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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유혹에 넘어간 현자-29화 (29/47)

〈 29화 〉 제28 화

* * *

시체와도 같은 창백한 나무에 몸통이 뜯겨져 나간 채 무수히 많은 머리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광경은────,

마치 나무에 맺힌 열매를 떠올리게 했다.

악의의 열매를…….

그리고 목 아랫부분이 없는 머리들의 눈과 입에서 일제히 흘러내린 탁한 피로 대지에 그려진 눈이 부릅떠지면서 그 안에서 나타난 눈동자가 세상을 핏빛 섬광으로 물들이더니 핏발이 선 눈동자가 대지로부터 허공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그리고───, 레니스와 파미유들의 눈앞에서 시체의 잔해들이 공허한 눈동자 안으로 빨려들 듯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리카의 데스 사이드에 의해 깔끔하게 잘린 팔다리와 육편이,

유이의 가시덩굴 채찍에 의해 찢어진 팔다리와 육편이,

레아의 수정구에 의해 으깨진 팔다리와 육편이───,

허공에 떠오른 거대한 눈동자 주위로 몰려들어 얼기설기 제멋대로 여기저기 붙기 시작하더니,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가늘고 길며 여러 마디로 나뉘어져 있는 수십 개의 인간의 팔다리가 제멋대로 붙어있어 거대한 지네를 떠올리게 만드는 혐오스런 몸통,

인간의 잘리고 찢어지고 으깨어진 팔다리로만 이루어진 등 뒤에 달린 거대한 두 쌍의 박쥐와 같은 형태의 날개,

그리고 나무에 매달려 있던 머리들이 목과 몸통 여기저기에 붙은 실로 괴이한 그 모습은…여러 사람의 고통으로 가득 찬 얼굴을 온몸에 박아놓은 기괴하고 거대한 용이었다.

거대한 포효와 함께 인면룡의 몸이 한차례 꿈틀거린다.

무수한 인간의 팔다리가 제멋대로 어설프게 붙어있는 거대한 지네 같은 몸이 꿈틀거리는 모습은 페블 위크의 마당에 수북이 쌓여있던 바싹 마른 바퀴벌레의 시체들과 거기에 달라붙어 있던 구더기들보다도 혐오스러웠다.

인면룡이 두 쌍의 날개를 쫙 펴며 다시금 포효했다.

숲이 흔들리며 숲에 있던 모든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숲 밖으로 도망쳤다.

“읏…!!!”

“이건 좀…”

“아니지 않아요?”

리카, 유이, 레아가 뒤돌아서 레니스를 보며 그녀들답지 않게 힘 빠진 목소리로 투정 어린 말을 내뱉었다.

레니스는 아무 말 없이 힘내라고 손짓하며 미소로 답했다.

“오늘의 레니스님은 가차 없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대낫을 지팡이 삼아 의지하면서 어떻게든 자세를 취하는 리카.

“전부 우릴 생각하셔서 그러시는 거니까요, 우후후. 어쩔 수 없죠. 최선을 다해 싸울 수밖에.”

유이 역시 리카와 마찬가지로 하도 휘둘러서 감각마저 없어진 손을 질타하여 억지로 채찍을 다시 쥐었다.

“네. 소녀의 근성이란 걸 레니스님께 보여드리도록 하죠.”

둘에게 답하며 바닥난 성력을 어떻게든 쥐어짜 내며 자신뿐 아니라 두 언니의 전의까지 한껏 고양 시키는 레아.

그리고 인면룡의 인간의 팔다리로 이루어진 활짝 펼쳐진 날개로부터 무수히 많은 팔이 하늘을 뒤덮으며 파미유들을 덮쳤다.

실전은 연습같이, 연습은 실전같이.

만고를 꿰뚫는 진리지만 진실로 목숨을 위험에 내놓고 사는 모험가들에게는 상당히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다.

안전한 장소에서 자신이 정신을 잃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한계까지 쥐어 짜내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실전에서는 어지간해서는 그럴 수 없다. 자신이 의식을 잃은 뒤도 생각해야만 하기때문에 항상 도망치기 위한 여력을 남겨두고, 온 신경을 집중해 싸우면서도 언제든지 발을 빼야 할 것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염두에 두고 싸운다.

이 차이는 몹시 크다.

