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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유혹에 넘어간 현자-28화 (28/47)

〈 28화 〉 제2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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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릭 끼릭

끼릭 끼릭

끼릭 끼릭

나무에 목을 매단 채 축 늘어져 있던 시체들의 몸통이 목부터 찢겨 지면서 땅에 떨어지더니 레니스와 파미유들을 덮치기 위해 기괴한 몸짓으로 다가온다.

기괴한 적들을 앞에 둔 파미유들은 어느새 각자의 무기를 들고 전투태세로 들어가 있었다.

리카는 사신의 모습을 상상한 그림에서 으레 볼 수 있는 짙은 검은색의 거대한 낫을 한 손으로 들고 있었고, 유이는 가시덩굴이 떠오르는 뾰족뾰족한 가시가 박혀 있는 기다란 채찍을 들고 있었다.

(둘 다 묘하게 어울리는군.)

그리고 레아의 경우엔 그녀의 머리보다 조금 작은 해골 모양의 수정구 2개를 그녀의 주위로 둥실둥실 띄우고 있었다.

(헤에~, 저건 마력이 아니라 신성력이네.)

(그래, 그것도 상당한 양의.)

성신교와는 연이 없어 보였던 레아가 성력에 기반을 둔 전투술을 구사하는 게 의외라는 루아에게 담담하게 마찬가지로 약간의 놀람을 담아서 답하는 레니스.

레니스와 루아가 어딘가 남의 일처럼 급박한 상황을 앞에 두고 그런 짤막한 대화를 여유롭게 나누고 있을 때였다.

레아가 집게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만을 올곧게 쭉 편 뒤 오른팔을 들어 올려 하늘을 가리키는 게 시작이었다.

레아 주위에 둥실둥실 떠 있던 두 개의 구체들이 레아의 손가락이 향하고 있는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그리고 레아가 힘차게 팔을 수직으로 내리며 정면을 가리키자 하늘로 올라갔던 수정구들이 대각선으로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며 제일 앞에 있는 괴물의 상반신을 날려버리고 그대로 땅에 박히면서 거대한 흙먼지를 피웠다.

그것이 본격적인 싸움의 신호였다.

리카가 한줄기 기다란 검은 선이 되어 괴물들에게로 뛰쳐나가더니 끊임없이 대낫을 휘두르며 몬스터들을 베어 나갔다.

유이의 기다란 채찍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시체로 이루어진 괴물들의 살점이 뜯겨나가며 허공에 피의 비를 뿌렸다.

그리고 레아는 날렵한 발걸음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바꿔가면서 악단을 지휘하듯이 손가락을 휘두르며 2개의 구체들을 조종하여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레니스는…

(너는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을 거야?)

루아의 지금 말처럼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그녀들의 싸움을 느긋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괴물들의 무리 중에 한 마리가 파미유 멤버들을 뚫고 뛰어올라 레니스를 공격해왔다.

“레니스님!”

레니스가 딱히 자신을 향해 공격해오는 몬스터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리카, 유이, 레아가 깜짝 놀라며 일제히 레니스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나 레니스를 공격하려던 몬스터들은 굳이 레니스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레니스를 향한 살기에 자연스레 반응하여 저절로 솟아오른 보호막에 부딪힌 후 그 반탄력 때문에 순식간에 모든 피부가 벗겨지면서 피 분수를 사방으로 흩뿌리다가 온몸이 산산이 터져나갔다.

땅바닥에 그 파편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너무도 잔인한 광경 때문인지 아니면 말도 안되는 위력을 보여주는 레니스의 실드 때문인지 파미유들은 잠시 얼이 빠져 전투를 중단하고 말았다.

레니스가 그녀들에게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마음껏 싸워주세요.”

“네! 레니스님.”

힘차게 대답하는 그녀들. 그리고 레니스는 루아에게 습격 때문에 잠시 뒤로 미뤄졌던 좀 전의 질문에 대해 답하였다.

(그녀들에게서 소중한 전투 경험을 뺏고 싶지 않아서다.)

