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제29 화 죄악으로 물든 여신의 그림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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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레니스와 파미유들이 페블 위크의 집에서 나와 어둠의 숲으로 향하고 있었을 때───, 아스텔은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칼 시즈와 레이윈 시즈, 그리고 그들의 호위인 리노아 카렌과 프럼프 북솜까지 다섯이서 로비에 모여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된 화제는 역시 낮에 상회를 방문했었던 레니스에 대한 것이었다.
아스텔도 아스텔이었지만, 그녀의 어머니인 레이윈도 레니스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좌중의 인물들 중에 그녀가 제일 극성이었다.
“역시 결혼식은 가급적 빨리하는 게 좋겠죠? 화려하고.”
그런 레이윈의 말에
“네…….”
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스텔.
“다…당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결혼식이라니? 아직 일러 한참 이르다고!”
그런 딸의 반응을 보며 딸 바보인 칼 시즈가 식겁해서 반쯤 이성을 잃고 항의했지만,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빨리 손주랑 손녀가 보고 싶구나. 레니스군과 우리 딸의 아이라면 정말 천사 같을 거야. 아니, 정말 등에 아름다운 날개가 달려있더라도 이 엄마는 놀라지 않을 거 같구나. 육아는 이 엄마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사랑을 나누렴!”
“네, 어머니. 저 힘낼게요.”
“…”
칼 시즈는 이미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체념 섞인 한숨을 쉬며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그런 그에게 프럼프가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한잔 드시지요, 회주.”
“허허…내 맘을 알아주는 건 자네뿐이 없군.”
그런 칼 시즈의 말에 프럼프가 그답지 않게 입가에 씨익하고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예, 축하주입니다.”
“프럼프 자네마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썩 기분이 나쁘진 않았는지 프럼프가 연거푸 권하는 석 잔을 호탕하게 마신 칼 시즈였다.
칼 시즈에게 약간 기분 좋은 취기가 돌았을 때, 여성진 쪽에서는 이제 아이는 몇이 좋을까란 얘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이런 대화에 의외로 남성들은 끼기 힘든 법이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결국 속으로 삼킨 채 대화에 끼지도 못하고 그저 눈앞에 있는 마늘 소스를 넣어서 만든 부추 샐러드를 고기와 함께 입에 넣어 우물우물 씹는 칼 시즈.
그런 그에게 프럼프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회주님께서도 레니스군이라면 더 이상 없을 신랑감이라고 인정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단순히 능력이 뛰어나다 그런 의미만이 아니라….”
“그래…인품 말이지….”
“예. 회주님께선 어떻게 보셨습니까?"
“…”
칼 시즈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하리라. 칼 시즈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상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건을 보는 눈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눈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결국 거래란 것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자신의 사람 보는 안목은 짧은 시간 만에 황금사과 상회를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상회로 키운 불변의 실적이 보증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봤을 때 레니스라는 소년은 고요한 우물처럼 맑고 깊으며, 일체의 사리사욕이 느껴지지 않는 청허함 그 자체였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의지가 되어 편안함을 주는 소년이었다.
정말이지 자신이 아무리 딸바보라지만 딸에겐 이 이상 좋을 수가 없는…아니, 인정하긴 싫지만 오히려 냉정히 판단하면 딸에겐 과분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아직은 이른 단계의 얘기지만, 가까운 미래 국가 단위로 레니스군을 놓고 쟁탈전이 벌어질지도.’
‘뭐…아무리 그렇다 해도 딸자식을 둔 아버지의 마음이란 게 워낙 섬세하고 미묘한 거라 또 다른 거란 말이지.’
프럼프는 그런 칼 시즈의 속내를 다 이해한다는 듯이 칼 시즈의 빈 잔에 술을 따른 뒤 자신도 벌컥벌컥 한잔 마신 후 말을 했다.
“후…저도 딸내미를 둔 입장이라 이해합니다만…그래도 솔직히 말하자면 부럽습니다. 하…정말이지 바보 같은 딸내미가 결혼만 일찍 안했어도….”
“뭐…너무 그러지 말게. 지금 사위도 상당히 괜찮은 남자지 않은가.”
“그렇죠. 어쩌겠습니까. 다 자기 팔자인 것을. 하다못해 손녀에게라도 레니스군을 나중에 소개시켜줄까 고민 중입니다.”
“자…자네 무슨 무서운 소릴 하나. 이제 3살 아닌가. 나이 차를 생각하게 나이 차를.”
“스무 살 차이도 안 나지 않습니까? 허허…딱 좋은 차이죠.”