안전한 장소에서 의식을 잃은 뒤의 안전도 보장받은 채 한계까지 쥐어 짜내는 것도 의미가 없진 않지만, 그것으로는 닿지 않는다.

언젠가는 반드시 맞닥뜨릴 벽을 부술 수 없다.

삶과 죽음이 시시때때로 교차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을 이겨내고 앞으로 내딛어야만 자신만의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파미유들은 그런 레니스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녀들이 정말로 생명을 잃을 순간이 되면 레니스가 반드시 구해줄 것이란 걸 믿으면서도 가급적 레니스의 도움을 의식하지 않고 인면룡과의 전투에 임했다.

유이가 자신들을 향해 광범위하게 온 시야를 가득 메우며 날아오는 팔들을 향해 전방위로 넓은 범위에 걸쳐 현란하게 채찍을 휘두른다.

그러자 유이 자신뿐 아니라 리카와 레아까지 막아줄 막이 형성되었다. 너무도 광범위한 공격이었기에 이동한다 해서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막으려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굉장한 기세로 그녀들의 몸에 꽂히려던 시체에서 떨어져 나온 손들이 유이가 허공에 펼친 채찍의 막을 통과하지 못하고 가로막힌다.

비처럼 끊임없이 쏟아지는 시체 손들로부터 유이가 리카와 레아를 지켜낸 후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을 쥘 힘도 없어 땅에 떨어뜨린 후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의식만을 간신히 유지한 채 고개만을 살짝 들어 올려 리카와 유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공격이 끝날 때까지 막아낸 후, 유이가 쓰러지는 순간 리카가 한줄기 검은 번개가 되어 지면을 박차고 인면룡의 몸통 한가운데서 핵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거대한 눈동자를 향해 돌격했다.

그러한 리카를 향해 인면룡의 몸통에 붙어있는 인간의 팔다리와 육편들이 리카를 요격해왔다.

그러나…

리카는 그런 것들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공중에서 한 번 더 발을 박차 도약하여 가속.

그리고 그동안 줄곧 한 손으로 들고 있던 대낫을 두 손으로 힘껏 잡고 머리 위로 치켜 올린 뒤 힘차게 아래로 휘둘러서 그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회전시키며, 그 회전력을 이용하여 속도와 파괴력을 배가시킨 뒤 거대한 눈을 베러 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리카를 요격해오는 무수한 시체의 파편들.

하지만 리카를 요격하려는 공격들을 레아의 수정구가 현란하게 요격했다.

그리고 드디어 리카의 낫 끝이 인면룡의 핵인 거대한 눈동자를 가르려할 때였다.

리카의 데스 사이드 끝이 눈동자의 종이 한 장 차이 앞에서 멈췄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일격을 막고 있는 무형의 실드를 어떻게든 베어내려는 리카와 그런 리카를 지원하려는 레아의 구체 역시 날아와 인면룡의 핵 주변에 펼쳐진 무형의 실드를 공격하려했지만, 그전에 반탄력에 의해 돌격해올 때보다 두어 배는 빠른 속도로 리카가 지면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리카 언니!!!!”

레아의 비명성이 울린다.

그때 조금 전까지 지면에 쓰러져있던 유이가 어느새 달려와 리카를 받아내려 했지만, 너무도 강한 반탄력에 의해 튕겨져 나온 리카를 감당하지 못하고 둘 다 거칠게 지면에 처박히며 무수한 흙먼지를 피워냈다.

그리고 흙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쓰러져 있는 둘에게로 시체 손이 두 사람의 복부에 꽂혔다.

“커헉”

“우웁”

복부에 가해진 일격에 두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레아가 두 사람을 구하려고 구체를 조종해보지만 그런 그녀의 주위로 마찬가지로 사방에서 시체손이 공격해왔다.

“아악!! 아…아…윽…우웁…”

명치에 거센 일격을 맞고 레아의 눈이 풀렸다.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침조차 넘기지 못해 레아의 턱을 타고 침과 위액이 역류해 흘러내리며 그녀가 쓰러지려 했지만 뒤이어서 사방에서 시체손의 공격이 레아를 타격하여 그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었다.

격통에 의식을 잃지도 못하고 쓰러지지도 못한 채 레아는 구토와 실금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을 더럽혔다.

“커헉…아…으…으윽…아아아아악!!!!!”