(그냥 네가 특별훈련이라든가 비법 같은 걸 전수해줘서 순식간에 강하게 만들어주면 될 일 아냐?)

레니스는 그 말에 쓴 웃음을 지으며 루아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세상은 그렇게 쉽고 편리하지 않아. 그런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건 사기꾼뿐일 거라고 생각해.)

좋은 스승이 있다면 좀 더 정상에 오르는 데에 빠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진정으로 강해지고자 원한다면 편한 길을 찾을 게 아니라 무수한 실전 속에 목숨을 걸고 스스로를 투료하는 수밖에 없다.

나태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은 편하고 쉬워 보이며 당장에라도 빠르게 그 효과가 나타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있다.

허나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손에서 빠져나가는 법.

하지만 그보다 정말로 무섭고 진정으로 독이 되는 것은 비록 모래알처럼 자신에게서 쉽게 빠져나가고 거기에 더해 자신을 파멸로 끌고 갈지라도, 사람이란 한번 쉬운 방법으로 무언가를 얻게 되면 계속하여 쉽게 얻는 법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무엇보다도 경계하여야 한다.

레니스는 오랜 경험으로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리카가 대낫을 높이 들어 올린 후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 괴물 하나가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다. 그러나 괴물이 쪼개지며 피보라를 내뿜으며 리카의 시야를 가릴 때 갈라진 몸 틈 사이로 다른 괴물의 팔이 리카의 가슴을 꿰뚫으려고 튀어나왔다.

피보라를 가로지르며 피에 물든 괴물의 팔이 리카의 가슴을 꿰뚫기 바로 직전 유이의 채찍이 그 팔을 휘감더니 팔과 함께 그 팔의 주인인 괴물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공중에 떠오른 몬스터에게 레아가 다루는 구체가 정확히 날아가 괴물의 상반신을 날려 버린 후 다시 레아에게로 돌아가 레아 주위에 떠 있었다.

파미유들은 개개인의 실력도 또래 소녀들과 비교하면 특출났지만, 서로가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점이었다.

강한 유대감 때문인지 셋이서 한 몸처럼 연계하고 있어서 개인의 실력을 훨씬 상회 하는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허나 몬스터들의 수가 꽤 되고 무엇보다도 팔다리가 잘린 정도의 공격들은 금세 회복해버리는지라 파미유들의 숨이 점자 가파져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아직은 할만했다.

세상에는 공짜가 거의 없다. 대부분은 무언가 크든 작든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자유나 평화는 큰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다.

지금의 세상은 결코 모두가 행복한 지상낙원 같은 낙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인류 공통의 적인 마족이 사라진 지금 인간은 다시 인간들끼리 경쟁하며, 같은 인간을 핍박하기도 하고 착취하기도 하여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자들 또한 많아진 서글픈 세상이었다.

모두가 협력하여 한 마음으로 마족과 싸우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입가에 쓴맛이 감돈다.

그러나…모든 인간이 마족들에게 학살당하며 하루하루를 공포에 떨며 보내던 나날과 비교하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 많아졌는가? 그들의 얼굴에 떠 있는 미소가 단순히 다른 사람을 발판으로 삼아서 만들어졌다고 취급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비록 가장 이상적인 세계는 아닐지 몰라도 이러한 평화라도 얻기 위해 무수히 많은 피를 대지에 흘려야만 하였다.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문제들은 조금씩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격차를 줄여나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에 다시금 마족을 출현시키려는 자들이 있다. 모든 판을 뒤집어엎으며 지금의 평화를 깨뜨리려는 동시에 자신과 동료들이 해온 모든 것들을 부정하며 무의미한 일로 되돌리는 행위이다.

(과거 내가 남아있는 마족을 토벌하는 동한 소중한 동료들이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졌던 잿빛 대지 위에 간신히 쌓아올린 평화를 무위로 되돌리려는 것을 완전히 남의 일 마냥 내가 그저 방관할 수 있을까?)

(아마도 심연 속에 모습을 숨기고 암약하는 그들과 나는 다양한 곳에서 부딪힐 것이다.)