“허허…”
그때서야 칼 시즈는 눈앞의 남자의 부인에 대해 떠올렸다. 놀랍게도 이 남자는 나이 서른이 가까웠을 때 십 대 초반의 소녀와 결혼했었다.
‘으음…두 사람이 몹시 행복하니까 그거로 충분하지만.’
뭔가 이건 좀 아닌 거 같다 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프럼프의 말에 수긍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다.
“듣고 보니 확실히 자네말도 일리가 있긴 하군.”
“하하…회주님이라면 알아주시리라 믿었습니다.”
“…”
뭔가 굉장히 나이 어린 소녀를 좋아하는 동류로 취급받은 거 같아서 기분이 미묘했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딱히 자신은 그…성적인 의미로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어린아이들이 귀여운 걸 보면서 저도 모르게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것과 같은 훈훈한 감정인지라 하등 꺼릴 게 없어서였다.
아마도….
“뭐, 그렇더라도 이 얘기는 조심하도록 하지. 레니스군이 정말로 그…… , 흠흠 여튼 그런 일이 있었다간 왠지 지금의 우리 세계 그 자체가 멸망의 위험에 빠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문득 들어서 말이네.”
칼 시즈와 프럼프가 이렇게 세계 규모의 진정한 사랑의 미학에 관한 철학적인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여성진 쪽에서도 대화에 큰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얘기의 중심이 아스텔에서 이번에 리노아에게로 화살이 넘어간 것이었다.
“그래서 리노아는 레니스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자신을 향해 그렇게 묻는 레이윈 때문에 당황하면서도 리노아는 무난한 답변을 했다.
“그야…얼핏 봐선 아름다운 소녀로 착각할 수 있는 신비한 중성적인 외모와는 다르게 몹시 믿음직스럽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리노아에게 레이윈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남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거야.”
“에? 저…저는 딱히…그러니까…그게…저따위에겐 과분한 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리노아를 아스텔과 레이윈이 다 이해한다는 시선으로 보면서 서로 말하기 시작했다.
“난…리노아라면…괜찮아.”
“음…역시 우리 딸이구나. 식은 그럼 합동결혼식이 좋을까?”
“네….”
“저…저기 저는 그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몸을 꼼지락 꼼지락거리면서도 강하게는 부정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고 마는 리노아였다.
그런 리노아가 귀여워서 레이윈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리노아를 꼬옥 끌어안았다.
“마…마님?”
“나뿐만 아니라 남편도 그렇고 딸아이도 그렇고 너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으니까 너무 사양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감사합니다.”
리노아가 레이윈의 따스한 말에 눈을 감고 자신을 안고 있는 레이윈을 마주 안으면서 그 품안에 고개를 기대려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리노아는 세상이 갈라지면서 동시에 자신들도 갈라지는 너무도 섬뜩한 감각에 레이윈에게서 몸을 확 떼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리노아 뿐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 있었다.
동시에────,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만근의 압력이 그들의 온몸을 짓눌렀다.
레이윈을 제외한 다른 네 명은 이러한 감각을 알고 있었다.
숲에서 악의의 정수가 개화했던 핏빛의 결계 안에 갇혔을 때와 같았다.
그러나 비슷하면서도 근본적으로 그것과는 달랐다.
지금 이 압력은…
무수한 시체를 사전에 준비하여 그것들을 매개로 펼친 결계가 아니었다. 리노아와 아스텔 두 재녀가 자신들의 죽음을 각오했던 결계조차도 지금 이곳에 현계한 무언가가 내뿜는 압박감과 비교하면 조잡하게마저 느껴졌다.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 틈을 비집고 나온 존재가 내뿜는 실로 심령을 뒤흔드는 섬뜩한 기운.
무엇인가.
도대체 지금 여기에 나타난 존재는 무엇이기에 그 존재감만으로 이렇게 사람을 짓누른단 말인가.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그들이 압박갑의 근원지인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곳에는 몸에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여인이 있었다.
기다란 붉은 머리와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 잘록한 허리와 커다란 가슴. 그리고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은 여인의 몸을 여인의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핏빛의 붉은 뱀이 휘감으며 중요 부위만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너무도 요사스럽고 관능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자리서 여인을 보고 여인에게 음란한 마음을 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한없는 경외감에 영혼이 떨리며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만약 주위에 다른 상회의 일원들이 여인에게 엎드려 오열하면서 비참하게 자비를 구걸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자신들 역시 지금 저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을 보며 자신들마저 다른 이들처럼 무너져선 안 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견딜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 위에 선 자의 의무이자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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