그리고 그것은 지면을 뒹굴고 있는 리카와 유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태세를 정비하기도 전에 무수한 시체의 파편들이 그녀들의 온몸을 강타했다.

“컥…우우웁…우웨에에엑”

“우웁…웨엑…커헉…”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떨어져 내린 팔과 다리에 의해 복부를 짓밟혀서 비명을 지르다보니 벌려진 입안으로 언제 죽었는지 모를 썩은 시체의 파편이 들어왔다. 그것들이 입에 들어온 순간 풍기는 썩은 내에 그녀들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냈다.

그 순간에도 무자비한 폭력은 계속 이어졌다.

몸을 웅크려서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보려고 할 한순간의 틈조차 없이 그녀들은 눈물, 콧물, 침, 오줌…몸에 있는 온갖 액체를 그녀들이 쓰러져있는 지면에 쏟아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경련하고 있었다.

“아아…”

그리고 레아마저 지면에 털썩 쓰러진 순간 인면룡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끊임없이 두 눈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얼굴에서 입이 가로로 길게 찢어지며 크게 벌려지더니 숲 전체를 녹이는 브레스를 토하였다.

그 순간이었다.

레니스가 리카, 유이, 레아에게 선물로 주었던 에메랄드 목걸이들이 일제히 빛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인가───.)

그것은 신호였다. 도저히 그녀들이 어찌할 수 없는 확고한 죽음의 공격이 가해질 때 그것을 감지하고 방어하기 위한 신호였다.

인면룡의 포이즌 브레스가 파미유들이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가 숲을 녹여버렸다. 그러나 그녀들은 브레스에 휩쓸리지 않고 어느샌가 레니스 뒤로 강제로 이동되어 있었다.

고통 때문에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그녀들에게 레니스가 다가가 자신의 마나를 그녀들의 몸 구석구석 흘려 넣어 재생의 마법으로 그녀들을 완전히 치료하여 고통을 없애준다.

“레…레니스님!!! 읏…응…아…아윽…”

그리고 정화 마법으로 그녀들의 엉망으로 더럽혀진 옷도 깨끗하게 해줬다.

“레니스님! 흑…”

“보기 흉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저희 그래도…정말 최선을 다 했어요….”

세 사람은 고통에서 풀려나 안도해서인지 레니스에게 와락 안겨서 울면서 응석을 부렸다. 레니스는 그런 그녀들의 등을 토닥여주며 위로해줬다.

“네. 고생 많으셨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들을 세게 한번 꽈악 껴안은 후 그녀들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지금부턴 푹 쉬세요. 나머지는 제가 정리할게요.”

“네.”

파미유들의 조신한 대답을 뒤로하며 레니스는 이쪽을 노려보는 인면룡을 향해 오를 팔을 뻗었다.

인면룡을 감싸듯이,

인면용을 찌부러뜨리듯이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인면룡은 자신에게 집중되어 전신을 압박하는 거대한 힘에 저항해보려고 발버둥을 쳐봤지만, 순식간에 온몸이 쪼그라들더니 가슴에 있는 커다란 눈과 함께 터져버렸다.

인면룡의 핵을 이루던 눈알이 터지면서 무수히 많은 검게 탁해진 피가 홍수처럼 흘러나오며 숲을 피 바다로 만들었다.

한편…

“응…읏…레…레니스님…”

유이가 그런 레니스의 모습을 보면서 주변에 리카나 레아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요염한 신음성을 흘리면서 자신의 가슴과 허벅지 안쪽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읏…아아…레니스님께 종속 되어서 지배당하고 싶어요.”

그리고 유이처럼 직접적으로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다른 두 명의 본심도 지금 이 순간 같았다.

파미유들은 남자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천연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남자들이 자신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그들이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외모와 몸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악용한 적도 악용할 생각도 그동안 없었지만…그래도 다른 남자들과 자신들의 관계에서 자신들이 우위이고 주도적인 입장에 있다고 내심 생각했다.

특히 아직 정말로 순수한 레아는 예외로 치더라도 리카나 유이는 자신들이 남자를 지배할 일은 있어도, 자신들이 지배당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특히 스스로 종속되어 지배당하고 싶단 생각이 들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레니스를 만나고, 그와 함께 지내며 그가 지닌 힘의 편린을 이렇게 엿보게 되기 전까지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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