레니스는 리카, 유이, 레아를 바라본다.

그녀들은 어느새 대다수 몬스터들을 퇴치하고 시체의 산과 피의 바다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와 어둠의 장막으로 자신을 가린 자들의 대립이 격렬해지면 그들은 분명 내 주변인들을 노릴 것이다.)

(가급적 지켜주고 싶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한번 세계를 구한 레니스였지만, 결코 상대를 경시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인간은 같은 인간을 상대로 악마보다도 교활하고 잔혹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충분히 경계하고 미리미리 할 수 있는 대비를 해야겠지.

그러니 내가 그녀들의 곁에 언제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이상, 내가 없을 때라도 그녀들은 스스로를 어느 정도 지킬 수 있게 될 정도로 강해져야만 한다.

(나는 더 이상 내 곁에 있으면 위험에 처한다고 하여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으니까.)

그녀들은 지금 자신들의 전력을 한계까지 쥐어 짜내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보였다.

(지금부터인가……….)

그때였다.

목 아랫부분의 몸통이 찢겨져나간 채 무수히 많은 머리만이 매달려있는 새하얀 나무가 창백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에 매달려있는 수많은 머리들의 눈과 입에서 일제히 거무죽죽한 죽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에게서 흘러내린 피가 땅에 떨어지자 눈꺼풀이 감겨있는 모양의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완성된 마법진이 붉게 빛났다.

마법진 안에 그려져 있는 감겨있는 눈이 부릅떠지면서 그 안에서 희번덕거리는 거대한 눈알이 나타나더니 세상이 붉은 섬광에 휩싸였다.

(여기서부터다. 그녀들의 진짜 시련은.)

그녀들은 지금부터 한계까지 혹사하여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을 것 같은 몸이지만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내딛여 적과 싸워야 할 것이다.

적을 이기지 못하여도 좋다.

그녀들이 한계 상황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단 사실이 중요한 거니까. 그 한순간 아주 짧은 한순간 일지라도 분명히 그녀 자신들을 이긴 것이니까.

그 작은 걸음이야말로 그녀들을 더 높은 경지로 인도해줄 것이다.

같은 시각…

황금사과 상회의 상공에선 ‘사제’가 자신의 검은 로브를 펄럭이며 허공에 저주를 맺고 있었다.

사제를 중심으로 여섯 개의 거대한 붉은 눈동자가 허공에 떠 있었고, 사제의 등 뒤에는 거대한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원을 그리고 원안의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나락으로부터 어둠의 시대를 고하는 원한으로 가득 찬 절규가 울려 퍼지노라.”

“두려워하라, 긍지를 버려라.”

“그리하여 유린하도록 하라, 이 세상을.”

사제가 그렇게 외치자 허공에 떠 있는 여섯 개의 붉은 눈동자에서 검붉은 탁한 피가 흘러내리며 그 피로 붉은 뱀을 더럽혔다.

그리고 일그러진 공간이 반으로 갈라지며 그 안으로부터 헐벗고 있는 나신의 여인이 나타났다.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는 여길 수 없는 외경을 두른 핏빛의 긴 머리를 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뱀이 여인을 휘감으며 허벅지의 은밀한 부분과 봉긋한 젖가슴을 가린다.

그 순간 지상에 있던 황금사과 상회의 모든 인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우러러 여인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여인의 모습이 새겨지는 순간…

그들은 두 눈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감히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땅에 무릎을 꿇었다.

하반신을 노란 액체로 더럽히며 얼굴을 땅바닥에 박은 채 경외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자신들의 온갖 상스러운 체액이 지면을 더럽히며 흘러와 지면에 박고 있는 자신들의 얼굴을 더럽히더라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인간은 저 여인에게 감히 거역할 수 없다.

인간은 저 여인 앞에서 벌레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다.

그저 대지에 얼굴을 파묻고 자비를 구걸할 뿐.

지금 이곳에 현현한 것은────, 죄에 물든 여신의 그림자.

지금 이곳에서 인간을 까마득히 초월한 존재에 의한 유린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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