멈추고, 무심코 아스텔의 목을 쥐고 있던 손도 풀어버린 채 한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림자 너머 세계의 경계 밖에 있는 자신의 본체가 소멸될 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여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여인이 아스텔에게서 떨어짐과 동시에 하늘이 갈라지며 거대한 빛의 창이 벼락처럼 조금 전까지 여인이 서 있던 자리로 떨어져 내렸다.

어마어마한 폭발과 함께 대지가 갈라지면서 비명을 지르고 빛의 섬광이 세계를 하얗게 물들인다.

그리고 아스텔은 그렇게 새하얗게 눈 부신 빛으로 물들어가는 세상 속에서 자신과 여인 사이에 서 있는 한 소년을 보았다.

검은 머리에 황금으로 수가 놓여있는 검은 로브를 입은 얼핏 봐서는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미소년.

그리고 두 눈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는 소년.

그리고…

아스텔이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고 있는

아스텔 역시 소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과 마음 전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소년.

레니스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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